불멸의 영령 최채 (11)


날짜 2017-05-27 16:12:44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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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거미가 지자 적기의 공습도 끝나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던 적들도 물러갔습니다.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적들을 격퇴한후 팔로군  경위부대와 함께 적의 포위망을 뚫고 이동했습니다. 그 전투에서 적군 3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온 무장대원들은 팔로군 경위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우리 40여명 비무장인원들은 팔로군 후근부와 함께 이동하게 되였습니다. 

       전투원들과 갈라진 우리는 새벽녘에 흑룡동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소나무숲에 이르렀습니다. 진종일 물 한모금, 밥 한술 입에 넣어보지 못한 우리는 소나무숲 여기저기에 맥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싱그러운 소나무향기가 풍기는 숲속에 누워 숨 한번 편히 쉬여보는것만 해도 큰 휴식이였습니다. 하지만 겨우 숨 좀 돌리나 했더니 갑자기 쿵쿵 하는 포소리가 귀청을 때렸습니다. 왜놈들이 흑룡동을 향해 진공해온것이였습니다. 포성이 점점 가까와졌습니다. 우리는 일어나 다시 산을 톺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요문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오다가 부참모장 좌권동지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습니다. 좌권동지는 부대를 이끌고 포위를 뚫고나가다가 일본군의 포탄에 맞아 희생된것입니다. 나는 그날의 비통함을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5월 27일, 샛별이 반짝이는 이른새벽에 우리는 하청구에 도착했습니다. 련 이틀째 적들의 추격을 받으며 강행군한 우리는 물 한모금, 밥 한술 입에 넣어보지 못한탓에 입술은 갈라터졌고 배가죽은 등에 붙어 허리도 바로 펼수 없었답니다. 모진 허기증과 갈증으로 동지들은 걸음도 바로 걷지 못했고 휘청거리다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의 이런 사정을 알고 미리 마련해놓기라도 한듯 우거진 대추나무숲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 숲속에 들어가 쉴수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여 좁쌀죽을 쑤어놓고 먹으려는데 또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습니다. 서쪽 산에서 왜놈들이 벌떼처럼 달려오며 총을 쏘아댄것입니다. 다 쑤어놓은 죽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겼지만 우리는 죽 한술 떠먹지 못하고 남쪽 산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진이 빠질대로 빠진 녀성들은 말꼬리를 엇갈아 잡아쥐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왜놈들은 좁디좁은 산골짜기가 떠나갈듯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추격해왔습니다. 우리는 산에 채 오르지 못하고 산비탈을 에돌아 왜놈들의 추격을 간신히 피했습니다. 이날도 진종일 걸어 해가 질무렵 산등성이에 이르렀답니다. 하지만 이미 적들의 포위망에 들어가고말았습니다. 기진맥진한 대오를 거느리고 포위망을 뚫고나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대부대가 움직이면 목표가 드러나기 쉽고 많은 희생이 따를수 있었습니다. 정치부 주임 라서경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팔로군전선총지휘부 산하의 각 부문과 조선의용대는 분산하여 각기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 조선의용대 정치사업일군, 후방사업일군, 녀성대원들과 가족 40여명은 산등성이에서 조금 쉬고나서 화옥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자그마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몇몇 동지들을 파견해 백성들이 숨어있는 산굴을 찾아가 형편을 알아보았습니다. 부근 마을은 이미 왜놈들이 점령했고, 그들이 낮에는 산굴까지 뒤지며 백성들을 학살한다는것이였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사태가 더욱 어려워져 40여명이 함께 행동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라서경동지는 각기 흩어져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진광화의 지시대로 다시 4개 분조로 나눠 행동해야 했습니다.
우리 분조의 성원들로는 진광화(陳光華, 1911-1942. 원명 김창화(金昌華).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평천리에서 태여났다.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후 반일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7년, 광주국립중산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했다.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했고 1938년, 화북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 1941년, 화북 조선청년련합회 설립,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포위토벌 전역에서 싸우다 산서 편성(便城) 화옥산(花玉山)에서 희생되였다.), 석정, 김선생(이름은 모름), 리철중, 란영(녀), 리수영(녀), 김기숙(녀), 김선생의 딸 해연이였습니다. 무기라고는 리철중의 권총 한자루와 수류탄 몇개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분조는 젊은 내가 앞장서서 적정을 살피며 나가고 리철중이 김선생과 녀성들을 호위하며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는 새벽녘에야 자그마한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피난가고 마을에는 민병 10여명이 남아 뒤수습을 하고있었습니다. 민병들은 우리를 보자 이제 적들이 당장 쳐들어올것이니 어서 이곳을 떠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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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마을에서 빠져나와 산비탈을 걸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휘영청 날이 밝아왔습니다. 마침 산비탈에는 관목림이 있었습니다. 리철중은 김선생과 녀성들을 데리고 깊은 관목림에 들어가 숨고 나는 진광화, 윤석정과 함께 숲가에 숨어 적정을 살폈습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숨어있는 숲 앞 좁은 산골짜기 건너 산길에 왜놈 군관이 100여명이나 되는 적병을 거느리고 나타났습니다. 왜놈 군관은 말을 멈춰세우더니 망원경을 들고 우리가 숨어있는 관목림을 살폈습니다. 누런 군복을 입은 왜놈 100여명이 군관의 명령을 기다리며 한일자로 서있었습니다. 관목림숲을 살피던 왜놈 군관이 뭐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일본말을 아는 진광화와 윤석정은 그 소리를 듣고 이구동성으로‘우리를 발견했소!’라고 말했습니다.‘우리 셋은 발견됐으나 리철중동지네는 발견되지 않은것 같으니 이 숲을 뛰쳐나가기요. 숲속의 동지들을 보호해야 하오.’진광화의 건의에 따라 우리 셋은 숲속에서 뛰쳐나와 산비탈로 번개같이 내달았습니다. 왜놈들은 일제히 우리를 향해 총질을 하였습니다. 쌔앵쌩 하고 총알이 머리우며 귀불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때 진광화가 소리쳤습니다.‘우리 셋이 한곳으로 뛰여가다가는 다 죽을수 있소. 최채는 산우로, 윤석정은 산중턱으로, 나는 산아래로 갈라져 뛰기요.’우리가 갈라져 뛰니 적들의 화력도 분산되였습니다. 목에서는 겨불내가 확확 풍겼고 발바닥에서는 불이 일었습니다. 총알이 마구 날아지나갔습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산우로 뛰여올라갔습니다. 때마침 백성들이 양몰이할 때 비바람을 피하느라 파놓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만한 자그마한 석굴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언제 총알에 맞을지 모르는 나에게 천만다행으로 은신처가 생긴겁니다. 나는 주저없이 그 석굴속에 뛰여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가쁜 숨을 돌리고나니 콩볶듯하던 총소리가 뜸해지고 왜놈들이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나는 우리 동지들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여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머리를 석굴밖에 내밀고 산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총알이 날아와 군모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나는 엉겁결에 머리를 돌에 박는바람에 안경을 깨뜨리고말았습니다. 이제는 내 위치가 드러나고말았습니다. 놈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습니다. 앉아있어도 죽고 뛰여나가도 살길이 없었습니다. 나는 2개뿐인 수류탄을 단단히 거머쥐였습니다. 죽은척하다가 놈들이 다가오면 피값이라도 하고 죽자는 생각이였습니다. 
헌데 한참이나 미친듯이 총질하던 놈들이 내가 죽은줄 알았던지 사격을 멈췄습니다. 놈들이 떠나자 나는 석정이 뛰여가던 길을 따라가면서 살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허벅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윤석정을 발견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석정의 다리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있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마구 터지는것 같았습니다. 내가 옷을 찢어 그의 상처를 싸매주려 하자 윤석정이 나를 밀쳤습니다.‘그럴새가 없소. 진광화동지가 어떻게 되였는지 가보고 오오. 아래서 악 하는 소리가 나는것 같았소. 빨리 가보오.’
나는 석정의 곁을 떠나 진광화가 달려가던 길을 따라가며 그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진광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가노라니 벼랑이 나타났습니다. 더는 찾아나갈 길도 찾을 방도도 없었답니다. 나는 윤석정의 다리에서 피가 흐르는것을 본지라 먼저 그를 구하고 다시 진광화를 찾아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되돌아 윤석정한테 달려갔습니다. 나는 윤석정을 업고 나의 은신처였던 석굴에 그를 데려다놓고 상처를 싸매주고 진광화동지를 찾아 떠났습니다. 리철중은 그때까지도 김선생과 녀성들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지들은 한 사람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습니다. 비록 부상자가 생기기는 했으나 희생자가 없는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진광화를 찾고 윤석정만 구하면 모두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헐떡거리며 동지들에게 윤석정이 부상당하고 진광화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알렸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철중이 벌떡 일어났고 모든 동지들이 뒤따라 일어섰습니다. 나와 리철중은 다른 동지들을 남겨두고 나는듯이 석굴로 달려가 윤석정의 상처를 싸매주고 진광화를 찾아 떠났습니다.
우리는 벼랑가로 달려갔습니다. 진광화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철중은 나에게 석굴로 가 윤석정을 돌보라고 하고는 혼자 벼랑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벼랑아래에서 진광화를 찾던 리철중은 눈앞에 나타난 참경을 보고 그만 풀썩 주저앉고말았습니다. 다리에 총을 맞은 진광화가 벼랑에서 떨어져 분신쇄골이 되였던것이지요. 붉은 피가 벼랑이며 벼랑밑의 돌들을 시뻘겋게 물들였더랍니다. 철중은‘진광화동지’하고 목이 터져라 불렀답니다. 하지만 산울림만 들릴뿐 진광화가 대답할리 만무했지요. 
리철중은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적들은 국민당반동파의 백색테로에서도, 광주와 화남 인민들에게 항일투쟁의 혼을 불러일으키던 한 투사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진기로예변구 항일근거지에서 변구당학교 교무과장, 조직과장, 당총지서기 직무를 맡고 군정간부와 당원들을 알심들여 양성하던 진광화는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서른한살 한창 나이에 오매에도 바라고 그리던 자유해방의 날, 승리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바친겁니다.
       우리 분조의 대원들은 벼랑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부드러운 빛이 흘러넘치던 진광화동지의 두눈은 꼭 감겨있었고 그 자애로운 얼굴은 피못이 박혀 생김새도 알아볼수 없었습니다. 그의 피로 물든 돌을 주어 그의 유체와 함께 안장하고 숙연히 머리 숙여 묵도를 올렸습니다. 이날 우리는 진광화의 묘지앞에서 그의 뜻을 이어 자유해방의 그날까지 굳세게 싸워나가리라 다짐했으며 언제든지 뼈에 사무치는 그 원한을 풀리라 두주먹을 불끈 쥐고 맹세했습니다.”
최채동지는 이 대목에서 목이 메여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을 뒤로 젖히고 천장을 쳐다보는 그의 두눈초리로 눈물방울이 구슬처럼 똑똑 떨어졌다. 그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고나서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릴대로 흘린 윤석정은 입을 꼭 다문채로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물, 물, 물……’하고 물을 찾았습니다. 차마 듣고만 있을수 없더군요. 나는 물컵을 찾아 들고 산골짜기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산골짜기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것도 물이지만 세상에 가장 귀한것도 물임을 나는 그때 절감했습니다. 단 한방울의 물이라도 얻어 윤석정의 목을 추겨주련만 나는 물 한방울 얻지 못한채 되돌아왔습니다. 윤석정은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는 갈증을 참지 못한 윤석정은 빈 컵에 오줌을 누더니 그 오줌을 마셨습니다. 나는 목이 메여 말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윤석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새벽녘에 우리 조선의용대 무장대원 하진동이 찾아왔습니다.‘철중, 최채’라고 부르는 귀에 익은 소리에 우리는 달려나가 하진동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았습니다. 오래동안 헤여졌던 육친을 만난것 같았습니다. 알고보니 우리 조선의용대 무장대원들은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에 있었던겁니다. 우리 형편을 알아보려고 박효삼부지대장이 하진동을 보내온것이지요. 이리하여 리철중은 김선생과 녀성들을 데리고 무장대원들을 찾아가고 나와 하진동은 남아 군사행동을 할수 없는 윤석정을 돌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하루속히 윤석정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백성들에게 물어가면서 팔로군 의료대를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시골마을에 머물러있던 의료대는 적들이 쳐들어오는바람에 철거하고 없었던겁니다. 
하는수없이 우리는 윤석정을 업고 그를 안치할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험한 산속에 계단밭이 있고 그뒤에 낡은 움집이 있더군요. 우리는 움집을 말끔히 치워 윤석정을 안치한 다음 적들 눈에 띄지 않게 푸른 잎이 달린 나무가지로 움집을 위장해놓았습니다. 우리는 마을에 내려가 물을 얻어다 좁쌀죽을 쑤어 윤석정에게 먹였습니다. 모든것이 뜻대로 되여 마음이 한결 거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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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움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고나니 이 산에서도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총소리를 들은 윤석정은 나와 하진동을 불러 앉히고 말했습니다.‘난 동지들의 심정을 알고있소. 하지만 우리 셋이 여기 함께 있다간 다 죽을수 있소. 혁명에 몸을 바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겠소만 승리의 그날을 위해 우리는 자신을 보호할줄 알아야 하오. 지금부터 우리 셋은 떨어져있어야 하오.’
늦은 봄이라 윤석정의 상처가 썩기 시작했습니다. 윤석정은 이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그의 곁을 떠날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윤석정이 대뜸 눈살을 찌프렸습니다. 불꽃이 이는 그의 눈이 우리에게 어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윤석정의 성미를 잘 알고있는 우리는 그의 말을 어길수 없었답니다. 나와 하진동은 윤석정에게 죽을 대접하고 묵묵히 움집을 나와 산우에 있는 숲속에 숨어 움집을 지켜보았습니다. 
바로 이때 맞은편 산에서 치렬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하진동은 기관총소리를 듣자마자 우리 의용대가 적들과 싸우고있다는것을 알아맞췄습니다. 총소리는 우리가 숨어있는 숲으로 점점 다가왔습니다. 나와 하진동은 숨을 죽이고 우리 무장대의 승리를 바랐으며 적들이 윤석정과 우리가 숨어있는 곳으로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얼마후 총소리가 멎었습니다. 우리 무장대가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나간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움집을 더 잘 살피기 위해 하진동이 움집 웃쪽에 있는 숲속에 숨고 나는 움집 아래로 내려가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한낮이 되니 적들이 산우로 기여올라와 헛총질을 해댔습니다. 나와 하진동은 진종일 숲과 바위틈에 숨어 움집을 지켜보다가 밤이 되여서야 어둠을 타고 움집에 가서 윤석정을 보살폈습니다. 이날도 무사히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튿날 끝내 일이 터지고말았습니다. 이날 적들은 내가 숨어있는 골짜기를 타고 산에 오르더니 헛총질을 해댔습니다. 해빛이 이글이글 내리쬐여 참기 어려웠지만 나는 적들에게 발각될가봐 진종일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움집만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깃들 때까지도 나는 적들이 움집에 접근하는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깃들자 나와 하진동은 움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움집앞까지 달려간 우리는 그만 선 자리에 굳어지고말았습니다. 위장하기 위해 세워놓은 나무가지들이 이리저리 넘어지고 시꺼먼 움집에는 인적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며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윤석정동지!’ 하고 목이 터져라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나와 하진동은 움집으로 뛰여들어갔습니다. 어두컴컴한 움집안에는 윤석정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싸늘해진 움집의 공기를 우리의 가슴에 얼음장이라도 던져주는듯싶었습니다. 나와 하진동은 움집에서 뛰쳐나와 계단밭을 살펴보았습니다. 적들의 습격을 받지 않은 한 부상을 입은 그가 멀리까지 갈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윤석정은 계단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몇년이나 묵었는지 모를 계단밭에 피를 흠뻑 흘리고 쓰러져있었습니다. 움집에서 계단밭으로 내리뒹군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채 세상을 뜨고말았답니다. 그의 나이 마흔한살이였습니다. 파란 풀잎에 윤석정의 붉은 피가 맺혀있었고 시꺼먼 땅우에도 그의 피가 질벅했습니다. 나와 하진동은 윤석정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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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정은 일찍 젊은 나이에 민족해방운동에 나선분이랍니다. 길림에도 반일투쟁의 발자취를 남기고 일본총독부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운반하다가 체포되여 5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출옥후 그는 남경에 와 계속 반일투쟁을 지도하며 혁명간부학교 교관으로 군정간부양성을 위해 유물론과 사회발전사를 강의했습니다. 그는 1938년 10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건한 사람중 한분이랍니다. 그는 조선의용대 제1지대와 제3지대를 인솔하여 중경에서 태항산근거지로 들어온 지도일군이였습니다. 그는 정치일군이였지만 예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나는 그처럼 나를 사랑한 스승이며 생사를 같이한 전우를 잃었습니다. 
       나와 하진동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내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열손가락에서 피가 나는것도 모르고 돌덩이같이 굳은 땅을 파고 윤석정을 묻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피와 눈물이 배인 흙과 돌로 윤석정을 덮어주었습니다. 윤석정동지는 공산당원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공산당원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반파쑈전쟁에 모든것을 바칠 각오로 헌신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윤석정의 무덤앞에‘공산당원이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비석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작년에 한국 밀양에서 윤석정동지 탄생 100돌 기념 행사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장이 왔습니다. 김학철도 전화로 동행할것을 요청했지요. 나는 얼마나 가고싶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세월이 원쑤라 문밖출입을 할수 없게 된 로구를 한탄할수밖에 없었답니다. 나는 문명철보다는 거의 세배, 윤석정보다는 두배 더 살았습니다. 그리고 높은 벼슬도 했고요.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요즘에는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나 자신을 반성해보곤 한답니다. 혹시 먼저 간 동지들을 부끄러움 없이 만날수 있을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곤 한답니다.”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모든 사람의 육체는 썩어 땅을 비옥하게 하지만 모든 사람의 정신이 후세들의 삶의 밑거름이 되는것이 아니다. 보리가 죽은 씨앗에서 움을 틔우듯이, 락엽이 거름이 되여 새싹을 키우듯이 향기가 그윽한 아름다운 꽃으로 피고 영양이 넘치는 맛좋은 열매를 맺고 땅에 떨어져서는 록색거름이 되는것과 같은 고귀한 인간은 드물다. 죽어서 다시 부활한 예수처럼 죽어서도 죽지 않고 진리를 위해 력사하는 그런 값진 존재로서 윤석정, 문명철 등 동지들의 죽음은 최채와 동지들의 삶으로 이어졌다. 
 
       문정일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적들의“소탕”이 끝난 뒤 팽덕회동지는 대회에서 조선의용대의 영용한 전투로 우리가 많은 희생을 줄일수 있었다고 표창하고 의용대에 체스꼬제 기관총 한정을 선사하였다. 그 기관총박죽에는“공동의 리상을 위하여 영원히 한길에서”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적들이 물러가고 의용대가 다 모인후에 진광화 등 세 동지가 희생된 지점을 내가 잘 알고있었기에 조직에서는 나를 보내여 시신을 찾아 감장하게 했다. 나는 의용대의 오랜 동지 한분과 함께 나귀를 몰고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찾아가 두 사람의 시신을 찾아내였다. 변구정부와 팔로군 부대와 의용대 책임자들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좌권동지와 의용대의 세 동지를 추모하는 대회를 연후 시신을 감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조선의용대의 장진광이 비석을 설계하고 비문을 새겼다.
1942년 9월 20일부 연안《해방일보》에 실린 소삼(蘇三)과 엽검영(葉儉英)의 문장은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 정신과 업적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소삼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중조 두 민족은 몇세대를 내려오면서 사이좋게 지내온 이웃사촌이다. …이러한 민족우애심이 특히 두터운데는 하나의 주되는 정치적원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 두 민족 앞에 불구대천의 원쑤 일본제국주의가 있기때문이다. 이 토대가 있음으로 하여 중조 두 민족은 환난을 같이 겪는 벗과 형제가 되였다.
 
       엽검영은 다음과 같이 썼다.
       호북의 통산과 곤산, 호남의 석산, 광서의 곤륜관, 화북의 여러 전투와 반소탕전에서 이 군대의 동지들은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며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정신으로 싸우고 사업함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노예처럼 억압받는 일본군과 괴뢰군의 병사, 농민, 조선 거류민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팔로군, 신사군의 행동을 힘있게 지지했다.
1942년 9월 21일부 연안《해방일보》는“중조 인민 영원히 어깨겯고 싸우리라”는 제목아래 팔로군총부, 중공중앙 북방국, 팔로군 129사 사령부,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와 각 군정, 민중단체가 련합으로 5월 반소탕전에서 희생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주석이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정치위원인 진광화 그리고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지도자중 한분인 윤석정 등“재중조선렬사추도회 측기”를 실었다. 
만가가 울리자 온 장내는 더없이 슬픈 추모 분위기에 잠겼다. 맞은편 벽에는 진광화, 윤석정 등 렬사 11명의 유상이 걸려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생전과 다름없었다. 일본제국주의는 그들의 육체를 빼앗아갔어도 그들의 정신만은 빼앗아가지 못했다. 그들의 정신은 영구불멸한것이 아닌가.
한일래, 최철호, 윤석정, 호유백, 림평, 엽홍덕… 그들은 중국 장강 이남과 이북의 싸움터와 여러 대도시에  불멸의 발자국을 남겼다.
장중과동지가 렬사들의 략력을 소개했다. 주덕(朱德, 당시 팔로군 총사령) 총사령께서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주석대에 올랐다.
“…렬사들을 추모하는 오늘 우리는 혁명의 경험과 교훈을 잘 총화해야 합니다. …동무들은 리홍광(李紅光)동지를 아십니까? 그는 조선사람입니다. 동북의용군에 참가한 사람은 그 동무뿐이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희생된 전사들의 생명은 영존할것이고 그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될것이며 그들이 못 다한 위업은 더욱 많은 전사들이 완성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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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갔다. 슬픔은 저마다의 가슴에 서리서리 엉켰다. 화북싸움터의 포연탄우속에서 왜놈들과 총을 맞대고 싸우기도 하고 정찰도 하고 무장선전을 벌리기도 하던 영용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여, 그대들의 11명 전우는 일본파쑈를 쳐 물리치는 중국의 싸움터에서 희생되였다.(《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제747페지-749페지)
오늘도 하북성 한단시에 있는 진기로예렬사릉원(晉冀魯豫烈士陵園)에 가면 진광화와 윤석정 동지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이 릉원은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총부, 전방사령부와 정치부, 진기로예군구 그리고 129사의 희생자들을 위해 1946년부터 1950년 10월까지 만들어온 렬사묘지이다. 항일전쟁시기에 진기로예변구에서만 10만 7,000여명의 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릉원에서 최고급 장령으로는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이다. 그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고 홍군시기 조선인 혁명가 양림(楊林)의 후임으로 홍군 제1군단 참모장을 맡았던 사람이며 1942년“5월 대소탕”때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팔로군총부 전투부대를 지휘하여 전투하던중 희생되였다. 그 소탕에서 희생된 진광화와 윤석정 동지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1941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화북전장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전사들로는 손일봉, 리정순, 최철호, 박철동, 윤석정, 진광화, 호유백, 김학무(金學武), 문명철, 한락산(韓樂山), 최지남(崔指南), 리용인(李鏞寅), 김영신(金永信), 오균(吳均), 림평(林平), 림진(林震), 김명화(金明華), 리성호(李成鎬), 오민성(吳民聲) 등 20여명이다. (11)
 
(다음기 계속)
제공: 민족출판사
작가:류연산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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