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과 ‘멍군’


날짜 2020-09-11 15:05:21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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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시절 <중국조선족민속기행>을 쓸 무렵 필자는 장기가 우리 민속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흔해 빠진 보편적 놀이라는 생각으로 쓰기를 접기도 했다. 기실 장기놀이를 따져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은 데도…
2차대전시기 나치들의 만행을 <장기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집중영에 갇혀서 자유를 잃은 유태인이 감방에서 장시기 동안 체스(유럽식 장기)를 두고 연구한 끝에 천재적 장기군이 된다. 감옥에서 나온 뒤 장기놀이에서 비인간적 감정 폭발을 일으키는 형상을 빌어서 2차대전 참상을 고발한 그 소설을《아리랑》잡지에서 보았던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하지만 그 슈제트 발전과 사건전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건 장기놀이를 통해서 전쟁의 참혹상과 나치들의 패덕을 고발한 작가의 재능이 인상 깊어서다. 사람들은 흔히 돈내기 놀이에서 사람의 품성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장기놀이도 례외가 될 수 없다. 김학철 작가는 주덕해 장기일화를 생동하게 그렸는데 장기를 두면서 상대방의 병사를 잡을 때면 “식사!”라고 웨쳤다던 주덕해 장기수가 어떠했는지 심히 궁금하다.
장기를 떠올리면 “장훈이요! 멍훈이요!”가 떠오르지만 기실 장기를 두는 장기군들이 입에서 “장훈이요! 멍훈이요!” 웨치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장훈’과 ‘멍훈’은 문화어의 장군과 멍군을 이르는 평안북도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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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훈수는 따귀를 맞으면서도 든다.”는 속담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속담을 상기하느라면 시인 김소월의 장기일화도 생각난다. 현재 소구역 광장 한켠이나 그늘 속에는 꼭 여러 패로 갈린 장기군들이 있고 그 주위에 훈수군들로 모여있다. 모두가 낯이 익숙하지 않아 그런지 곁에서 훈수를 해도 점잖게 하고 장기를 두는 장기군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삼가한다. 하지만 옛날 시골에서 장기훈수를 두는 경우 모두가 익숙한 사이라 한수 잘못 두어도 “개대가리 장기수를 쓰는 걸 보면…”, “한수면 통장인데 둔하기는 쇠대갈이군… 그즛쌀에 장기짝을 만지겠다구?” 같은 비속어가 불쑥불쑥 튕겨나와서 장기군과 훈수군이 맞대거리하고 심하면 “이새끼, 저새끼” 같은 욕설이 오간다. 장기놀이는 당자는 어리둥절하고 객관이 명석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민속놀이다. 장기놀이는 대항성(췔抗性)이 강한 놀이라 정복욕이 강한 남자들의 전용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기 두기 전에 수를 물리는 일이 없다고 철석같이 약속하지만 일단 궁지에 몰리면 “한수만 물리기오.”하고 애걸한다. 물리는 일이 너무 빈번하면 구경군들도 짜증이 나서 “장기쪽을 논밭에 던져버리오.”, “논밭은 무슨 당최 변소칸에 던져서 다시 놀지 못하게 해야지.” 하고 훈수한다. 남성들은 대부분 장기를 둘 줄 알고 멱을 알아서 꼭 장기판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법 모르고 한동안이라도 구경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다. 훈수군들은 대개 궁지에 몰린 약자에게 훈수를 둔다. 여러 사람이 훈수를 두는 경우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장기수가 혼잡하게 흩어지고 그러면 열이 훈수해도 꼭 지게 되여있다. 필자의 고향에 우수한 장기군이 있었는데 광복 전에 산골 안에서 살면서 부자간이 매일 장기놀이를 했다고 우수한 장기군으로 소문나기도 했다. 촌의 놀이문화란 선줄군을 따르게 돼있다. 필자의 마을에서 장기놀이가 성행했고 저마다 고단자쯤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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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놀이 유래에 대해 현재 두갈래 설이 상존해있는데 그중 한갈래가 고대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였다는 설이고 초시기에는 둘이 아닌 네 사람이 하는 놀이였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유럽으로 들어가 스페인과 토이기를 거쳐 점차 널리 퍼져서 서양장기인 ‘체스(유럽식 장기)’가 되였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그 연원이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고 10세기 중엽에 후주(后周)의 부제가 만들었다는 설이다. 하지만 서한 시기 한신(韩信)을 창시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류방이 서한 왕조를 통일한 후, 무공을 쌓은 대장 한신은 루명을 쓰고 투옥되였다. 어느 날 한신은 옥바라지하는 옥졸에게 저가락을 가져오게 해서 땅에 네모난 테두리를 만들고 테 안에 강에는 ‘초하(楚河)’, ‘한계(汉界)’라는 네글자를 썼다. 이어 옥졸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하여 32개의 작은 조각(장기짝)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놀고 있는 장기의 시원이다.
그날부터 한신은 매일 이 옥졸과 함께 네모난 틀(장기판)을 지키며 병법을 연구했다. 얼마 후 한신은 죽음을 당했고 그 옥졸은 깊은 산속에 도망가서 초막을 짓고 황무지를 일구며 온 가족이 ‘자경자식(自耕自食)’하며 짬이 날 때마다 한신이 그에게 준 기(奇)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종이는 썩기 쉬우니 동글동글한 나무토막으로 종이를 대신하고 상대편을 구분하기 위해서 색을 올렸고 후에 아들에게 장기비법을 물려주기도 했다. 한신(韩信)은 이렇게 명실상부한 중국 장기의 발명자가 됐다. 그의 기술은 후대에 전해져 오늘에 이른다.
《사해(辞海)》의 해설을 보면 중국 장기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의 교체시기에 완전히 틀이 잡혀 광범위하게 류행되였다고 한다.
조선족식 장기놀이는 여러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조선장기라는 놀이 버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장기로 이름 되여 전국적으로 보급되였으며 시골 로인들의 소일거리로 크게 류행하였다. 리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내기 장기를 두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우리들의 장기놀이라 하면 지난 세기 바자밑굽에서 뚝떡거리며 장기를 두었다고 하는데 기실 그 시기 장기놀이를 할 만한 공지거나 활동장소가 없어 해빛을 피해서 바자밑굽에서 놀았다는 말이 된다. 대항성 놀이가 그러하듯 재미있게 두다가도 어느 순간 인간 괴성이 터져나오고 장기판이 뒤집어지는 건 보통일이였다.
같은 장기라도 한족식 장기와 조선식 장기 놀이는 멱이 다르다. 한족 장기에서 상(象, 相)은 한신이 썼다는 ‘초하(楚河)’, ‘한계(汉界)’를 건너지 못하고 궁을 떠나지 못한다. 위사(士)도 마찬가지다. 궁이 다니는 멱은 밭 ‘전(田)’자이고 위사는 전자 밭에 사선으로 그은 길만 다니게 돼있고 병(兵), 졸(卒)은 강을 건너기 전에 옆으로도 이동할 수 없고 강을 건너서만이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 한계를 건너면 물을 건넜다(过河)고 한다. 포(炮) 역시 차(车)처럼 직선으로 날아다닐 수 있고 같은 포라도 다리를 놓고 상대방의 포를 잡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식 장기는 꼭 다리가 있어야 건너다닐 수 있고 상대방의 포를 잡을 수 없다. 상도 상대방 진영을 휘젓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고 궁을 호위하는 위사도 밭전(田) 안에서 자유자재다. 한족식 장기놀이든 조선족 장기놀이든 멱이 다를 뿐 대항성 놀이라는 점에서 같은 놀음이고 무궁무진한 수가 들어있어서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따귀 맞아가면서 훈수한다.”는 말이 있듯이 장기는 두는 사람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까지 즐겁게 한다.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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