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는 저녁노을처럼 살리라


날짜 2022-08-11 13:45:28 조회


자치주 창립 70돐과 제20차 당대표대회를 맞이하는 뜻깊은 한해에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감회가 새롭다. 꿈 많던 새파란 청춘시절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머리에 흰서리 내린 고래희나이에 이르렀다. 20여년의 당생활을 하면서 항상 당원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안고 일터에서 분망하게 뛰여다니던 시절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희로애락으로 반죽된 인생길을 헤쳐오면서 가슴 뿌듯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소학교시절 소년선봉대에 가입했을 때, 19세에 공청단에 가입했을 때, 51세 나이에 진붉은 오성붉은기 앞에서 주먹을 추켜들고 공산주의 위업을 위해 이 한몸 불사르리라 장엄하게 선서했을 때였다.
단순하고 천진란만했던 동년시절 선생님이 들려준 뢰봉, 류호란, 동존서 등 영웅인물들의 사적에 매혹되여 나도 크면 영웅인물들을 본받아 좋은 사람이 되리라 맹세하기도 했다. 소학교시절 학업에 열중하여 학급에서 우수소선대원, 3호 학생으로도 당선되였다. 중학교 학업을 마친 후 부푼 꿈을 안고 생산대에서 생산대장을 찾아 아무 일이나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의무배달원으로 반년간 일하고 임무를 착실하게 완성하자 생산대의 기공원 일도 맡게 되였다. 매일 40여명 일군들의 공적을 평가하고 공수를 기입했는데 집체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일할수록 성수가 났다.
시골에서도 짬짬이 시간을 리용해 농민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밭갈이와 논갈이하는 요령을 배우면서 농사일을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그 기간 대대단조직의 배려로 신청서도 바치고 밤늦게까지 단규약을 학습하여 생산로동에 참가한 지 일년 만에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게 되였다.
일년이 지나고 스무살이 되던 해 나는 생산대단지부 서기 직을 맡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요구를 한층 높였다. 생산대의 30여명 청년들을 조직하여 일마다 앞장섰고 함께 단규약을 학습했으며 여러가지 문체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청년들의 사상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로 그들은 서로 뒤질세라 입단을 지원해나섰다. 그들은 각 면에서 적극적인 활약을 보였는데 2, 3년 사이에 우리 단지부는 10여명으로부터 28명 단원으로 발전하였다. 지금도 그때를 회억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후 진토배기 실농군이 되여 생산대장을 겸하면서 고향건설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불타는 열정으로 당지부에 입당지원서를 바쳤다. 푸른 꿈을 익혀갈 무렵 예고도 없는 재난이 나에게 슬며시 덮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평소에 감기도 모르고 건강하다고 장담하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인사불성이 된 채 병원 구급실에 누워있게 될 줄이야… 그때 나이가 35세였다. 병원에서 넉달 넘게 치료를 받고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로력을 완전히 상실한 불구자로 되고 말았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였지만 퇴원할 때 나의 지력상수는 5살 어린애 만큼도 안된다고 했다.
4년 동안 병치료에 가산을 털다 보니 그때 우리 집은 그야말로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다.’는 속담과 같이 말끔하게 가난했다. 변변한 가장집물이 없는 텅 빈 집안에 네 기둥만 남은 초가집벽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고 소나기가 내리면 여기저기 비가 새여 대야를 놓고 비물을 받아내야 했다. 우리 가정이 힘들 때 대대당지부와 진정부에서 구제금을 보내주었고 초가집을 새 기와집으로 바꾸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동네분들도 어려운 살림형편이였지만 영양품을 사고 자주 문안을 왔다고 가족으로부터 전해들었을 때 너무 감동되여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병이 호전되면 꼭 동네분들에게 보답하고 사회에 작은 보탬이 되는 유용한 사람으로 살리라 속다짐했다.
그 후 가족의 끈질긴 정성에 힘입어 나의 건강상태는 조금씩 회복되여 5년 만에 다시 농사일을 시작하게 되였다. 마을사람들은 “식물인간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 농사를 짓다니 정말 기적이네.”라고 혀를 찼다. 그때 의사는 뇌출혈 사망률은 99% 정도로 아주 높은데 만일의 경우 치료가 되면 후유증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의 말 대로 몇년이 지나니 사선을 헤매이던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게 되여 43세 되던 해에 다시 촌민 소조장을 맡게 되였다.
호도거리가 실시된 후부터 대대는 촌으로, 생산대는 소조로 바뀌였다. 그때 촌민소조는 총인구가 130여명이였는데 호도거리농사를 짓다 보니 촌민들은 서로 얼굴을 맞댈 기회도 적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촌민소조를 잘 꾸려나갈 수 있을가? 며칠 동안 고민했는데 농한기에 들놀이나 모임을 조직하려면 활동경비가 소요되였다. 생각 끝에 촌민소조 골간회의를 소집하여 휴양지로 남아있던 생산대 3급지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어 얻은 수입으로 활동경비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우리는 즉시 행동했다. 촌당지부의 지지하에 촌민소조의 로력을 선정하여 중년협회를 조직하고 회장도 선거했다. 이른 봄부터 회장의 인솔하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부지런히 밭을 가꾸었더니 가을에 수입이 짭짤했다. 몇년간 밭도 다루고 국가에서 내려오는 밭보조금까지 합해 활동경비가 마련되였다. 진달래 피는 따뜻한 봄날에 들놀이도 조직하고 등산, 바줄 당기기, 보배 찾기, 고무풍선 터치기 등 종목으로 촌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힘들게 마련한 집체의 자금을 한푼이라도 아껴쓰면서 해마다 주내 여러 곳의 관광지도 다녀왔었는데 촌민들은 저마다 행복에 겨워했다. 우리 촌민소조에는 한족촌민집도 여러호 있었는데 매년 3.8절이나 보름이면 한자리에 모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도 하고 즐겁게 윷놀이도 하면서 두 민족 촌민들은 줄곧 화목하게 지냈다.
촌민 소조장을 맡아서부터 25년간 촌감독위원과 촌로인협회 회장을 겸임하면서 초심과 사명을 명기하고 일터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기에 나는 거의 해마다 촌당지부의 표창을 받았고 진정부의 모범공산당원으로도 당선되였다. 누구보다도 당의 혜택을 많이 받은 나로서 응당해야 할 일이였는데 과찬을 받은 것만 같다.
세월은 류수처럼 흘러 어느덧 내 나이 70 고령을 넘어섰지만 당원으로서 힘이 닿는 데까지 촌사업을 도우려고 한다. 전염병이 우리 마을을 습격한 그해 겨울에도 한달 동안 의무적으로 촌사무실에 출근하여 후근을 맡아나서기도 했다. 봄이면 촌민들을 동원하여 마을주위에 꽃도 심고 며칠에 한번씩 마을 골목길마다 깨끗하게 청소했는데 길손들한테서 마을환경이 깨끗하다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한결 마음이 개운해졌다.
사람들은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아름답다고 한다. 나도 나의 여력을 다 바쳐 생명이 마감되는 날까지 촌당지부의 하나의 작은 받침돌 역할을 발휘하여 후반생을 붉게 타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보람 있게 살리라 결심한다.   
 
(필자는 화룡시 룡성진 공농촌 촌민)
작가:리희수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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