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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변천


날짜 2022-08-01 14:20:50 조회


자치주 창립 70돐을 맞으면서 내 나이가 자치주와 동갑이여서인지 지나온 파란만장했던 70년 세월을 뒤돌아보게 되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고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무잎이 피고 지기를 70년,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위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을 인솔하여 거칠었던 연변땅을 옥토로 개변시키고 산과 물을 다스려 이 고장을 지상락원으로 건설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고저 얼마나 많은 심혈을 쏟아부었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의 숨결이 스며있는 오늘날의 고향은 부자마을로 탈바꿈하였지만 꽃피는 화창한 봄이 오면 버들개지 오동통 피여난 해란강반에서 아줌마들의 빨래방치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듯 하고 밭갈이 쟁기와 종자 실은 수레 끄는 황소의 우렁찬 영각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여 오늘도 새삼 애잔한 추억 속에 잠겨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때 그 시절 나의 고향 화룡시 룡성진 청산촌은 심심산골이였는데 교통까지 꽉 막혀 지지리도 가난했던 고장이였다. 70여호 되는 농가집은 하나같이 마른 쑥대가 아니면 조짚으로 된 지붕이였다. 집 옆에는 나무로 만든 방아도 있었다. 마을 복판에 자리잡은 드레박우물 주위에는 집집마다 언 감자 가루 우려내는 움 깊은 토기그릇들이 줄줄이 놓여져있었지만 마을의 개구쟁이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인지 돌을 던지거나 모래를 쥐여 뿌리는 현상은 거의 없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국수를 누르는 분틀도 있었다. 말갛게 우려낸 언 감자가루를 주머니에 넣고 짠 다음 펄펄 끓는 물에 반죽하여 분틀에 넣고 누르면 새까만 국수가 줄줄 흘러내리는데 바로 찬물에 헹구어준다. 미리 준비해놓은 삶은 콩을 매돌에 갈아 그 콩물에 국수를 말아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처음 몇끼는 게눈감추듯 먹어치웠지만 자주 먹으니 질려서 그 새까만 국수를 보기만 해도 먹기 싫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어제 일인 듯 생생히 떠오른다.
고향마을에는 지금도 당년의 학교 운동장이 그대로 보존되여있는데 해마다 9.3명절이 돌아오면 대대에서는 운동회를 조직하군 하였다. 지금도 넓은 학교 운동장 확성기에서 상공에 메아리치던 9.3명절 경축의 노래 한 대목이 생생히 떠오른다.
“에루화 어절시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주 세웠네…” 그날만은 마을 남녀로소 누구나 조선족복장을 곱게 차려입고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며 환락으로 들끓었다. 그 시절 대대운동회에 이어 공사운동회에서 줄곧 우승을 쟁취한 선수는 현운동회에 출전하였는데 현운동회 씨름경기에서 1등을 따내면 황소를 상으로 탈 수 있었고 그네뛰기 1등은 발마선을 상으로 탈 수 있었다.
가난했지만 격정이 넘치는 시대였다.
어느 해 ‘9.3’명절 때 엄마는 현에서 열리는 운동회에 구경가는 나와 언니에게 돈 1원을 쥐여주면서 시내 식당에서 한사발에 35전씩 하는 랭면을 사먹으라고 당부하셨다. 오전에 운동구경을 하고 점심때가 되여 식당으로 가자는 언니 손을 사정없이 뿌리치고 웬 영문이냐고 묻는 언니를 뒤로 한 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는 식으로 집으로 가는 길로 줄달음쳤는데 현에서 집까지 18리 길이였다. 그때 내 나이 12살, 언니는 15살이였다.
배고픔을 참고 겨우 집까지 와서 엄마한테서 들으니 시내 식당국수는 쫄깃한 새하얀 밀가루국수이고 육수도 시원하고 맛도 좋다고 했다. “알아보지도 않고 뺑소니칠 건 뭐냐.”고 나무람하는 엄마의 말을 듣던 언니도 나 때문에 밀가루국수도 못 먹었다면서 ‘촌뜨기’라고 골려주었다.
12살이 되도록 밀가루국수를 구경조차 못했던 나는 시내 식당에서도 새까만 언 감자국수를 파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때 그 세월에는 집집마다 옥수수떡 아니면 언 감자국수, 언 감자떡, 잡곡빵이 위주였는데 그마저도 집집마다 보리고개를 넘기기 어려웠다. 식구들의 끼니를 이어대기 위해 발방아로 겉옥수수와 겉보리를 찧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초중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 지도부에서 고급중학교 추천 명액이 하나 있는데 나보고 다니라고 권유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두 언니가 시집을 가고 아래로 10살, 7살 어린 두 남동생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 공수를 벌 로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녀자애가 제 앞의 글이나 알면 되지… 오래지 않으면 시집 갈 나이가 되는데 무슨 고중공부냐…”고 하는 것이였다.
그때 농촌에서는 18살, 19살에 시집가는 녀자애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소원 대로 10명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인민공사에서 생산로동에 참가하게 되였다. 축력, 인력으로 농사 지었던 그 시절에는 소가 농민들의 명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 시절 주덕해 주장도 농촌에서 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연변소의 번식과 사양에 특별한 관심과 중시를 돌렸다고 한다. 그때 대대지도부에서도 각 소대에 우사를 짓고 소사양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생산대에서는 가을이면 사원들에게 민식을 곁곡으로 인당 360근씩 분배하였지만 소사료만은 충족하게 남기였다. 생산대장은 천성이 정직하고 부지런한 나의 아버지와 친구 순녀의 아버지 두 사람에게 생산대의 20여마리 소를 사양하는 임무를 맡겼다. 엎드리면 코 닿을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지만 두분은 이불짐을 가지고 우사 옆 숙직실에서 숙박하시면서 소사양에 살손을 댔다.
전기도 없는 캄캄한 우사에서 석유등을 들고 소에게 밤여물을 주었다. 작두로 조짚과 옥수수대, 벼짚을 썰어야 했고 큰 가마에 물을 끓여 따끈하게 사료를 버무려 주기도 했으며 매일 소똥을 쳐냈고 날마다 해볕쪼임을 시키는 등 자질구레한 일로 하루종일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다.
봄이 오면 작은 시골마을은 시끌벅적 들끓었다. 겨우내 알심 들여 사양한 살찐 소들의 영각소리에 마을이 들썽한데 사원들은 줄레줄레 모여서서 생산대장의 로동배치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집체로동에 참가하던 그해 봄, 나와 친구들은 생산대장의 배치 대로 사원들과 함께 조 파종에 나서게 되였다. 온 하루 사원들과 함께 씨를 뿌리고 묻어놓은 밭고랑을 다져놓아야 했는데 한뙈기 밭의 작업량은 어마어마했다. 조 파종이 끝나면 옥수수, 콩 파종이 시작되였다. 갈아놓은 푹신푹신한 밭고랑에 자기를 치고 종자를 떨군 다음 가대기로 묻어놓았는데 소 앞에서 미처 종자를 떨구지 못하면 소에게 떠밀리는 처녀애들도 종종 있었다. 처음 생산로동에 참가한 우리 처녀애들에겐 온 하루 소에게 쫓기면서 종자를 떨구기란 너무 고역이였다. 생산대의 20여헥타르의 밭에 파종이 끝나면 모내기가 시작되였다. 모내기 장화도 없었던 그 시절에 아침 일찍 맨발로 차디찬 논판에 들어서면 온몸에 닭살이 돋으면서 오싹해날 정도였다.
오전, 해살이 자글자글 논판에 퍼지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징그러운 찰거마리들이 기여나와 다리에 철썩 들어붙으면 우리 친구들은 아우성을 치며 논두렁에 올라서서 손바닥으로 찰거마리들을 쳐서 때려잡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80년대초, 나라에서는 집체를 단위로 한 생산경영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호를 단위로 한 도급제를 실시하였다. 집집마다 오곡이 넘쳐나고 수입도 늘어나 손잡이뜨락또르를 사는 집도 많아졌는데 소로 밭을 갈던 데로부터 뜨락또르로 밭을 갈고 기계로 종자를 떨구고 농약으로 풀을 잡으니 농민들은 힘겨운 체력로동에서 완전히 해방된 셈이였다. 기계화가 전문 보급된 현재의 농촌은 봄이면 넓디넓은 포전에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지만 어느 결에 파종이 끝나고 여름이면 풀 한포기 없는 전야에 오곡이 푸르싱싱 자란다.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곡식들이 미풍에 파도치는 풍성한 대지를 볼 때마다 과학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으니 해마다 풍년이요, 기름진 연변땅에서 생산해낸 유기농 입쌀은 질도 좋고 맛도 일품이여서 가을이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이름난 룡정만무과수원의 맛 좋은 사과배와 셀렌 함량이 풍부한 훈춘 맹령촌의 사과는 일년 사시절 연변 각 지역의 시장에도 충분히 공급되고 전국 각지에도 판매된다.
몰라보게 변화한 고향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기적을 울리면서 산굴을 기여나온 렬차가 높디높은 해란강 다리 우로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마을 앞 높은 산중턱의 넓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각종 차들이 실북 나들 듯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옛날 교통이 꽉 막혔던 시골마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담한 마을 웃쪽에는 두 산 어귀를 가로막은 저수지도 있는데 공기 좋고 경치까지 좋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로 되였다.
오늘날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8개 현, 시의 농촌 마을은 환경이 아름답고 여러가지 오락시설이 마련되여 농민들의 문화, 오락 활동이 유난히 다채로워졌다. 뿐만 아니라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연변의 울창한 삼림에는 보물도 많은데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면 두릅, 고사리 등 각종 나물들이 넘쳐나고 가을이면 당삼, 천삼뇨, 황계 등 여러가지 약재는 물론 송이버섯과 인삼은 전국에서도 첫손에 꼽힐 정도로 인기만점이라고 한다. 연변의 높고 푸른 하늘아래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관광지도 많은데 장백산으로부터 선경대, 로리커호, 만천성, 돈화의 륙정산, 도문의 백년부락과 화룡의 광동촌, 진달래촌…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마다 진달래가 피여나는 봄날에 화룡시 진달래촌에서 성대히 거행되는 진달래축제에서 눈부신 연변특색의 각가지 음식메뉴들이 즐비하게 진렬된 가운데 각 지방에서 온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한차례 특대홍수로 페허가 됐던 마을을 떠올리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살기 좋은 우리 연변은 자랑도 많다. 어느 잡지에서 본 기억에 의하면 연변의 아름다운 수부도시 연길시는 전국 종합실력 100강 현시에 선정됐고 나의 고향 화룡시도 세계장수의 고향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지녔다고 한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자연재해와 전염병 사태에도 주당위와 주정부는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의 생명안전을 념두에 두고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정확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비상시기에도 안전감을 느끼면서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 백년 분투목표를 달성하는 새로운 로정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인민들의 행복지수가 부단히 상승하고 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보다 아름다운 새 연변으로 거듭날 것이라 확신한다.
작가:원죽순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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