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의 사진에 깃든 사연


날짜 2022-04-01 14:36:02 조회


매년 3월이 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7년 전, 필자가《중국조선족백년실록》편찬사업의 일환으로 료녕지역 취재차 우연히 찾아뵙게 된 83세의 김창걸 로인이다. 김창걸을 떠올리면서 또 자연스럽게 련상되는 이름이 바로 뢰봉이다. 한것은 이 두 사람의 짧은 인연이 한장의 사진으로 남아 장장 60여년간 960만평방킬로메터의 신주대지에 영향을 미쳤고 소중한 ‘흔적’으로 남게 되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김창걸은 1932년 2월 3일에 길림성 연길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1948년 3월에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던중 1950년에 3월에 무순으로 와 교원사업에 참가하게 되였다. 무순에 도착해 행인들을 보고 무순시조선중학교를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학교가 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요행 조선족복장을 입은 로인을 만나 물어보니 조선족소학교에 찾아가면 무슨 단서라도 알아낼 게 아니냐고 해서 부랴부랴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불원천리하고 찾아간 그 중학교가 아직은 설립준비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렇게 준비위원회에 가입해 초창기 창립인원으로 사업하다 보니 무순시조선족중학교 70년 력사의 생생한 증인이 된 것이였다.
당시만 해도 무순시의 조선족 인구는 4만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학생모집 임무를 맡은 김창걸은 무순시내를 참빗질하며 뛰여다녔다고 한다. 중학교가 없어서 통화, 심양, 해룡, 산성진, 신빈 등지로 흩어져갔던 조선족 학생들이 당지에 중학교가 서게 되자 다시 하나둘 돌아왔고 순조롭게 개학식을 맞이하게 되였다고 했다.
학기초에는 변변한 책걸상도 없어서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모아나선 지원금으로 나무를 사다 톱질하여 높낮이가 다른 장의자를 만들어놓고 높은 것은 책상으로, 낮은 것은 걸상으로 대용하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부의 지원으로 지금의 무순 북역 근처에 학교를 새로 짓고 정규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간판도 없는 학교준비위원회에 찾아가 학생모집사업을 맡아하면서 시작한 김창걸의 교직인생은 장장 42년 세월을 주름잡았다. 그는 일반교원으로부터 교무주임, 부교장, 교장에 이어 당지부 서기를 겸한 학교의 책임자로 자리매김했다.
1961년 5월 25일, 김창걸에게 그날만은 한평생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에 남았다. 그날은 무순조선족중학교에서 뢰봉 동지를 초청하여 보고회를 가지게 되였는데 린근에 있는 무순사범학교, 무순시제15중학교, 무순시제6중학교의 사생들까지 보고회에 가세하다 보니 5000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학교 캠퍼스가 지금과는 달리 ‘ㄷ’자형이였는데 학교건물 한가운데 파이어 튜브 보이라가 설치되여있어 거기에 확성기를 가설해서 림시무대를 만들고 강연을 경청했다.
보고회는 주로 뢰봉 본인의 눈물겨운 쓰라린 동년과 당과 모주석의 은덕으로 참군하여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나라를 위해 살아오게 된 감동적인 이야기가 위주로 이어졌다. 장장 2시간 지속된 보고회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만큼 뢰봉은 키가 작아도 언변이 아주 좋았고 하는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가 조리정연했으며 감동적이였다고 김창걸은 회억했다. 
당시 자동차련에 소속되여 핸들을 잡고 있던 뢰봉은 21살이란 어린 나이였지만 그해 무순시 제4기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는 영광도 지녔었고 이듬해에는 특약대표 신분으로 심양군구에서 개최한 첫 공산주의청년단대표대회에 참석하였고 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대표발언까지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뢰봉은 그때 이미 원근에 소문이 나 있었고 기층에 자주 초청되여 보고회를 가지군 했다.
뢰봉의 보고를 열심히 경청하면서 김창걸도 자신의 어려웠던 동년을 떠올리게 되였다고 한다. 뢰봉의 가슴 쓰린 지난날이 어쩌면 자신의 지난 동년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동시에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뢰봉은 ‘모주석의 훌륭한 전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간 김창걸은 지난해 졸업생들이 모주석의 석고상을 학교에 졸업선물로 기증했던 생각이 뇌리에 떠오르면서 당지부실에 놓여있는 그 석고상을 가져다 배경으로 해서 사진 한장 찍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곧바로 석고상을 옮겨다 놓게 하고 뢰봉과 나란히 그 력사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샤타를 눌렀다. 모주석의 석고상 옆에서 찍은 뢰봉사진은 이렇게 생겨나게 되였다. 
보고회가 있었던 이듬해 8월 15일, 뢰봉 동지가 공무 집행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희생하게 되면서 김창걸이 찍은 뢰봉사진이 전국의 여러 매체에 사용되였다. 
특히 1963년 3월 5일, 모택동 주석께서 ‘뢰봉 동지를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발표하면서 ‘뢰봉 따라배우기’ 활동붐이 일었고 무순시조선족중학교에서 보고를 하던 뢰봉의 사진은 전국의 신문, 간행물과 서적에도 널리 사용되였다. 그러다 《중국청년》잡지 1964년 5월호 표지에 기존의 흑백사진을 칼라로 처리하여 발표하면서 그 후에 더욱 광범위하게 활용되였다.
김창걸은 퇴직 후 서화에 상당한 애호를 갖고 활동하면서 국가1급서화가로 여열을 불태우며 만년을 즐겼다. 필자가 김창걸 선생을 만나뵈였던 그 이듬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짧은 인연으로 기록된 오래된 사진 한장은 후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고 그 기억은 ‘뢰봉정신’을 이야기하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신념의 힘, 넓은 흉금, 대공무사함과 전진의 예기를 노래해주고 있다.
작가:김창석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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