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의“꽝보나발”


날짜 2017-06-16 16:43:3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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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잊혀져가는 방언과 비문화어 명칭을 겨냥하고 글을 쓰자니 어쩔수 없 이 어페가 생기고 그래서 독자들을 배려하여 해석을 앞세운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꽝 버, (广播)꽝보나발(广播喇叭)”은 우리 말 로 확성기고 현대 류행어로 스피커다. “꽝버,(广播)”는 의역하면 “방송하다”,“널리 전파 되다”라는 뜻으로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연변의 대부분 시골에 서는 확성기를 “꽝보나발(广播喇叭)”,“꽝버,(广播)”라고 두루뭉실하게 통칭했다. 연변에서만 있을수 있는 신생사투리다. 엄격하게따지면 나발과 나팔은 같은 명칭으로 확성기가 아니라 소리가 확대되여나가는 금관악기 를 통틀어 일렀으니 군대에서 사용했던 나팔, 양걸무에 사용되는 새납도 나팔,나발에 속한 다. 나발, 나팔은 입으로 불수 있지만 필자가 말하는 확성기는 불수 없다. “꽝보나발(广播 喇叭)”은 직역하면 “방송나발,방송나팔”이 된다. 한어용어에서 직역에 관습된 우리 언어 에서 “꽝보나발(广播喇叭)”은 조악하게 들 려도 틀렸다고 단언할수 없지만 방송나발이 라고 하지 않고 굳이 “꽝보나발(广播喇叭)” 이라고 칭했으니 이런 글도 쓰게 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꽝보나발(广播喇叭)” 중국 연변식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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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농촌에서의 확성기의 출현은 대약 진시기라고 보면 비슷하고 그 사용 전선기가 문화대혁명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 시절 연변의 농촌마을들에서는 대개 대대혁명위원 회(현재의 촌사무실) 붉은기와를 얹은 룡마루 거나 콜타르칠을 올린 전보대, 아지가 무성한 비술나무우에 달았다. 우리들은  이 확성기 를 통하여 “동방홍”, “멀리 나는 기러기”, “고 향산기슭” 같은 노래를 익혔고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의 사망소식을 접했으니 시골에 서 유일한 정보통신 기기라고 볼수 있다. 대대 (촌)와 사원들(촌민)들간의 소통도 대체적으 로 확성기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니 확성기의 출현은 일대혁명이 아닐수 없었다. 민간에서 지금도 타인에 대한 원색적 폄하에 사용하는 “그만 나발 불어라, 개나발, 황통을 분다” 같은 부정적인 관용사들은 그 시절에 생겨난것들이다. 지난 세기 50년대에 출범한 “확성기 시대”는 90년대 이르러 전화혁명이 시작되면 서  자취를 감추었으니 근 40여년 동안 그 존 재를 과시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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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여년간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중 하나로 알려진 확성기는 현재까지 핸드폰,텔레 비죤기기, 뮤직시스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 품으로 소리전달의 일익을 감당해왔다. 단순 한 소리로부터 우수한 음질로 변화하기까지 확성기의 변화는 어디까지일지도 미지수다.
      중국에서는 서양에서 확성기가 들어온 후 처음에는 “양성기扬声器”라고 했다. 우리 가 통상적으로 나팔,혹은 나발(喇叭) 이라고 번역한것과 질적에서부터 다른것이다. 기실 나발(나팔)과 확성기는 명칭과 용도가 엄연 히 다르다. 현재 우리들은 한어명칭을 음차해서 점잖게 “음향설비 (音响)” 혹은 스피커라고도 한다.
      그때 그 시절 확성기는 보통 마을의 중심 에 달았는데 지난 세기 70년대말부터는 향진 정부에 “꽝버짬(广播站)”이 생겼다. 지금 보 면 방송관리사업소가 될듯하다.현(시), 향진2 급으로 방송원이 있은셈이다. 그러면서 집집 마다 소형 스피커를 안장해주어서 집안에 곱 게 앉아서 방송을 들을수 있었다. 자그마한 나무틀안에 소형확성기를 달았는데 시골사 람들이 가장 즐겨 듣는 방송이 “천기예보”라 고 불렀던 날씨였다. 농민들은 날씨에 특별하 게 민감하다. 당시 필자의 고향은 훈춘현 행 정관할구역에 속했는데 필자의 마을에서는 “천기예보”를 “어방예보”이라고 희화화(戏画 画)했다. 지금도 방언으로 사용하는 “어방”이 란 어림에서 파생한 방언인데 대강짐작, 가까 운 부근을 이르는 말로서 어림짐작을 우리들 은 “어방대중”이라고 한다. 현시대의 날씨는 위성까지 동원해서 정확도가 높지만 그 당시의 날씨는 정확도가 한참 뒤떨어져있었다. 너무 가물어서 큰비가 내릴것을 여망하는 농민 들에게 큰비가 온다고 잔뜩 격앙되게 만들고 정작 야비한 작은비에 그쳤다면 “어방예보”란 조크를 받을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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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흐르면서 반도체기술이 발달하자 어느덧 유성방송도 시들해졌다. 확성기는 단 순한 회의 통지에 사용되거나 우스운 매매정 보에 사용되는 빈도가 잦아졌다. 일반사람들 도 임의로 사용할 권리가 생긴것이다. 필자는 “공화국의 후예들”이란 장편소설에서 그 당시 의 환경을 묘사했는데 한번 옮겨보려 한다.
      “…바람이 휙 불어와 공터의 어지러운 종 이쪼각과 먼지를 휩쓸어갔다. 촌사무실 지붕 우에 매단 스피커에서 문뜩 찌륵찌륵 잡음이 나는가싶더니 웅- 웅- 증폭전류가 흐르는 듯한 소리를 동반하여 ‘에- 한가지 통지르 하 겠씁꾸마. 대대(촌사무실)마당에서 쇠고기를팝꾸마. 한근에 3원입꾸마. 어서 와서 사갑소.눅거립꾸마. 죽은 쇠고긴가 하지 맙소. 다리뼈대가 부러져서 어쩔수 없어서 잡은 암쇠니까 쇠괴기가 와늘 생생하구 만만할께꾸마. 빨리 와서 사갑소. 돈이 없어두 왜상(외상)으로 다 주꾸마. 한마을 사람덜끼리 무스거 따지갰씀 두.’ 하고 련주포를 쏘아대는 아낙네의 챙챙한 목소리가 확성기에서 울리는가싶더니 뒤미 처 ‘아차, 큰일 났따꾸마. 공사(진정부)의 서진 장네 아부지 동우아바이(소설 주인공임)가 오 늘 아침에 쇠뿔에 띠왔다(상했다)구 합꾸마. ’ 라는 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아낙네는 다리가 부러져서 잡은 소고기를 처리하기에 급급해 서 공짜로 주듯 외상으로 준다는 광고를 하다 가 차라리 잘됐다는 식으로 동우령감이 소뿔 에 상했다는 엉뚱한 시골뉴스를 소고기 판매 광고와 한줄에 꿰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소뿔에 상한 동우령감을 보러 오자면 소고기 매대를 차린 촌사무실 앞을 지나야 한다. 예 술이란 옷을 입혀서 나오는 전문 TV광고가울고 갈 지경이다. 현재의 TV상품광고가 현란한 거품으로 포장되였고 란폭한 갑(甲)질 행 세를 하며 방송도중 시청자들의 감수도 아랑 곳하지 않고 문뜩문뜩 저속한 광고까지 서슴 지 않고 끼워서 내보낸다면 아낙네의 광고는 거짓 하나 없는 진실한 광고였다. 마을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없이 적요했다. 개 몇마리만 이 한가롭게 오가고있을뿐이였다. ‘젠장 다시 답새기우. 어째 마을사램들이 다 뒈졌는가? 대갈짝뚜 내밀지 않구만.’ 소고기를 실은 수레 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던 중년사내가 왁 살스레 두덜거리다가 광고를 끝내고 나온 아 낙네를 다시 재촉했다. ‘거 악새(목소리)가 올 채 소리만두 못합데 아래배에 기운을  팍 살 궈서 괘아부재기(큰소리)를 치멘서 쾅쾅 울려 놓소.’ 하고 불쌍한 안해를 윽박질렀다.…”
이것이 “확성기시대” 연변의 농촌마을 풍경이였고 민초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들이였다.

작가:최국철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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