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다야신’


날짜 2020-04-15 15:49:16 조회


김병걸 작사, 리충재 작곡하고 금잔디가 부른 트로트〈검정고무신〉은 가사에서 진한 향수를 불러와 ‘추억족’들에게 각광받았던 노래이다.

어머님 따-라 고무신 사러 가면
멍멍개가 해를 쫓던 날
길가에 민들레 머리 풀어 흔들면
내 마음도 따라 나간다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검정 고무신 우리 어머니
보리쌀 한-말 이고 장에 가면
사오려나 검정고무신
밤이면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고이 포개서 잠이 들었네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검정고무신 우리 어머니

우리 세대거나 웃세대들이 익히 알고 있던 검정고무신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초 조선반도에서 고무공업이 시작되면서 생성되였다고 봐야 객관적이다.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이는 순종황제였다. 지금 보면 고무신은 보잘 것 없는 신이였지만 누구에게나 애틋한 추억은 다 있다. 왜 다른 신도 아닌 고무신에 추억이 많을가? 거친 짚신 대신 처음으로 신어본 공업제품이 바로 고무신이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나온 ‘다야신’은 대개 검정색갈이였고 그것도 오른발, 왼발의 형태를 무시해서 그냥 그대로 꿰서 신으면 되는 ‘간편한’ 고무신이였고 남녀 구분 없이 신을 수 있는 신이였다. 오래동안 신으면 신바닥이 한겹씩 들려서 그것을 떼여내느라면 오리오리 떨어져나오기도 해서 자연히 신을수록 신바닥이 엷어져갔다.
그 시기 우리 조선족들은 검정고무신을 ‘다야신’ 혹은 ‘검정다이야신’이라고 칭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신종(种)이 많아지면서 모양도 산뜻하게 변하고 실용성을 가해서 년령층과 남녀사이에 차별점을 두면서 1970년대는 ‘막고무신’이라고 다시 개명했다. 고무신이 하얀색갈이 많았던 탓이다. ‘코신’이라 불렀던 흰 고무신은 녀성전용으로 앞코가 뾰족하게 들려서 민속적으로 고찰할 수도 있다. 연변에서 류행된 ‘코신부대’라는 관용구는 녀성들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야릇하게 생긴 이 코신에 어원을 둔 것이다. 이에 반해 남자전용 흰 고무신(넙적 고무신이라고도 불렀다.)은 초시기에는 로인전용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한동안 류행세를 타기도 했는데 필자도 이 흰 고무신을 신어본 생활력사가 있다. 이 시기에 민간에서 “막고무신에 철 박고 신을 넘”이란 악의 없는 우스개가 류행되였는데 대체로 녀성들에게 장난이 심한 젊은이들이거나 구두쇠 남자들을 ‘희화화’하는 데 동원됐다. 값비싼 가죽구두 밑창에 철을 박는 건 정상이라도 눅거리 흰 고무신에는 절대로 철을 박을 수 없다.

그럼 이 고무신들은 어디에서 생산되였을가?
조선반도에서의 검정고무신이 생성시기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초라면 조선족들의 ‘고무신(다야신)’은 해방 후라야 맞는다. 연변고무공장은 제지, 도자기와 함께 3대 민족공업중 하나였다. 물론 이 시기 두만강좌안에서 살던 조선족들이 밀수로 조선에서 생산된 고무신을 신기도 했지만 이건 이 글에서 다룰 수 없는 부분이다.
주덕해 주장이 공업을 욕심내면서 직접 손을 댄 시기는 심양이 해방된 후 심양소재 ‘삼창고무신공장’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1930년 전후 심양에는 조선인 라경석이 건설한 ‘삼창고무신공장’이 있었다. 해방전쟁시기 많은 공장들이 공장문을 닫으면서 파산될 무렵 ‘삼창고무신공장’도 생산을 중지했다. 1948년 11월 2일, 심양이 해방될 때 ‘삼창고무신공장’은 동북행정위원회에서 접수, 관리했다. 당시 민족사무처장으로 할빈에서 담가대까지 조직하여 심양해방전쟁을 지원했던 주덕해는 동북경내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민족(조선족)의 고무신문제를 해결하고저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명의로 심양시 북시구 3경로에 자리 잡고 있던 ‘삼창고무공장’을 민족기업으로 민족사무처 관할로 할 것을 청시했고 인차 비준을 받았다.
주덕해는 조선의용군 출신인 김명을 이 공장의 제1공장장으로 임명하였다. 원래의 ‘삼창고무신공장’은 명색이 공장이지 기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건물이란 허물어져가는 몇칸의 낡은 집이고 네각이 물러날 지경으로 된 기계 몇대가 있었을 뿐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인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무공장을 건설한다는 소식이 심양시안에 퍼지자 시내의 조선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서로 소식을 알리며 기뻐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사용하던 감속기, 계산기, 물뽐프 등 기계설비와 기술서적들을 무대가로 공장에 헌납하였다.

1949년 4월, 주덕해는 연변에 진출하면서 조선의용군 3지대 출신들인 윤룡, 한택주 등 11명 간부들을 다시 공장에 파견하였다. 윤룡이 제2대 공장장으로, 한택주가 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간부들과 로동자들이 일심협력하여 빠른 시간내에 1,000여평방메터의 공장건물을 건설하고 기계를 장치하였다. 당시 고무신 한짝을 생산하자 해도 설계로부터 100여개 분절의 기술절차를 거쳐야 했다. 실로 간고한 조업이였다. 자기 손으로 만든 첫 조선고문신을 받아안은 날 이들은 너무 기뻐 서로 얼싸안고 자축했다. 보잘 것 없는 공장에서 훌륭한 고무신이 나오자 이들은 동북의 농민을 위하는 공장이란 뜻이 담긴 ‘동농고무공장’이라고 간판을 새로 걸었다. 그리고 고무신에 ‘동농’표란 상표를 붙이고 1949년 8월 15일부터 정식으로 고무신생산에 들어섰다.
심양에서 ‘동농고무신공장’의 조업소식을 보고받은 주덕해는 인차 신덕관을 불러 윤룡 대신 동농고무신공장 공장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는 연변 전원공서(현재의 주정부)관할에 있는 ‘동농고무신공장’을 그냥 심양에 둘 수 없다고 1950년 11월초에 ‘동농고무신공장’을 길림성 연길현 로투구진(현재의 룡정시 로투구진)으로 옮겨왔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주)가 설립되였다. 이에 따라 ‘동농고무공장’은 로투구진에서 도문시내로 다시 천이하여 새롭게 건설한 ‘도문고무공장’과 합병하여 ‘연변고무공장’으로 개칭되였다.
싫증날 때까지 신어도 해여질 줄 모르고 건재했던 검정다이야신, 남자들의 선호를 받았던 ‘넙적 흰 고무신(막고무신)’, 신코에 하얀줄이 사선으로 두개 건너갔던 어린이 전용 파란고무신은 이렇게 세상에 태여났다.
우리들에게는 고무신에 얽힌 사연도 많다.  
작가:최국철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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