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천양지차의 경력

― 사적인 대외관계로부터 본 중국의 변천
날짜 2019-08-28 10:51:50 조회


 올해는 새 중국 창건 7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70돐 국경절을 맞이하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나 자신의 사인대외관계 경과를 돌이켜보고 또 그것을 통하여 조국의 위대한 변천을 깊이 느끼게 된다.
내가 일본 도꾜에 거주하고 있는 요네다 게이꼬씨와 통신거래를 가지게 된 것은 1980년대 초기에 일본의 어느 한 민간단체가 주최하고 거행한 외국인대상 일본어작문콩클에 참가하여 상을 타게 된 것이 그 계기가 되였다. 그 일본민간단체가 일본어자습을 지향한 중국인 및 중국인과의 편지거래를 희망하는 일본인을 서로 소개하여주었기에 내가 요네다씨와 필우관계를 맺게 되였던 것이다. 그때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여 몇년 되지 않았으며 중국인들은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에 대해 보편적으로 큰 선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외국인들도 이제껏 신비한 베일에 싸여있던 중국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또 중일 국교정상화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깊은 동경심을 품고 일본어를 배우는 붐을 일으켰다. 나도 중일국교정상화가 되자마자 일본어독학을 시작하였으며 고향에서 조금 소문이 나서 한 중국잔류 일본고아가 찾아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육친찾기 요청신까지 써달라고 부탁받은 적도 있다.
그때의 중국백성들의 일상생활 수준은 일본과 비길 바도 못되는 형편이였다. 요네다씨가 나에게 보내온 편지는 전부 타자기로 산뜻하게 찍어보낸 것이였으나 나는 만년필로 쓴 초고를 또박또박 정서하여 보내는 원시적인 ‘옛 방법’이였다. 우리를 펜팔로 정해준 일본민간단체에서는 일본인들에게 중국인들의 생활형편을 감안하여 매번 편지에다 중국우표를 사서 동봉해 보낼 것을 조언하였다. 하여 초기에 요네다씨는 몇번 편지에 중국우표를 함께 넣어 보내군 하였다. 후에 이런 상황이 나의 요구에 의해 다시 반복되지 않게 되였다.

1992년에 나는 북경에서 요네다씨와 첫 대면을 가졌다. 당시 그녀는 중학생 아들과 함께 중국에 단체려행을 왔으며 나는 안해와 함께 북경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가 투숙한 호텔에서 첫 상봉을 마치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숙박처인 연변판사처로 돌아가게 되였다. 요네다씨는 우리더러 택시를 타고 가라고 인민페 50원을 주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50원이라는 돈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였다. 우리는 그 돈을 남기기 위해 택시승차를 단념하고 도보로 돌아가기로 하였으며 북경시 지도를 펼쳐들고 길을 떠났다. 호텔에서 우리 숙박지까지 도착하였을 때는 날이 희붐히 밝을 무렵이였다. 네댓시간의 ‘야간행군’이 끝난 셈이다. 하지만 개문시간이 되지 않아 판사처에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밖에서 근 한시간가량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자녀가 다 북경에 있는 관계로 늘 북경에 와 얼마간씩 있군 하니 북경의 지리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요네다씨와의 상봉시에는 북경에 대해 깜깜부지였다. 거리이름은 물론 동서남북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1966년도 문화대혁명 때 중학생이였던 내가 이른바 ‘혁명적 대련계 맺기(革命大串联)’의 명목으로 왔던 것이 첫번째였고 요네다씨를 만나러 상경한 것이 두번째였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그때 어느 곳의 어느 호텔에서 떠났던지 딱히 확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북경의 북쪽켠에서 남쪽켠으로 몇시간 걸은 것 같다. 요네다씨와 북경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그녀가 중국녀성들이 늘 신는 헝겊신을 사 신고는 원래 신고 왔던 신을 버리지 않고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는 모습이였다. 나는 그때 일본인들이 돈이 엄청 많아 흔전만전 쓰는 줄로 알았다. 생각 밖에도 그들에게는 검박한 일면이 있었다. 그때 북경시내에는 인력거가 상당히 많았다. 일자리를 찾아 외지에서 들어온 건장한 남성들이 인력거를 밀고 다니면서 외국인 유람객들의 돈을 벌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 인력거가 없어지고 사합원(四合院) 같은 특정한 곳에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그때는 가는 곳마다 인력거군들이 웅기중기 모여있었다. 요네다씨는 아들더러 이런 인력거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 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물질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면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십년간의 문화대혁명를 겪은 중국인들은 심한 문화기아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때 사람들에게 익숙하다는 문예작품이라고는 고작해야 혁명본보기극이나 호연의《금빛대로(金光大道)》,《해빛찬란한 날(艳阳天)》같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셀 수 있을 정도의 작품들이였다. 그러므로 개혁개방을 시작한 초기에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영화들이 들어오자 뜨거운 외국영화붐이 곧장 일어났다. 특히 일본영화《추격(追捕)》이 그때 중국인들 가운데서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의 주인공인 모리오까 역을 맡은 다까구라 겐(高仓健)은 강의하고도 과묵한 남자대장부의 이미지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 말하는 아이돌이였던 것이다.《추격》은 일본추리작가 니시모라 쥬꼬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원래의 일본어 제목은《그대여, 분노의 강을 건너라》였다. (이것도 나의 일본어수준이 높아진 후에 안 일이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온 집 식구들이 다 떨쳐나섰다. 그때까지 중국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굴곡적인 스토리와 남녀간의 불 같은 애정을 묘사한 장면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람마다 영화의 주제곡을 흥얼거릴 정도였다. 이 영화의 대사를 리용하여 장기 두는 모습을 형상화한 재담까지 나왔다. 두 사람이 장기를 두는데 우세를 점한편이 궁지에 빠진 상대방을 조롱한다. “모리오까, 봐, 얼마나 푸른 하늘이야. 어서 가, 자네는 저 푸른 하늘 속에 녹아버릴 거야. 곧추 걷게, 곁눈 팔지 말고…” 그리고는《추격》의 주제곡을 코노래로 부른다. “라…라…라…” 궁지에 빠져 진땀을 빼고 있는 상대방을 또 보란 듯이 약을 올린다. “여기서 뛰게, 아끼구라가 뛰지 않았나? 도우도도 뛰였지, 자네도 한번 뛰여봐! 빨리 뛰란 말이야!” 지금 젊은이들은 이 재담을 듣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오리무중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중국인이라면 어디 가나 이 재담을 듣고는 박장대소하였다. 
작년에 나는《추격》을 다시 보았다. 근 40년이 지나 다시 본 영화는 나에게 처음과는 전혀 다른 감수를 주었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중국의 외국어 관련 교육이 맹아상태였고 외국어 관련 서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일본어 자습을 시작할 때 일본어사전이 없어서 30, 40년대 일본에서 출판된 낡은 사전을 5원 주고 남한테서 산 것 뿐이였다. 그때의 일어수준이 고작해야 히라가나나 외울 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 와 다시 본《추격》은 일본어 원판이다. 일본의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영한 이른바 오리지널이였다. 하지만 보고난 나의 감수는 한마디로 말하여 랭수를 들이킨 것 같이 싱거웠다. 중국에서 재미있는 문예작품들을 많이 섭렵한 나에게는 다시 본《추격》이 아주 평범한 스토리였고 인상에 남는 장면들이 별로 없었다. 다만 처음 보던 때의 그립던 모습과 들뜬 기분이 다시 살아날 뿐이였다. 오늘날 중국에는《추격》보다 더 인기를 끄는 영화가 많이 나왔다. 지어 일본텔레비죤방송에서도 중국영화들을 방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은 경제면에서 세계 두번째 대국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면에서도 그와 걸맞은 지위를 점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그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같은 례로 또 일본영화《종이달》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무슨 큰 상을 탄 걸작이라고 칭찬이 자자한 영화이다. 나도 큰 기대감을 갖고 보았는데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영화의 녀주인공은 은행직원인데 한 년하 대학생을 남자친구로 삼고 그와의 깊은 정에 빠져든다. 그녀는 남친을 위해 은행의 공금을 람용하게 되는데 끝내 그 죄가 탄로되자 외국으로 도망친다. 이런 아주 평범한 스토리의 영화가 무슨 큰 상을 탔다니 일본인들의 심미평가 수준이 어떤 건지 리해할 수가 없다.
시대가 변하고 중국도 무척 발전했다. 일본의 거의 모든 면을 흔상하고 선망하던 중국인들이 지금 와서 일본의 흠집을 꼬집고 일본인들의 렬근성에 의문의 눈길을 던지고 있다. 이전에는 일본이라면 과학기술과 경제, 문화가 발전한 선진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였으나 지금 와서 일본이라면 먼저 력사문제, 조어도분쟁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민족자부심이 증대된 증거이다. 이런 민족자부심은 중국의 궐기와 중국인들의 생활수준 제고와 직접 이어진다.
지난해 여름 일본으로 단독 자유려행 갔을 때도 이 점을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도꾜, 오사까, 교또와 같은 대도시에는 중국 유람객들을 대상한 상품소개책자가 널려있었고 구매안내인들이 거리에 줄지어있었다. 중국어를 류창하게 구사하는 그들은 중국 유람객들을 한명이라도 더 자기네 점포에 맞아들이려고 안깐힘을 다 썼다. 내가 일본 천황이 거주하고 있는 도꾜의 황거(皇居)로 갔을 때도 사처에서 중국어로 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 국회 의사당에 갔을 때도 그랬다. 중국인의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순간이였다. 80년대 초기에 일본어 작문콩클에서 수상한 후 나는 당시 일본 국회 중의원 의원인 나라사끼 야노스께 선생과 편지를 몇번 주고받았고 그한테서 일본정치 관련 서적을 받아보았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일본 국회 의사당 앞에 서있다. 나라사끼 선생의 생존 여부를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배려해주던 중국인이 국회 의사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마저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중국이 변한 것이다. 
나무잎을 보면 가을을 알 수 있고 물방울을 통해 창망대해를 볼 수 있다. 나 개인의 사적대외관계 경과를 거쳐 나는 우리 나라의 위대한 변천을 실감한다. 나는 내 자신의 오늘이 조국의 발전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늘 말하는 개인의 운명은 나라의 운명과 긴밀히 련결되여있다는 뜻이다. 강대한 나라는 국민의 존엄을 지켜준다. 개인이 한방울의 물이라면 나라는 큰 바다이다. 물방울이 대해로 들어가야 마르지 않듯이 나라가 강대해져야 그 나라 국민은 고개를 쳐들고 떳떳이 살아갈 수 있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개혁개방 초기 일본 펜팔한테서 우표까지 도움받으며 편지거래를 시작했던 내가 지금에는 자비로 일본 단독자유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였다.
1990년대 초기에 일본벗과의 대면시간, 대면지점을 약속하는 전화를 하려 했으나 집에 전화가 없어 친구집 전화를 빌려 하던 내가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위챗을 하고 있다.(쓸데 없는 말 같지만 친구집 전화를 빌려 걸었다는 말을 들은 요네다씨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전하라고 하면서 나에게 기념품까지 넘겨주었다.) 

개혁개방 초기에 일본어공부를 하는 참고서적이 귀해 이곳저곳에서 빌려보던 내가 지금 일본서적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일본어방송에다 일본어 텔레비죤프로그램까지 시청할 수 있게 되였다. 그야말로 이전에 비해 천양지차이다. 이런 것들은 나에게 우리 나라 제도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과 문화자신감 및 민족자부심을 뿌리 깊게 심어준다.
변화는 물질면 뿐만 아니라 정신의식면에서도 그 심각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면의 변화가 더 클지도 모른다. 개혁개방 전에 외국상황에 대해 깜깜부지였던 사람들이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외국의 달이 중국의 달보다 더 밝다.’는 허무주의적인 의식에 물젖었었다. 이런 허무주의와의 몸부림 싸움을 거쳐 그래도 ‘고향의 달이 밝다.’는 의식으로 돌아오게 되였고 서방세계를 랭철하고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이것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대서특필해야 할 위대하고도 심각한 변화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중국이라는 우리 조국의 위대한 발전변화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작가:허승룡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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