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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리상왕국’이였던 연변대학


날짜 2022-08-11 13:51:22 조회


며칠 전, 서류를 정리하다 서재 한구석에 10여년 잠자고 있던 종이함 하나가 눈에 띄였다. 아마 옛날 무슨 자료나 사진들이 들어있는 함이겠거니 했는데 아니였다.
함 안에는 내 인생을 증명하고 인정해줄 기자증이며 직함자격증서며 작가협회 회원증… 등이 들어있었다. 그렇게 찾던 결혼증도…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하나를 꺼내 펼쳐보니 연변대학 졸업증이다. 자주색 가위를 열고 보니 왼쪽 귀퉁이에 나의 대학시절 사진이 박혀있고 그 아래 1961년 9월 1일이라는 졸업일자가 적혀있었다. 오른쪽에는 본과 합격 리력서가 몇줄 적혀있고 큼직한 글자로 씌여진 ‘교장’이라는 두 글자 옆에 ‘주덕해’라는 붉은 인감이 찍혀져있다. 나는 졸업증서를 쥐고 걸상에 기대앉아 한식경이나 회억에 잠겨버렸다. 머리는 어느새 그 시절로 돌아갔다.
1957년, 나는 연변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아쥐고 한참이나 울었다. 청춘시절, 고중 3년 동안 농촌에서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연변대학은 나의 ‘리상왕국’이였다.
1957년 9월초, 촌뜨기인 나는 자그마한 이불짐을 이고 세상에 나서 처음 뻐스란 걸 타고 대팔령, 소팔령 넘고 넘어 도문에 이르러 다시 기차역에 가서 처음 기차라는 걸 보고 타고 하면서 부푼 심정으로 연길역에 도착했다.
연변대학을 어떻게 찾아가지? 은근히 걱정했는데 출구를 나오자 뻐스 한대에 붙인 ‘연변대학 신입생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큼직한 프랑카드가 눈에 확 안겨왔다. 그 차를 향해 달려가니 상급생 남성 두분이 웃으며 내 머리에서 보짐을 받아들고 올라가 앉으라고 했다.
얼마 안 가 연변대학 학생기숙사에 배치받았다. 남 먼저 일찍 도착한 나는 널직한 숙소 한칸에 혼자 서서 두리번거렸다. 고중까지도 학생들의 숙소는 모두 온돌방이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침대에는 짚을 다져 만든 돗자리가 있는외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도 온돌인 줄 알고 침대보도 준비해오지 않은 나는 이불짐을 풀고 그 자그마한 보자기를 펴고 그 우에 앉아있었다.
깔끔하게 생기고 안경을 건 상급반 언니와 키가 헌칠하고 멋지게 생긴 언니 두분이 들어와 짧은 량태머리를 따고 키도 작고 몸도 홀쭉한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며 “너 어디서 왔니?” 하고 물었다. 내가 훈춘에서 왔다고 하니 침대보가 있냐고 물었다. 내가 없다고 하니 그들은 나갔다가 신문지와 세멘종이를 가득 안고 들어와 침대를 포장해주었다. 그들이 나간 다음 나는 추워나서 엄마가 챙겨준 막내동생을 업고 다니던 자그마한 포대기를 꺼내 쓰고 앉아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대머리에 멋지게 생긴 아바이 한분과 대여섯명 되는 간부인 듯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내가 어정쩡해 앉아 그들을 쳐다보자 포대기를 쓰고 앉아있는 촌뜨기 모습이 우스웠던지 그 멋진 아바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너 어디서 왔니?” 하고 물었다. “훈춘에서 왔습꾸마.” 그때 금방 침대를 포장해주던 상급반 언니(량금자)가 내 곁에 와서 포대기를 벗기며 “교장 선생님이 신입생 위문을 오셨다.”고 귀띔했다. 나는 놀라 벌떡 일어서서 꾸벅 경례를 했다.
그제서야 그 멋진 아바이가 이 대학을 세운 공로자 림민호 교장임을 알았다. 행운스럽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림민호 교장 선생님을 만나뵌 것이다. 그 뒤 대학을 떠난 후에도 연변대학에 볼 일이 있어 갈 때마다 교정에 세워진 림민호 교장 반신상 앞에 다가가 인사를 드리군 했다.
1957년, 입학하여 행운스럽게도 소설 《암야》를 쓴 김창걸 교수님이 우리에게 문학강의를 했다. 시인 리욱 선생님도 강의했는데 눈앞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령감(灵感)’이란 단어를 해석하던 강의가 인상 깊고 함경북도 사투리로 고문을 강의하던 현남극 교수님도 인상 깊다. 림휘 선생님의 외국문학 강의가 재미있었고 멋진 최윤갑 선생님의 언어학 지식에는 감동을 받았다. 시인 설인 선생님, 김상원 선생님… 나는 그 은사님들을 따라 꼭 작가로 되려고 작심했다.
 

나의 진짜 대학은 밤에 9시까지 문을 여는 도서열람실이였다. 나는 밤마다 독서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처음 만난 도서관에 쌓인 책들에 정신이 팔려 닥치는 대로 읽고 필기했다. 밤은 짧았다.
내가 다녔던 소학교, 중학교와 고중에는 도서관이 없었다.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는 연변대학 도서관을 처음 보고 신세계와 같았다. “만권을 독파하면 작가로 된다.”는 누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나는 4년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다. 고리끼의《어머니》, 레브 똘쓰또이의《안나까레니나》,《전쟁과 평화》, 유고의《비참한 세계》며 곽말약, 로사, 로신의 저서이며 포엘바하의 유물론, 헤겔의 변증법까지… 철학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면서도 읽고 베꼈다. 한번은 9시에 전등을 끄는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책을 보다가 도서관리원이 문을 잠그고 전등을 끄고 가버리는 바람에 우리 몇은 1층 화장실 유리문을 열고 뛰여내렸다. 넘어지기도 하고 굴러 곤두박질도 했지만 우리는 좋다고 웃어댔다. 아름다웠던 청춘시절이였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졸업배치 지원란에 모교인 훈춘고중을 써넣었다. 두 동생이 거기서 공부하는 데다 고향에서 아버지를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연길에 남고 싶었지만… 배치받기 전 학교에서는 우리 조선문학부 2개 반에서 20여명을 남겨 한어문연수반에 보내 반년 공부하게 했다. 당시 중학교 한어교원이 부족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는 흑룡강성과 료녕성, 길림성, 주외에서 온 학생들을 제외하고 조선족마을에서 자라 조선족 중학교, 고중을 나온 연변 학생들의 한어수준이 매우 낮았다. 한어문 글을 읽을 수는 있는데 언어소통이 잘 안되였다.
그 한어문연수반에서 나는 열심히 고한어문도 배우고 갖가지 한어문 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송시며 로신, 로사의 작품도 한어문으로 읽고 공자의《론어》, 로자의《도덕경》같은 것도 사전을 찾으며 읽었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문자수준이 많이 제고되여 한어문으로 된 기사를 조선문으로 어렵잖게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연변대학은 나의 은혜로운 곳이였다. 대학문에 들어서자 4년 동안 나라에서는 매 학생에게 조학금 13원 50전을 지급했다. 그 시기 대학교원 로임도 50원 내지 60원을 받을 때이니 13원 50전 밥값이 없어 자취생활을 했던 나에게는 아주 많은 돈이였다. 달마다 조학금을 받는 날이면 우선 8원으로 한달치 밥표를 샀다. 나머지로 치약, 치솔, 비누를 사고 80전짜리 기름종이에 넣어 파는 크림을 사서 얼굴에 발랐으며 20전을 내고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양말도 사고 몇달 모아 내복도 사입었다. 그 사이 집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 한푼도 보내주지 못했지만 나는 배고프지 않게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당과 나라에 하냥 감사하기만 했다.
 

연변대학은 나의 운명을 바꿔주었다. 산골 ‘촌뜨기’가 고중 교원으로, 기자로, 작가로 성장하는 지식토대를 닦아주었고 퇴직한 지금까지도 넉넉한 양로금으로 만년을 근심걱정 없이 보내게 해주었다. 연변대학 설립 73돐을 맞는 오늘날 연길시 공원거리에 일매지게 일떠선 연변대학성을 올려다 보는 심정은 실로 감개무량하다. 설립 초기 학생 298명, 교직원 56명 뿐이였던 연변대학에 오늘날에는 본과생 1만 9165명, 박사, 석사생 5320명, 전업대학생 2056명, 류학생 277명, 교직원 2237명으로 교직원과 학생 대오가 늘어났고 22개 학원, 본과전업만 해도 76개라고 한다.
특히 연변대학 도서관에는 현재 200만권의 서적이 들어있단다. 그때는 몇만권이였을가? 더구나 자랑스러운 것은 국가 ‘211공정’중점건설대학에 들었다고 한다.
내 청춘의 ‘리상왕국’이였던 연변대학, 당과 나라의 혜택으로 세워진 연변대학이여, 길이 빛나라!
작가:김영금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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