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빛나는 영광의 기록

― 중국조선족 스피드스케이팅 명장 라치환 선생
날짜 2022-05-19 15:40:05 조회


사진: 신화사

지난 2월 4일, 제24회 동계올림픽대회(이하 북경동계올림픽으로 략칭) 개막식이 국가체육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개막식 현장에서는 부동한 시기 동계종목의 걸출한 중국선수 대표 6명이 올림픽회기를 들고 입장했는데 그중 세계동계스포츠계의 이름난 명장이였던 라치환(罗致焕, 81세) 선생도 포함돼있어 중국조선족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앞선 2월 2일, 북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활동 때에도 첫번째 주자로 나서며 59년 전의 영광을 세인들에게 상기시켰던 라치환 선생! 
한때 신문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수차 선생을 취재한 적이 있던 필자는 고령이지만 온건한 발걸음으로 올림픽회기를 인도해나가는 선생의 름름한 자태에 가슴 치는 격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1941년, 흑룡강성 해륜시 조가툰에서 부친 라원섭, 모친 박원도의 자식 5남매중 둘째로 태여난 라치환 선생은 1956년, 수화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속도스케이팅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계몽스승인 장봉룡(연변대학 체육학부 졸업) 선생의 체계적인 지도 아래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8년, 교내는 물론 시급, 성급 그리고 전국대회에까지 출전하여 1등의 월계관을 싹쓸이했다.
그 이듬해 치치할시체육학원에서 그를 교내 스케이팅팀의 기둥선수로 ‘모셔’갔고 그것도 잠간, 흑룡강성스케이팅팀에서 재차 그를 기둥선수로 ‘앗아’갔다. 그 무렵 국가전문팀이 없는 상황에서 선생에게는 수시로 나라를 대표해 국제경기에 참가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1960년부터 1962년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제54회, 제55회, 제56회 세계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 련속 참가하면서 경험을 루적했고 중국인, 나아가서 동양인들한테는 ‘마의 장벽’으로 여겨졌던 1500메터 스피드스케이트종목 우승의 월계관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전문경기용 빙판이 없다 보니 야외의 자연빙판을 찾아서 훈련했는데 얼음구멍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다시 기여올라와 옷을 갈아입고 뼈속까지 얼어드는 추위 속에서도 훈련을 견지해나갔다.
드디여 대망의 그날이 다가왔다. 1963년 2월 24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고산경기장에서 20일부터 5일간 열린 제56회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마지막 날이였다. 대회의 하이라이트인 남자 1500메터 스피드스케이팅 결승전이 막을 올렸다.
동양인들한테 있어서 넘을 수 없는 ‘마의 장벽’으로 아득했던 1500메터 결승! 숨 막히는 침묵과 긴장으로 떨리는 뭇시선들이 하나같이 결승선을 찍어보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중국을 대표해 출전한 라치환 선생이 ‘2분 9초 02’의 성적으로 세계 신기록을 써내며 우승의 축포를 쏘아올린 것이다. 
그처럼 커다란 영광에 사전 준비는커녕 우승트로피를 받아본 적이 없던 선생은 심지어 시상대에서 손을 흔드는 법도 몰라 그냥 시상대에 올라가 두 손을 한번 흔드는 것으로 임무를 완성했다고 한다.
라치환 선생이 그번 대회에 성공적으로 참가해 우승을 거두기까지 그리고 우승을 따낸 뒤에도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들어있다.
그 무렵 일본으로 가려면 향항을 거쳐야만 했는데 일본대사관에서 일본행 비행기 리륙 2시간 전까지만 해도 중국대표팀에 탑승수속을 밟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관계부문을 거쳐 겨우 수속을 밟고 일본에 도착했는데 또 대회 주최측에서 중국팀에 훈련장소를 제공해주지 않았고 숙박환경도 더없이 렬악했다.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물론 안전에 대한 보장마저 없었다. 그만큼 외국인들은 중국의 빙상운동을 무시하고 있었다.
시합이 끝난 뒤에도 그랬다. 선생이 우승을 따내자 대회조직측은 한동안 술렁거렸는데 사람을 격분하게 했던 것은 기타 유럽 선수들과 달리 그에게 사진액자를 부상으로 내린 것이였다. 이에 중국대표단을 비롯한 각 나라 대표단에서 질의를 제기했고 결국 이튿날 대회 조직측에서는 당시로는 최고급격인 후지다사진기를 그에게 다시 부상으로 내렸다. 
한편 선생이 우승을 따내자 일본의 화교들이 분분히 중국대표팀을 찾아와 꽃묶음이랑 사과상자를 안기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새 중국, 새 중국인들의 새로운 기상을 세계에 알린 그번 선생의 장거는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높은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을 겸하고 있던 국무원 부총리 하룡 원수는 나라를 위해 영예를 떨치고 귀국한 대표단을 위해 친히 만찬을 베풀었고 선생을 자신의 곁에 불러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욱 많은 영예를 떨쳐내달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1980년, 라치환 선생은 흑룡강성스케이팅팀 코치로 부임됐고 같은 해, 중국스케이팅협회 부주석으로 당선됐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35주년을 맞아 가장 걸출한 운동선수로 선정됐으며 1988년에는 ‘새 중국 체육개척자’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1994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45주년을 맞아 중국체육계 45명중의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던 1997년, 라치환 선생은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드러누웠고 위태로운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동료들과 전국 각지 체육계인사들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아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 건강을 되찾은 선생은 1998년, 35년 만에 다시 일본 나가노현을 방문해 그곳에서 열린 제18회 동계올림픽 성화주자로 참가했고 10년 뒤인 2008년에는 북경올림픽 할빈 경내 성화주자로, 2009년에는 할빈에서 펼쳐진 제24회 세계대학생동계운동회 개막식 성화 봉송 첫 주자로 나섰다.
국가체육위원회로부터 ‘운동건장’ 영예칭호와 더불어 두차례에 걸쳐 국가체육운동영예상장을 획득한 선생은 2002년 퇴직하기 전까지 다년간 흑룡강성 녀자대표팀과 중국녀자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하며 양춘원, 왕수옥 등 우수한 선수들을 양성해냈다. 그가 양성한 제자들은 전국대회에서 무려 124차의 우승의 월계관을 따냈으며 그중 64명의 선수가 ‘운동건장’ 칭호를 수여받았다. 
북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 첫 주자로 임무를 완성한 뒤 “왜 성화에 입을 맞췄느냐?”는 중앙텔레비죤 현장 리포터의 유쾌한 질문에 “이런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우리 나라에서도 동계올림픽을 주최했으면 하는, 50여년 동안 내가 줄곧 꿈꾸어왔던 꿈이 바로 이날 실현되였기 때문이다!”면서 흥분된 어조로 심금을 토로했던 라치환 선생, 선생은 북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성공적으로 올림픽회기 기수임무를 마치자 또 이렇게 감동에 젖어 심금을 토로했다.

제56회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남자 1500메터 결승에서 우승을 따내고.

“1963년,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내가 우승을 따낸 성적이 2분 좌우였는데 이날 회기를 전달한 시간도 2분 좌우였다. 내가 여든살이 넘다 보니 마지막 몇걸음은 조금 힘들었지만 지정된 곳까지 회기를 잘 전달하려는 마음으로 끝까지 버텼다!”
지난 2009년 9월, 취재차로 할빈 자택을 찾은 필자한테 “중국인들의 반세기 동안의 꿈이 현실로 변했고 동계빙상종목도 세계 스포츠 강국과 점점 격차를 좁히고 있다.”며 그 누구보다 더 감격해하던 라치환 선생, 선생이 하얀 빙판에 찬란하게 그어온 그 영광의 기록들은 오늘도 찬란히 빛을 내고 있다.
작가:신철국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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