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연변대지에서 펼쳐진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상해 지식청년 수림제와 그의 조선족 남편 류정윤이다.
지난 8월의 어느 하루, 취재차 방문한 기자를 수림제 로부부가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칠순을 넘긴 수림제는 인자하고 친절했으며 류정윤은 야윈 몸매였지만 아주 정정했다. 조선어 억양이 섞인 한어로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수림제가 상해에서 온 한족 지식청년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1952년에 상해의 한 지식분자 가정에서 태여난 수림제는 마침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동갑이다. 지난 세기 60년대, 홍색가요 <붉은 해 변강 비추네>가 전국에서 열풍을 일으켰고 상해의 거리와 골목에도 이 선률이 울려퍼졌다. 노래 속에 묘사된 벼꽃 향기가 풍기고 과일나무가 줄지어있는 곳, 연변에 대한 수림제의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변방으로 가고 조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자.” 당시 17살이였던 수림제는 국가의 호소에 부응해 연변을 선택했다.
1969년 4월 17일, 수림제는 꿈과 열정을 가지고 부모의 품을 떠나 황포강변에서 2000여킬로메터 떨어진 장백산 기슭의 연길현 세린하공사 세린하대대 제5생산대(지금의 룡정시 로투구진 세린촌)에 하향했다. 어린시절부터 우월한 생활조건에 곱게 자란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놀라 멍해졌다. 질퍽질퍽한 길, 허름한 초가집, 파리가 란무하는 변소,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 언어…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였다.
“그 시절에는 화장실도, 조명도 없고 생활여건이 매우 렬악했습니다. 첫끼 저녁밥은 조밥이였는데 희미한 초불 아래서 저는 계란볶음밥인 줄 알았지요. 김치는 상해의 절임고기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더욱 큰 어려움이 이어졌다. 4월 중하순은 봄갈이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이고 해야 할 농사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수림제와 지식청년들은 예전에 농사일을 해본 적도 없었고 조선어도 몰라 촌민들의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난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촌민들에게 물어보면서 조선어를 한글자씩 배우기 시작했다. 한편 촌민들도 광주리를 메고 소똥을 줏고 거름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농사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생활하며 함께 로동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돈독한 정을 다져갔다.
2년간의 단련을 거치니 그들은 농기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였고 사원들과 조선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수림제의 조선말 번역 이름이 번지기 어려운 데다 마을의 조선족처녀 미옥과 많이 닮았다 하여 사원들은 수림제에게 ‘상해 미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수림제는 “저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해 금방 적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은 저를 지지해주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민병련 부련장과 ‘무쇠처녀’ 전투대의 대장으로 선정됐습니다.”고 소개했다.
평생의 동반자인 조선족 청년 류정윤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였다.
당시 수림제는 촌민병련의 책임자였고 류정윤은 촌단지부 서기였다. 사업의 수요로 두 사람은 자주 한회의에 참가했다. 업무 성과가 뛰여난 류정윤은 주 또는 현의 회의에서 발언할 기회가 많았는데 한어 실력이 높지 않아 늘 수림제를 찾아 발언고를 수정하곤 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 후 류정윤은 주동적으로 고백했지만 수림제는 줄곧 망설였다. 산과 바다의 거리 뿐만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생활환경과 풍속습관 등의 어려움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의 어느 날, 수림제는 현에서 열린 문예창작회에 참가했다. 뜻밖에도 류정윤이 수림제를 찾아와 그녀 앞으로 온 길림공업대학 입학통지서를 건네주었다. 이는 수림제가 농촌을 떠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응당 기뻐해야 했지만 류정윤이 섭섭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망설였다.
부모의 반대, 이웃의 의심, 수림제의 선택은 무거운 짐이 되여 류정윤을 짓눌렀다. 압력에 견디다 못한 류정윤은 결국 몸도 마음도 지쳐 쓰러졌다. 고민 끝에 병문안을 간 수림제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기회를 포기하고 연변에 남아 사랑을 지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류정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두 사람은 상해로 떠났고 수림제의 부모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강렬하게 반대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량가 부모는 점차 혼사를 인정하게 되였다.
1972년, 혼례를 치르고 수림제는 조선족집안 며느리가 되였다. 당시 그들은 식구 아홉명이 35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초가집에서 모여 살았는데 집에 로력이 적고 식구가 많다 보니 생활은 늘 쪼들렸다. 결혼 후 그녀는 돼지 기르기, 농사짓기 등 이전에는 접하지도 못했던 기술을 익혔고 매일 아침 산에 올라 땔감을 베기도 했다. 또한 지인의 소개로 세린하공사의 한 상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면서 한달에 25원의 월급을 받았다.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고저 수림제는 35원으로 암퇘지 한마리를 사다 길렀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에 가 풀을 캐다가 돼지에게 먹이고 나서야 부랴부랴 출근길에 오르군 했다. 그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한 듯 암퇘지는 일년에 두번씩 10여마리의 새끼돼지를 낳는데 수림제는 한마리당 15~30원의 가격으로 팔아 가정에 한해 300여원의 수입을 올려주었다.
집안생활이 점차 펴이는 동안 수림제는 지역 경제 발전에도 묵묵히 기여했다. 1982년, 그녀는 업무실력을 인정받아 룡정현공급판매합작사의 구매관리자로 발탁되였고 1989년에는 연길시로 전근해 백화점의 경리직을 맡았다.
수림제는 상해 출신이고 당시 오빠가 상해에서 대외무역을 했기 때문에 구매가 편리하고 대리 판매도 가능했다. 수십만개의 상품을 선 판매, 후 지불의 모식으로 기업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다. 연변 첫패의 청바지와 첫패의 상해라면도 모두 그녀가 들여온 것이다.
수림제는 시부모님께 공경했고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시집, 장가 잘 보냈으며 세 자녀도 모두 바르고 유용한 인재가 되여 각각 상해, 한국, 북경에서 가정을 꾸렸다. 그래서 수림제 부부는 퇴직 후에도 계속 이 세곳을 돌아다녔다. 2017년, 수림제와 류정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변에 돌아와 사랑하는 이 땅에 정착하여 편안한 로후를 보내게 되였다.
55년을 넘은 연변정과 천리산해를 넘나드는 이 사랑이야기는 행복한 삶에 대한 만족과 제2의 고향에 대한 끝없는 미련을 보여준다. 그들은 연변땅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고 한다.
지난 8월의 어느 하루, 취재차 방문한 기자를 수림제 로부부가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칠순을 넘긴 수림제는 인자하고 친절했으며 류정윤은 야윈 몸매였지만 아주 정정했다. 조선어 억양이 섞인 한어로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수림제가 상해에서 온 한족 지식청년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1952년에 상해의 한 지식분자 가정에서 태여난 수림제는 마침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동갑이다. 지난 세기 60년대, 홍색가요 <붉은 해 변강 비추네>가 전국에서 열풍을 일으켰고 상해의 거리와 골목에도 이 선률이 울려퍼졌다. 노래 속에 묘사된 벼꽃 향기가 풍기고 과일나무가 줄지어있는 곳, 연변에 대한 수림제의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변방으로 가고 조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자.” 당시 17살이였던 수림제는 국가의 호소에 부응해 연변을 선택했다.
1969년 4월 17일, 수림제는 꿈과 열정을 가지고 부모의 품을 떠나 황포강변에서 2000여킬로메터 떨어진 장백산 기슭의 연길현 세린하공사 세린하대대 제5생산대(지금의 룡정시 로투구진 세린촌)에 하향했다. 어린시절부터 우월한 생활조건에 곱게 자란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놀라 멍해졌다. 질퍽질퍽한 길, 허름한 초가집, 파리가 란무하는 변소,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 언어…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였다.
“그 시절에는 화장실도, 조명도 없고 생활여건이 매우 렬악했습니다. 첫끼 저녁밥은 조밥이였는데 희미한 초불 아래서 저는 계란볶음밥인 줄 알았지요. 김치는 상해의 절임고기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더욱 큰 어려움이 이어졌다. 4월 중하순은 봄갈이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이고 해야 할 농사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수림제와 지식청년들은 예전에 농사일을 해본 적도 없었고 조선어도 몰라 촌민들의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난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촌민들에게 물어보면서 조선어를 한글자씩 배우기 시작했다. 한편 촌민들도 광주리를 메고 소똥을 줏고 거름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농사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생활하며 함께 로동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돈독한 정을 다져갔다.
2년간의 단련을 거치니 그들은 농기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였고 사원들과 조선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수림제의 조선말 번역 이름이 번지기 어려운 데다 마을의 조선족처녀 미옥과 많이 닮았다 하여 사원들은 수림제에게 ‘상해 미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수림제는 “저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해 금방 적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은 저를 지지해주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민병련 부련장과 ‘무쇠처녀’ 전투대의 대장으로 선정됐습니다.”고 소개했다.
평생의 동반자인 조선족 청년 류정윤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였다.
당시 수림제는 촌민병련의 책임자였고 류정윤은 촌단지부 서기였다. 사업의 수요로 두 사람은 자주 한회의에 참가했다. 업무 성과가 뛰여난 류정윤은 주 또는 현의 회의에서 발언할 기회가 많았는데 한어 실력이 높지 않아 늘 수림제를 찾아 발언고를 수정하곤 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 후 류정윤은 주동적으로 고백했지만 수림제는 줄곧 망설였다. 산과 바다의 거리 뿐만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생활환경과 풍속습관 등의 어려움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의 어느 날, 수림제는 현에서 열린 문예창작회에 참가했다. 뜻밖에도 류정윤이 수림제를 찾아와 그녀 앞으로 온 길림공업대학 입학통지서를 건네주었다. 이는 수림제가 농촌을 떠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응당 기뻐해야 했지만 류정윤이 섭섭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망설였다.
부모의 반대, 이웃의 의심, 수림제의 선택은 무거운 짐이 되여 류정윤을 짓눌렀다. 압력에 견디다 못한 류정윤은 결국 몸도 마음도 지쳐 쓰러졌다. 고민 끝에 병문안을 간 수림제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기회를 포기하고 연변에 남아 사랑을 지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류정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두 사람은 상해로 떠났고 수림제의 부모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강렬하게 반대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량가 부모는 점차 혼사를 인정하게 되였다.
1972년, 혼례를 치르고 수림제는 조선족집안 며느리가 되였다. 당시 그들은 식구 아홉명이 35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초가집에서 모여 살았는데 집에 로력이 적고 식구가 많다 보니 생활은 늘 쪼들렸다. 결혼 후 그녀는 돼지 기르기, 농사짓기 등 이전에는 접하지도 못했던 기술을 익혔고 매일 아침 산에 올라 땔감을 베기도 했다. 또한 지인의 소개로 세린하공사의 한 상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면서 한달에 25원의 월급을 받았다.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고저 수림제는 35원으로 암퇘지 한마리를 사다 길렀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에 가 풀을 캐다가 돼지에게 먹이고 나서야 부랴부랴 출근길에 오르군 했다. 그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한 듯 암퇘지는 일년에 두번씩 10여마리의 새끼돼지를 낳는데 수림제는 한마리당 15~30원의 가격으로 팔아 가정에 한해 300여원의 수입을 올려주었다.
집안생활이 점차 펴이는 동안 수림제는 지역 경제 발전에도 묵묵히 기여했다. 1982년, 그녀는 업무실력을 인정받아 룡정현공급판매합작사의 구매관리자로 발탁되였고 1989년에는 연길시로 전근해 백화점의 경리직을 맡았다.
수림제는 상해 출신이고 당시 오빠가 상해에서 대외무역을 했기 때문에 구매가 편리하고 대리 판매도 가능했다. 수십만개의 상품을 선 판매, 후 지불의 모식으로 기업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다. 연변 첫패의 청바지와 첫패의 상해라면도 모두 그녀가 들여온 것이다.
수림제는 시부모님께 공경했고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시집, 장가 잘 보냈으며 세 자녀도 모두 바르고 유용한 인재가 되여 각각 상해, 한국, 북경에서 가정을 꾸렸다. 그래서 수림제 부부는 퇴직 후에도 계속 이 세곳을 돌아다녔다. 2017년, 수림제와 류정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변에 돌아와 사랑하는 이 땅에 정착하여 편안한 로후를 보내게 되였다.
55년을 넘은 연변정과 천리산해를 넘나드는 이 사랑이야기는 행복한 삶에 대한 만족과 제2의 고향에 대한 끝없는 미련을 보여준다. 그들은 연변땅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고 한다.
출처: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김설옥 편역
김설옥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