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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업, 그것은 숙명이였다


날짜 2022-12-20 17:04:55 조회


매번 사진첩에서 색바랜 사진을 들춰볼 때마다 나는 농촌문화 생활을 위하여 겁없이 달렸던 지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깊은 감회에 잠긴다.
나의 고향 화룡시 남평진 로과촌은 두만강 상류에 있다. 학교 문을 나서 사회에 진출하고 보니 농촌생활은 전원풍경처럼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였다. 마을의 100여명 청년들은 갈 곳을 잃어 방황하고 있었고 문화생활의 가뭄 속에서 청춘 역시 메말라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문학에 깊은 흥취를 가지고 있던 나는 장시기 방치되여있던 촌의 ‘문화실’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단총지와 민병련에 제기하고 문화실을 개방하였다. 당시 화룡현문화관의 선생을 모시고 사교무를 보급하고 현도서관에 가서 도서를 가져다가 빌려주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청년들의 불타는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몇몇 ‘싸움군’ 청년들은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용암 같은 청년들의 정열을 하나로 묶어놓을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다. 공연대가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지체없이 예능에 끼가 있는 청년들을 위주로 ‘공연대’를 무었고 덤으로 ‘싸움군’ 청년들도 공연팀에 가담시켜 ‘문무’가 겸비한 공연대를 만들었다. 춤을 잘 추는 청년들은 춤을 추고 ‘싸움군’들은 든든한 후원군이 되여 겨울철 땔나무를 책임졌다.
공연대를 조직하였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끌어줄 만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너희들이 디스코를 잘 추지 않니? 체조 같은 무용이라도 좋으니 각자 가장 멋진 동작을 뽑아서 우리의 디스코를 만들어보자!”
나는 공연대에 들어온 기쁨에 들떠있는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올렸다. 얼마나 걸렸을가? 아마도 한달 이상은 걸렸으리라. 마침내 ‘로과 디스코’, ‘두만강 디스코’가 탄생하였다.
당시 크게 류행되던 음악 ‘칭키스칸’에 맞춘 ‘로과 디스코’, ‘두만강 디스코’는 강렬한 률동과 균형 잡힌 동작으로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무대공간을 메우며 배우들이 뛰여가고 날아오르며 특기동작을 할 때면 관중석이 들썩거리기까지 하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문예야회 기획과 창작에 참여하였으나 나는 ‘로과 디스코’, ‘두만강 디스코’보다 더 큰 파워를 가진 무용은 보지 못했다.
독창도 있고 무용도 있고 독주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아도 단조로웠다. 재담이나 만담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재담이나 만담 창작을 누구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문학창작을 한답시고 날마다 습작에 매달려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서 ‘로과 디스코’, ‘두만강 디스코’를 만든 것처럼 나도 재담이나 만담을 창작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말썽을 일구던 두 청년을 상대로 재담을 창작하였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독창, 합창, 2인창, 표현창, 쌍무, 재담, 현대무, 독주… 몇달간의 준비 끝에 향영화관을 빌어 약 한시간 반 동안 펼쳐진 첫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전문적인 단체보다 못지 않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다른 마을의 요청으로 순회공연까지 하였다.
당시 주정협 부주석으로 계시던 김태갑 시인은 우리 로과촌문화실을 방문하고 문화실 공연을 본 후 “대형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아주 수준 높은 공연이다.”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해 여름, 마침 화룡현에서 농촌문예경연대회를 한다는 통지가 내려왔다. 향에서는 당연히 우리 로과촌문화실을 참가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생겼다.
촌민위원회의 책임자가 와서 말하기를 근 40명 되는 배우들을 다 보낼 수는 없기에 ‘목이 쭉 빠진 훤칠한 아이들만 선발하여 보낸다.’는 것이였다.
단결과 문화향상을 위하여 조직된 ‘공연팀’에 체격 좋은 청년이 있으면 몇이나 있겠는가. 키 작고 목이 어깨에 바툼하게 매달린 아이들은 울상이 되였다.
“걱정마라. 참가하면 전원 모두가 참가할 것이다. 단 한사람이라도 락방된다면 나는 포기하겠다.”
나의 강렬한 주장 앞에 촌에서는 전원이 참가하는 것을 동의, 나는 합창 하나로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일이 발생하였다. 향문화소 소장이 찾아온 것이였다.
“향을 대표하여 가는 것 만큼 상도 타야 하니 구연공연은 다른 사람들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알고 보니 향문화소 소장은 자기가 예전부터 데리고 다녔던 ‘로배우’들을 기용할 타산이였다. 대본도 마을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공연 하나가 줄어들면 우리 배우들이 무대에 오를 기회도 그만큼 줄어든다. 나는 한해 겨울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련습하였던 우리 배우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무대에 오르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저도 한편 쓸 것이니, 가령 저의 대본이 좋으면 우리 문화실 배우들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향문화소 소장도 나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큰소리를 쳤지만 앞이 캄캄하였다. 소품이라고는 단 한번도 써본 적 없는 나였다.
부담이 동력이란 말을 나는 절대적으로 믿는다. 문화소 소장과 만나기로 한 날 이른아침, 번뜩이는 령감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단 두시간 만에 ‘떼떼’ 흉내를 낼 줄 아는 마을 청년을 모델로 풍자극 <깨여진 사랑의 꿈>이라는 대본을 써냈다. 이 작품은 내가 향후 극작가로 탈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였다.
내가 창작해 연출을 보고 또 배우로 등장한 풍자극 <깨여진 사랑의 꿈>은 그해 현문예공연에서 최고 히트작이 되였다. 이 작품은 또 화룡시예술단에 채용되여 전국 순회공연 무대에 올랐다.
그 이듬해에 있은 화룡시농촌문예경연대회에 나는 또 풍자소품 <기자가 오던 날>을 내놓아 당시 소품연극 무대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후날 새 중국 창건 40돐 맞이 전 주 소품구연콩클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연길시조선족구연예술단에 채용되여 전국 순회공연 무대에 올랐으며 방송전파를 타기도 하였다.
문화를 갈구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모든 경험은 나의 창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연변에서 소품을 가장 많이 창작한 사람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나는 1992년에 ‘연변 전문예술단’ 소품콩클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소품콩클에서 소품 <돼지약>으로 대상을 수상해 그해 소품 ‘2관왕’에 올랐으며 21세기를 맞으며 펼쳐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소품대잔치에서도 대상을 수상하였다.
가령 농촌의 문화사업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평생동안 무대작품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구멍이 숭숭한 난로 하나에 의거해 한해 겨울을 났던 지난 세월, 지금 생각해보면 한해 겨울 동안 우리가 문화실에서 태운 나무는 아마도 한 트럭은 넘었을 것이다. 거의 전부가 젊은 청년들이 집집의 나무가리에서 한단, 두단씩 ‘도적질’하여 온 것이다. 몇해 동안 그렇게 하였지만 마을에서는 그 누구 하나 “나무를 도적질하지 말라.”고 나를 찾아온 적 없었다.
아마도 그분들은 날마다 줄어드는 자기 집의 땔나무가 청년들의 가슴에 문화의 불길을 지펴올리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리라!
후날 향단위 서기로, 전문 예술단체 창작실 전직작가로, 기자로 되여서도 나는 농촌의 문화사업을 놓은 적 없었다. 항상 문화일선에서 달렸고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고 지키기 위한 일에 앞장섰다.
지금 고향에 찾아가면 과거의 허름한 벽돌집 대신 궁궐 같은 문화회관이 덩실하게 안겨온다. 비록 낯익은 얼굴들은 많이 보이지 않지만 나는 항상 기분 좋게 돌아선다. 오동나무가 푸르른데 봉황새가 아니 올소냐!
전반 내 인생에 관통되여 흐르는 문화사업, 어쩌면 지금이 시작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당보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문화의 전도사로 생활현장에서 뛰고 있다.
초심, 내 가슴의 초심은 늘 푸르다!
작가:허강일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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