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깨구데’와 함정


날짜 2020-07-14 10:20:38 조회

   
                                     1                                     
‘쑤깨구데’, 위챗에서 친구의 여름날의 ‘쑤깨’ 사연을 읽으면서 비로소 상기해낸 방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사용했던 ‘쑤깨’를 검색해보면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수렁을 이르는 함경도 방언”이라고 해석되여있고 한국의 어학사전은 “‘진펄’을 이르는 함경북도 방언”이라고 정의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쑤깨구데’라고 명사화했는데 함경도가 아닌 함경북도라고 명토를 박고 다시 중국 길림성에서 사용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길림성은 연변을 지칭하는 것이다. 수렁이든 진펄이든 개념상 비슷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쑤깨구데’란 사투리가 함경북도에만 국한된 특정방언이라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지역 한계성이 있어 동북에 사는 조선족들도 약간은 해괴한 방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개연성이 있다. ‘구데’는 구덩의 방언이라 문화어로 재해석하면 ‘수렁구덩’이쯤 되겠다.
그 시절의 마을길은 지금처럼 포장도로가 아닌 흙길이였다. 하기에 여름에 비가 한줄금만 내려도 온통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변했다. 그 진창길도 며칠 동안 사원들(촌민)이 여기저기 골라서 밟고 조심스럽게 다니노라면 어느덧 겨울철 동지(冬至) 전 산에 내린 눈 우에 일매진 토끼길 나듯 진창길 한옆에 신발을 적시지 않고 다닐 만한 오솔길 같은 길 한줄이 생긴다.
기회가 온 것이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 길에 한자 깊이가 될 만한 ‘쑤깨구데’를 파고 그 우에 지뢰를 매설해 위장하듯 멀쩡하게 만들어놓는데 이런 위장을 우리들은 “너스레를 편다.”고 말했다. 그런데 ‘쑤깨구데’를 팔 때 노린 군체가 크림을 바르고 분내를 풍기며 희희락락거리며 몰려다니는 마을처녀들과 음전한 하향 녀지식청년들이였다는 점이 자못 흥미롭다. 그 ‘쑤깨구데’를 만들어놓고 창호지를 바른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그 구덩에 “어굼마-” 비명소리를 내면서 처녀가 빠지고 신발과 바지가랑이가 온통 진흙투성인 채로 우거지상이 되면 “오호라!” 한겨울 눈 속에 머리를 처박은 장꿩이라도 사냥한 듯 크게 흥분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의 진창길 ‘쑤깨구데’가 인위적이고 자그마한 장난이였다면 무섭고 큰 ‘쑤깨구데’는 흔히 문전이라고 불렀던 논밭에 있었다. 그것은 진펄이나 물기가 많은 땅에서 생장할 수 있는 벼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논밭을 만들 때 보통 천수답을 념두에 두고 물이 흥건한 저지대 진펄에 만들었으니 옹근 논밭이 ‘쑤깨구데’가 된 것이다. 어떤 논바닥은 써레질하던 소가 빠지면 헤여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
 
                                       2                                      
비가 내린 여름날의 ‘쑤깨구데’ 사연은 약간은 구질구질하고 비위생적인 장난이지만 겨울철 눈 내린 날의 ‘쑤깨구데’ 사연은 덜 위생적이라서 더 성행했고 우리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쑤깨구데’가 진펄이란 개념에서 볼 때 겨울날의 ‘쑤깨구데’는 어페이기에 이제부터 함정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겠다. 지금은 눈이 내려도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농촌을 떠난 필자에게 발언권이 없지만 그 시절 한겨울만 되면 눈이 억척으로 내렸는지… 지금 기상부문에서 3센치메터 아래면 작은 눈(小雪), 5센치메터면 중급눈(中雪), 10센치면 큰눈(大雪), 30센치면 폭설(暴雪), 그 이상이면 특대 폭설(特大暴雪)로 정의하는데 이런 수치로 계산해보면 그 시절의 눈은 특대 폭설 같다.
필자의 집은 ‘토창밖 동네(토담 밖 동네)’에 있었다. 광복 전 1930년대초 일제가 집단부락화를 하고 안전촌을 건설한다는 미명으로 산골에 산재해서 화전농사를 하던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내려 집단부락을 만들고 마을주위에 토담을 쌓았는데 이 토담 바깥에 있는 마을을 마을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토창 밖동네(토담 바깥 동네)’라고 이름했다. 필자의 집에서 서편으로 뒤집 마당을 건너가면 ‘서틀논’이라고 불렀던 휘연한 논밭이 펼쳐져있었다. 이 논밭에 눈이 두텁게 쌓일 무렵 서산 해질머리가 파랗게 열리면 거기서부터 불시에 세찬 바람이 터진다. 눈보라는 하늘과 땅 공간을 메울 것 같은 맹위를 부리면서 실그러져가는 초가집을 박살내듯 달려들면서 집집의 뜨락에 커다란 눈산을 만들어낸다. “왱-왱” 아우성을 터치면서 달려든 세찬 바람은 넓은 논밭에 내린 눈을 몽땅 실어다 ‘토담 바깥 마을’에 쌓아놓은 것이다.
1969년, 동네 앞쪽 우사 곁에 상해지식청년들의 하향을 대비해서 지은 ‘집체호’라는 긴 중국식 맞배집이 있었다. 세월의 때에 젖어서 검스레 퇴색했던 토담이 무너져 우리 동네로 마을이 확장되면서 건조실도 섰고 집체호도 섰다. 그 시기 어느덧 “싸니?(누구세요?)”, “싸해즈써칭니(상해지식청년)”…알아듣기 힘들었던 호어(沪语)방언을 구사하던 상해지식청년들 태반이 귀성길에 올라 돌아가고 그 대신 우리 말을 하던 지방 도시의 청년들 차지가 되여있었다. 집체호에는 녀지식청년들로 조직된 식사당번들이 있었고 식사당번들은 농가에 와서 식용수를 멜대로 길어 날랐는데 그러자면 꼭 그 눈산을 지나야 했다. 필자의 마을과 주변 동네는 도자기공장을 가까이에 둔 덕으로 집집마다 부엌 곁에 굴뚝전용 도자기로 집안에 우물을 만들어서 집집의 생활용수를 해결했다. 그 우물물을 길으러 하향 녀지식청년들이 뻔질나게 다닌 것이다.
으이? …가만히 두고 볼 우리들이 아니다. 다니는 길목에 깊은 함정을 판다. 함정우에 눈을 떠서 살짝 덮어 위장해놓으면 어김없이 멜대를 멘 채로 구덩이에 빠지군 했다. 우리들은 와하하 웃어대며 짝짝 손벽까지 쳐댔다. 우리보다 힘이 쎈 처녀들이라도 남동생 같은 우리 조무래기들을 이길 수 없어 남성청년들에게 일러바쳐서 우리들을 혼뜨겁 내주려고 했지만 정작 우리 곁에 다가온 남성지식청년들은 실실 웃으며 자기네 녀성 식사당번을 배반하고 우리와 한통속이 되여서 여차여차 하라고 우리들에게 다른 수를 대주군 했다. 번번이 우리가 파놓은 눈구덩이에 봉변을 당하자 녀성 식사당번들은 최고의 경계심을 발동하여 여우같이 살살 피해서 번번이 실패했다. 아무리 흔적없이 한다 해도 인위적인 흔적들은 숨길 수 없었다. 그 뒤에 나온 것이 ‘갱도’전이였다. 쌓여있는 눈 속으로 ‘갱도’처럼 파고 들어가서 길목쯤에서 천정을 아주 얇게 만드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주 멀쩡하고 아무런 흔적도 없어서 성공률이 100프로였다. 일단 빠지면 깊은 눈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이 사기가 충천하여 너도나도 ‘갱도’ 파기에 열중했고 낮에 만들면 발각된다고 밤에 손전등을 켜고 역사를 벌여야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냥 물을 쏟치고 몸뚱이가 빠지고 하는 ‘불상사’가 나서 이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우리 조무래기 집들을 맞춤형으로 각각 찾아다니면서 부모들에게 말려달라 고해바쳐서야 그런 장난을 그만두고 시무룩하던 그 시기가 아마 50여년 전이였으리라… 지금 그 하향 녀지식청년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작가: 편집: 사진:

핫 클릭

  1. 1 ‘우티’와 ‘닙성’과 ‘으세으세’‘우티’와 ‘닙성’과 ‘으세으세’
  2. 2 “참새가 방아간을 지나칠소냐?”“참새가 방아간을 지나칠소냐?”
  3. 3 논밭 제초기(除草器) 이야기논밭 제초기(除草器) 이야기
  4. 4 ‘여보’와‘숭니’‘여보’와‘숭니’
  5. 5 “빗깡대”여 잘 있거라“빗깡대”여 잘 있거라
  6. 6 ‘공소합작사’‘공소합작사’
  7. 7 그때 그 시절의“꽝보나발”그때 그 시절의“꽝보나발”
  8. 8 세월을 깎던 리발관세월을 깎던 리발관
  9. 9 ‘콩질굼’과 ‘콩지름’‘콩질굼’과 ‘콩지름’
  10. 10 ‘연변렁맨’의 전설‘연변렁맨’의 전설

칼럼

主管:中共延边州委组织部 主办: 中共延边州委组织部 出版: 中共延边州委支部生活杂志社
地址:吉林省延吉市天池路4258号 邮编:133000 电话: 0433-2513269 E-mail: ybzbsh@163.com
吉ICP备:17002320号 技术支持:ppbb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