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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속에 핀 진달래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날짜 2021-04-12 15:28:27 조회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안순화 렬사
 
1908년, 안순화는 조선 함경남도 단천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그는 일찍 15살 때 부모를 떠나 시집을 갔다. 하지만 시댁 역시 가난했다. 온 가족이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했건만 배불리 먹지 못하는 생활은 여전히 이어졌다. 설상가상 단천군에 흉년이 들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하여 안순화는 가족들과 함께 훈춘현 포대촌(炮台村)으로 와 악덕 대지주 한희삼의 소작인으로 일하게 되였다. 남편 리봉수는 한희삼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었고 안순화는 한희삼네 머슴으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연자방아를 밀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일가족은 입에 겨우 풀칠할 형편이였다.
1930년 10월, 훈춘현당위가 설립되고 포대촌당지부가 설립되면서부터 포대촌의 가난했던 농민들은 당조직의 령도하에 제국주의의 침략과 봉건지주의 착취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려나갔다. 안순화는 남편 리봉수와 함께 반제동맹에 가입하고 혁명조직의 교양하에 혁명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였다. 그는 점심마다 농공들에게 밥을 가져다주는 기회를 리용하여 군중사업을 전개하였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일하고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 지주들은 일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삽니다. 왜 중국과 멀리 떨어져있는 일본마저도 우리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괴롭힐가요? 바로 우리가 각성하지 못하고 단결, 투쟁하는 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931년, 안순화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린근 여러 촌마을들을 돌면서 안순화는 계발과 교육을 통해 부녀회, 아동단을 세우고 항일활동을 조직했다. 그 후 당조직에서는 그녀에게 도시구역의 녀성사업을 맡겼고 안순화는 더욱 적극적으로 무산대중의 해방을 위한 사업에 참가하였다.
1932년 겨울, 현위는 안순화를 훈춘현당위와 연구(烟릚)구위 소재지인 연통립자(烟筒砬子)에서 항일근거지 창건 사업을 맡겼다. 그는 녀성들을 발동, 조직해 유격대의 후근사업을 이어나갔다. 1933년 3월부터 진행된 적들의 ‘3광정책’은 근거지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련속된 ‘토벌’로 인해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한 정황에서 안순화는 7명의 녀성들을 이끌고 4대의 재봉틀에 의지한 채 유격대를 위한 군복 제작에 돌입했다.
1934년 3월, 안순화와 그녀가 령도하는 녀성재봉원들은 정식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단에 편입되여 재봉대를 설립하였고 안순화가 대장직을 맡았다. 그해 4월, 재봉대는 왕청현 금창으로 이전했다. 안순화는 재봉대를 이끌고 적들의 빈번한 ‘토벌’ 속에서도 생산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오면 재봉틀, 옷감 등을 산속에 감추거나 지하에 묻었고 일본침략자들이 돌아가면 곧바로 다시 생산을 재개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의 수림 혹은 수렁이 그녀들의 생산장소로 되였다. ‘토벌’을 피하기 위하여 기계나 옷감 등을 등에 지고 행군하고 하루에 한끼도 못 먹고 버티는 경우도 빈번했지만 안순화는 자신의 실제행동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재봉단동지들을 이끌어 사업을 견지하였다.
1935년, 요영구(腰营沟)회의 후 사업의 수요로 인해 안순화는 부대 병원으로 전근되여 밥을 짓고 환자를 보살피는 임무를 맡았다. 1935년 5월, 병원은 녕안현 마장 이도구 밀영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안순화의 곁에는 두살 남짓한 작은 딸이 있었다. 1935년 가을, 부대는 이도구를 떠나게 되면서 병원사업을 도울 전사 두명과 함께 겨우 두포대의 밀가루를 남겼다. 안순화는 식량을 좀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 매일 산나물을 캐고 산열매 등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채집해 식량을 절약했다. 두달 남짓 버티고 나니 식량이 전부 떨어졌다. 식량을 구하러 나간 두명의 전사는 다섯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안순화는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굶주림으로 무력해진 몸을 이끌고 초막을 나와 나물과 풀뿌리를 캤다. 며칠 후 안순화는 힘에 겨워 쓰러졌고 그 이튿날 고난의 나날 속에서 힘이 되여주었던 그의 작은 딸도 결국 굶주림을 못이기고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다. 이틀 뒤, 량식 구하러 떠났던 전사가 량식을 메고 돌아왔고 동지들은 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난관을 헤여나올 수 있었다.
1937년 3월, 안순화는 사업의 수요로 다시 재봉대에 돌아왔고 그가 령도하는 재봉대는 밀영에 주재하여 식량을 구하고 탄약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휘부의 지도자가 밀영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던중 갑자기 일본놈들이 나타났다. 후근일군들은 식량과 탄약, 재봉틀을 숨기기 위해 산 우에 올라갔다. 한바탕 총격전 후 일본놈들은 격퇴하고 대부대도 이동했지만 교활한 일본놈들은 이곳에 항일련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튿날 또다시 몰래 포위망을 넓혔다. 마침 보초를 서고 있던 안순화의 눈에 일본놈들이 밀영으로 포위해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즉시 상황을 보고하고 10여명의 부상자와 재봉대 대원의 엄호임무를 맡았다. 일본놈들은 통나무집으로 쳐들어와 사방을 훑으며 수색했다. 안순화를 발견한 일본놈들은 그녀에게 미친 듯이 사격했다. 안순화는 적들이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동지들이 더욱 멀리 피할 수 있도록 발걸음을 늦추었다. 일본놈들은 흉악한 승냥이마냥 달려들었고 안순화를 체포해 통나무집 앞으로 끌고 가서 고문하기 시작했다. 안순화는 굴복하지 않고 완강한 목소리로 일본놈들을 향해 웨쳤다.
“항일련군 전사들은 절대 침략자들에게 투항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 일본놈들은 절대 우리 동지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잔인무도한 일본놈들은 안순화의 머리카락을 한움큼 잡아당긴 채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하나 잘라냈다. 말 못할 육체적인 고통을 견뎌가며 안순화는 일본놈들의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놀라운 의지력으로 끝까지 완강하게 적들과 맞서 투쟁했다.
“너의 동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탄약, 식량과 재봉틀은 모두 어디에 숨겼나? 빨리 말하라!”
일본놈들은 으르렁거리면서 안순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에도 안순화는 자신의 생명안위보다 동지들이 멀리 갔는지, 재봉틀, 군복, 식량, 총기, 탄약들이 적에게 발각되지는 않았는지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놈들은 이 강철같은 녀전사를 정복할 수 없고 안순화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흉악하고 잔인한 일본놈들은 안순화의 온몸 곳곳에 나무 꼬챙이를 박았다. 비렬하고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던 일본침략자들의 고문과 함께 안순화도 그만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다음기 계속〉
제공: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신염연 편역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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