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깡대”여 잘 있거라


날짜 2017-06-16 14:17:0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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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어 같은 제목을 달고보니 지난 세기20년대말에 헤밍웨이가 쓴 장편소설 “무기 여 잘 있거라”가 엉뚱하게 떠오른다. 헤밍웨 이를 일약 유명 작가의 반렬에 올린 이 작품 이 제1차세계대전중의 이딸리아를 배경으로 미국 군의관 헨리와 영국인 간호사 캐서린의 운명적인 사랑을 주선으로 전쟁의 잔혹상을 성토하고 세상을 파괴하는 “무기”들을 떠나 보내면서 사랑과 생명, 희망을 그려내고있다 면 필자의 “‘빗깡대’여 잘 있거라”는 헤밍웨 이 소설 내용과는 꼬물만한 련관이 없는 지 극히 토속적이고 립자적이라 할수 있는 일상 들로 지절거리게 된다. 다행히 민속적이라는 옷을 입힐수 있고 거기에 기대에 쓴다는 점에서 겨우 안도감을 느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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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우리의 모든 부모들은 왜 자기 의 자식들을 그렇게 무지하게 팼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못내 신기하기까지 하다. 현시대 에 그 지경으로 자식들을 팬다면 당장에서 아동학대라는 구설수에 오르고 매스컴 뉴스 코너를 장식할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모 두가 너그럽게 리해하고 자식들이 말 안들으 면 부모에게 매를 맞아야 한다는 갑(甲)질 의 식이 주류를 이루었으니 오히려 관습으로 보 면 리해하기 편하다. 슬하에 10남매, 8남매, 적어도 5남매를 두었던 부모세대(父辈)들에게는 생존적인 의식주에 매달려 매일과 같이 힘든 로동에 매달렸던 시절이라 자식이 귀엽 다고 엉뎅이를 뚝떡거릴 여유조차 없었을것 이다. 필자와 같은 농촌출신들은 어려서부터 제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말을 가슴으로 익 혔다. 봄이면 터밭이라도 갈아야 했고 여름 이면 돼지풀 뜯기, 겨울에는 나무하기, 석탄 줏기… 녀자애들 경우면 동생을 업고 돌봐야 했고 여름에는 풍로불 피우기, 저녁밥짓기를 전담하는 등 온갖 가정일을 다 도맡아야 했 다. 그중 어느 일과를 변변하게 완성못하면 얻어맞아야 했다. 자식들을 족치는 부모들 이 첫번째 “무기”가 살림제식도구인 구들비 였다. 그것도 비를 꺼꾸로 거머쥐고 마구 팼 는데 살이 많은 엉뎅이를 맞으면 괜찮았지만 뒤잔등이나 골통을 얻어 맞으면 괴로울 정도로 아팠다. 미련한 소 궁둥이를 때려도 그 정도로 패지 않았을 정도로 사정없었다. 그 시 절 회초리도 등장했지만 서당훈장들이 으름 장을 놓으려고 사용했던것만치 가벼운 존재 로 유치원생들에게나 해당되는 “무기”였다. 그 당시 우리들은 비자루를 “빗짤기” 혹은 “비깡대”라는 비속어로 통칭했다. 부모들의 폭압은 보통 식사때에 행해졌는데 “이새끼 가…”이런 왁살스러운 욕과 동시에 부모들이 비자루를 거머쥐면 당장에서 줄행랑을 놓아 야 무서운 매를 면했는데 어느 집이나 형제 들중에는 꼭 눈치가 빨라 먼저 튀는 형제와 눈치가 무뎌서 그대로 매를 맞는 형제가 있 었다. 필자의 집에서는 버지가 “비깡대”를 거꾸로 쥐는 모양을 보이면 할머니가 “빨리 달아나라!”고 웨쳤고 그때마다 필자의 형 제들은 맨발바람으로 후다닥 튀군 했다. 그런후면 할머니가  밥을 굶고 집주변을 맴도는 손자들을 찾아서 가만히 밥을 먹이군 했 다. 그때의 모든 형제들은 부모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면 동생이거나 형들이 꼭 가만 히 챙겨주는 우애를 보이군 했다. 시성 윤동 주는 “비자루”란 동요에서 아래와 같이 쓰 고있다.…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비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덩이를 때렸소…괘씸하여 벽장 속에 감췄드니 이튿날 아침 비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윤동주도 어려서 어머니한테서 비자루에 얻어 맞은 모양이다. 지금도 포털사이트 에 비자루 폭행이란 낱말들이 뜨는걸 보면 아직도 비자루로 때리는 일들이 혹간 생기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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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들의 “무기”였던 이 “빗깡대”는 보 통 봄에 “밥쑵짱, 밥쒸뀌” 라고 불렀던 장목수 수씨를 “장재태(바자굽)”밑에 심어 만들었다. 장목수수씨는 껍질이 두껍고 곡물로서의 가치는 적지만 줄기가 길어 시골 농가에서는 비 를 매기 위해 따로 심군 했다. 그 시기 시골의 집집마다 설사치료제로 양귀비(아편)도 몇포 기씩 심었고 지금 환각제라고 하는 삼(대마) 도 마음대로 심군 했다. 이 삼은 모통 집주위 에 심었는데 마디가 지면서 곧게 자라지 못하지만 노끈으로 시용하려고 심었다. 하늘이 높게 들리고 서풍이 후르르 떨어지는 가을이면 봄에 심은 장목수수에 열매가 달리고 가지가 단단하게 굳어지는데 그것을 단으로 묶어서 바자에 걸어놓으면 어느덧 가을바람에 바싹 마른다. 마른 장목수수씨를 털어내고 단단한 대 속갱이를 훑어내고 구들비를 만들었는데 보통 노끈으로 자루를 마디를 지어서 조여 묶 고 비살을 부채살처럼 퍼져 물리적인 모양을 지어 사용의 최적화를 도모했다.
      우리 민족은 월강하면서 남부녀대하고 곡식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는데 여기 에 장목수수씨가 들어있은것이다. 지난 세 기 시골에서 심은 장목수수는 조선에서 건너 올 때 씨를 가지고 온것이다. 이런 비를 시골 에서는 흔히 “숫끼비” 혹은 수수비라고 일컬 었는데 문화어로 장목수수비라고 한다. 연변 의 시골에서 제일 많이 사용한 비였다. 이런 수수비는 오래 사용하느라면 자루가 시들거 렸는데 그 해결책으로 자루머리에 단단한 나 무를 쐐기처럼 박아 간혹 골을 얻어 맞으면 딱- 소리가 나면서 얼얼했다. 비자루도 “조 선비짤기”와 “한족비짤기”로 나누었는데 한 족들의 비자루는 보통 자루가 긴데 비해 우 리들의 비자루는 구들을 많이 사용했기에 짧 았다. 그외에도 참대거나 좁은 널판에 털을 부착해서 만든것도 있다. 비자루지만 형태가 완전히 다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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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 옛말은 “뷔”이며 지역에 따라 “비깡대, 비짜락, 비짜루, 비짤기”로 칭하기도 했다. 비는 만드는 모양도 여러가지이고 재료 또한 다양해서 용도 따라 구들비, 방비로 구 분했다. 구들비를 오래 쓰면 몽당비로 되는 데 이런 비를 흔히 부엌비로 사용하군 했다.
      그외에도 싸리비와 자작비는 옥외용으 로서 보통 마당비거나 생산대시절 탈곡장에 서 사용했는데 수관이 좋은 나무들이 선택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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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보잘것 없는 제식도구지만 사회문 화적의의가 있는 생활도구로서 시골생활에 서 베개와 함께 깔고 앉으면 절대 안되는 물 건이였다. 베개가 존귀한 머리를 받쳐주는 생활용품이라서 터부가 된다면 비는 웅성으 로 상징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기에  특 히 녀자들이 깔고 앉으면 절대적으로 질색하 는 도구였다. 할머니는 생전에 누나거나 녀 동생이 간혹 비를 깔고 앉으면 “젠데(전도)” 없다고 야단치군 했다. 왜 그랬을가.
      지금 생각해보니 민담에서 기인된것이 였다. 비를 깔고 앉아 오래동안 일하는 녀인 의 생리가 비에 묻어나서 “도깨비”로 경계했 다는 민담이 있다. 우리 민족뿐만아니라 서 방에서도 녀인의 방종한 생활을 의미하는 대 명사로 “비자루를 굽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걸로 미루어 보면 녀인들에게는 비자루가 터 부가 된 물건임이 틀림없다.
      이렇듯 비자루는 녀인들이 사용빈도가 가장 많은 제식도구이면서도 함부로 다루면 안되는 물건이였다.
 

작가:최국철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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