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 선산의 벌초를 끝내고 남산의 오솔길을 따라 산을 내렸다. 그리고 곧장 내가 자라난 고향 광진평(로투구진 수북촌)을 찾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천고마비의 계절, 높게 트인 9월의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고 강물은 파아랗고 짙푸른 산야는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야트막한 산자락 언덕에는 햇솜처럼 부드러운 하얀 억새꽃이 나불거리고 소담스레 피여난 국화꽃이 방긋이 웃고 있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에 막혔던 가슴이 펑 뚤렸다.
동년시절을 모래불더기(로투구진 응암 8툰)와 고무재골에서 보내다가 16살 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광진평에 이사갔다. 이 마을에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으며 광활한 천지에서 잔뼈를 굳히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나는 추억을 찾아 스적스적 골목길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적한 골목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길옆의 황둥개가 낯선 사람을 보자 “컹컹” 짖어댔다. 일찍 내 발자국이 찍혀있고 내 그림자와 체취가 남아있던 익숙한 골목길이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어딘가 생소했다. 80여가구가 살던 마을이 30여가구의 작은 마을로 변하고 초가집 대신 네귀 번듯 기와집이 땅을 차고 일떠섰다. 잘 포장된 골목길 옆에 하얀색 페인트칠을 한 울바자가 일매지게 늘어서고 가로등이 보초병마냥 마을의 안녕을 지키고 있어 한결 정갈해보였다.
아침이면 훈련이 끝난 민병들이 깨끗이 쓸어내고 쓰레기를 태우던 골목길이다. 주르륵주르륵 비 내리는 날이면 반장화 신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공수표를 나눠주던 골목길이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덧 옛 건조실 마당에 들어섰다.
세파 속에 건조실은 오간 데 없고 건조실 마당은 어느 집의 터밭으로 변해있었지만 남북으로 약간 경사진 건조실 마당의 지형은 변함없어 그제날의 륜곽을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었다. 옛 건조실 마당에 들어서니 매캐한 담배 연기가 진동하던 곳에서 목에 흰수건을 걸치고 입에 독한 엽초를 말아문 채 기다란 삽으로 이글거리는 화구에 석탄을 퍼넣으며 건조불을 때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상싶었다.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해묵은 버드나무 밑에 와서 멈춰졌다.
“떵-떵-떵-”
어데선가 찰떡을 치는 떡메소리가 방불히 귀전에 맞쳐오는 상싶었다. 과거 석이네 집 앞이였다. 어느 해인가 석이가 장가를 가게 되자 우리는 끌끌한 청년 7~8명을 조직하여 이른아침에 찰떡을 치게 되였다. 찰떡치기는 보기와는 달리 엄청 힘든 일이다. 오죽했으면 동네 아줌마들이 사위감을 고를 때 떡치는 장소에서 힘 꽤나 쓰는 총각을 사위감으로 고른다는 일설도 있었겠는가.
마을이 큰지라 100여근의 찰떡을 치고 나면 등이 땀에 흠뻑 젖고 온몸이 해나른하여 아침 먹을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온 겨울 석이네 집에 모여들어 텔레비죤을 시청한 값은 톡톡히 치러야 했으니…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80여가구 동네에 흑백텔레비죤이 고작 서너대밖에 없었다. 그래도 석이네 집만은 텔레비죤을 갖춰놓고 시청했다.
우리는 저녁 밥술을 놓기 바쁘게 마치 누가 부르는 것처럼 석이네 집에 모여들어 그 시절 청년들의 혼을 빼앗아갔던 련속극《곽원갑》,《상해탄》을 밤새도록 시청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텔레비죤을 보다가도 신호가 미약하면 두 사람이 밖에 나가 6메터 넘는 락엽송 천선을 집안에서 지휘하는 구령에 따라 이리저리 돌리며 방향을 조절해 신호를 잡군 했다.
나는 소슬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는 강뚝길에 올라섰다. 소조한 가을의 들녘 작은 강으로 오염 한점 없는 파아란 강물이 찰랑찰랑 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르릉-부르릉-”
“허기영차 허기영차”
어데선가 방불히 불도젤의 동음과 목도할 때의 메김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때리는 상싶었다.
이 제방뚝은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에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고조 속에서 수선된 것이였다. 원래 우불구불하던 하천 제방을 곧게 펴고 20여리 되는 구간을 3대의 불도젤이 토방을 밀어내여 대충 제방 륜곽을 만들면 그 뒤를 따라가며 1000여명의 민병들이 큼직한 광주리에 흙을 담아 목도채로 메여날라 쌓은 것이였다.
립동이 지난 초겨울 날씨지만 불도 지피지 않은 빈 집 온돌에 벼짚을 두툼히 펴고 비닐을 깔고 자면서 이른 새벽이면 옆에 자는 나팔수를 깨워 기상나팔을 불어 민병들을 거느리고 하천제방 공사장에 나갔다. 날이 채 밝지 않아 어둑시그레한 공사장에 모닥불을 지피고 목도채를 휘여잡고 “허기영차” 구령 부르며 제방뚝을 쌓아올렸다.
강산이 일곱번 변한다는 세월이 흘러 나보다 4년 선배인 자치주와 함께 성장하면서 날따라 번영해지는 고향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만감이 교차된다.
하늘길이 열리고 고속철이 통하면서 출행이 편리해져 수많은 관광객들이 생태가 잘 보전된 청정지역으로 찾아와 우리 민족 전통음식을 맛보고 우리 말과 글을 보전해가고 있는 민속문화에 갈채를 보낸다. 당의 민족정책 빛발 아래 연변은 변강이 안정되고 정치가 안정되며 경제가 발전하고 민족이 단결되여 바야흐로 세계를 향해 비약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
그제날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본다’면서 호기를 뽑으며 사래긴 밭고랑에 머리를 파묻고 땅을 허비던 시대는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향의 들녘에는 이앙기가 달려가며 푸른 씨앗 뿌려가고 산기슭엔 스리슬슬 수확기가 돌아가며 황금낟알 쏟아간다.
무연히 펼쳐진 연록색의 전야에는 큼직한 드론이 날아가며 농약 뿌리고 비료 뿌려가는 농부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핀다. 스마트폰 하나면 안방에서도 온라인 판매로 농산물을 판매하고 세계를 일주한다. 농가의 뜨락에는 소수레 대신 여러가지 류형의 농기계가 보란 듯이 서있고 잘 포장된 고향길로 황금낟알 박아 실은 차들이 달려간다. 깨끗한 골목길에는 밤에도 가로등이 켜져 길손들의 안녕을 지켜주고 시골에도 쓰레기처리장이 있다.
돌아보니 내가 성장해온 뒤에는 고향이라는 아름다운 풍경이 언제나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 비옥한 땅 우에는 이름 모를 풀과 나무와 곡식들이 시름없이 자라고 순박하고 정이 많은 고향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뿌리는 저세상에 간지 이슥하지만 나를 키워주고 나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여준 고향이라는 뿌리는 영원하다.
그 뿌리가 있었기에 나는 부단히 자양분을 흡수하고 하나둘 푸른 잎새를 펼치며 가지를 뻗어가면서 뿌리 깊은 나무로 건실하게 성장해 사업하다 정년퇴직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작은 풀>이라는 노래를 즐겨부른다.
“꽃처럼 향기 없고 나무보다 작은 나는/
아무도 모르는 한포기 작은 풀이라네/
…
강물과 산천은 나를 키워주고/
대지와 어머니는 나를 뜨겁게 포옹해주었다네”
나는 언제나 고향의 작은 풀이고 싶다.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여 고향의 변천을 굽어보고 싶다.
천고마비의 계절, 높게 트인 9월의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고 강물은 파아랗고 짙푸른 산야는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야트막한 산자락 언덕에는 햇솜처럼 부드러운 하얀 억새꽃이 나불거리고 소담스레 피여난 국화꽃이 방긋이 웃고 있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에 막혔던 가슴이 펑 뚤렸다.
동년시절을 모래불더기(로투구진 응암 8툰)와 고무재골에서 보내다가 16살 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광진평에 이사갔다. 이 마을에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으며 광활한 천지에서 잔뼈를 굳히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나는 추억을 찾아 스적스적 골목길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적한 골목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길옆의 황둥개가 낯선 사람을 보자 “컹컹” 짖어댔다. 일찍 내 발자국이 찍혀있고 내 그림자와 체취가 남아있던 익숙한 골목길이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어딘가 생소했다. 80여가구가 살던 마을이 30여가구의 작은 마을로 변하고 초가집 대신 네귀 번듯 기와집이 땅을 차고 일떠섰다. 잘 포장된 골목길 옆에 하얀색 페인트칠을 한 울바자가 일매지게 늘어서고 가로등이 보초병마냥 마을의 안녕을 지키고 있어 한결 정갈해보였다.
아침이면 훈련이 끝난 민병들이 깨끗이 쓸어내고 쓰레기를 태우던 골목길이다. 주르륵주르륵 비 내리는 날이면 반장화 신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공수표를 나눠주던 골목길이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덧 옛 건조실 마당에 들어섰다.
세파 속에 건조실은 오간 데 없고 건조실 마당은 어느 집의 터밭으로 변해있었지만 남북으로 약간 경사진 건조실 마당의 지형은 변함없어 그제날의 륜곽을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었다. 옛 건조실 마당에 들어서니 매캐한 담배 연기가 진동하던 곳에서 목에 흰수건을 걸치고 입에 독한 엽초를 말아문 채 기다란 삽으로 이글거리는 화구에 석탄을 퍼넣으며 건조불을 때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상싶었다.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해묵은 버드나무 밑에 와서 멈춰졌다.
“떵-떵-떵-”
어데선가 찰떡을 치는 떡메소리가 방불히 귀전에 맞쳐오는 상싶었다. 과거 석이네 집 앞이였다. 어느 해인가 석이가 장가를 가게 되자 우리는 끌끌한 청년 7~8명을 조직하여 이른아침에 찰떡을 치게 되였다. 찰떡치기는 보기와는 달리 엄청 힘든 일이다. 오죽했으면 동네 아줌마들이 사위감을 고를 때 떡치는 장소에서 힘 꽤나 쓰는 총각을 사위감으로 고른다는 일설도 있었겠는가.
마을이 큰지라 100여근의 찰떡을 치고 나면 등이 땀에 흠뻑 젖고 온몸이 해나른하여 아침 먹을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온 겨울 석이네 집에 모여들어 텔레비죤을 시청한 값은 톡톡히 치러야 했으니…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80여가구 동네에 흑백텔레비죤이 고작 서너대밖에 없었다. 그래도 석이네 집만은 텔레비죤을 갖춰놓고 시청했다.
우리는 저녁 밥술을 놓기 바쁘게 마치 누가 부르는 것처럼 석이네 집에 모여들어 그 시절 청년들의 혼을 빼앗아갔던 련속극《곽원갑》,《상해탄》을 밤새도록 시청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텔레비죤을 보다가도 신호가 미약하면 두 사람이 밖에 나가 6메터 넘는 락엽송 천선을 집안에서 지휘하는 구령에 따라 이리저리 돌리며 방향을 조절해 신호를 잡군 했다.
나는 소슬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는 강뚝길에 올라섰다. 소조한 가을의 들녘 작은 강으로 오염 한점 없는 파아란 강물이 찰랑찰랑 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르릉-부르릉-”
“허기영차 허기영차”
어데선가 방불히 불도젤의 동음과 목도할 때의 메김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때리는 상싶었다.
이 제방뚝은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에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고조 속에서 수선된 것이였다. 원래 우불구불하던 하천 제방을 곧게 펴고 20여리 되는 구간을 3대의 불도젤이 토방을 밀어내여 대충 제방 륜곽을 만들면 그 뒤를 따라가며 1000여명의 민병들이 큼직한 광주리에 흙을 담아 목도채로 메여날라 쌓은 것이였다.
립동이 지난 초겨울 날씨지만 불도 지피지 않은 빈 집 온돌에 벼짚을 두툼히 펴고 비닐을 깔고 자면서 이른 새벽이면 옆에 자는 나팔수를 깨워 기상나팔을 불어 민병들을 거느리고 하천제방 공사장에 나갔다. 날이 채 밝지 않아 어둑시그레한 공사장에 모닥불을 지피고 목도채를 휘여잡고 “허기영차” 구령 부르며 제방뚝을 쌓아올렸다.
강산이 일곱번 변한다는 세월이 흘러 나보다 4년 선배인 자치주와 함께 성장하면서 날따라 번영해지는 고향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만감이 교차된다.
하늘길이 열리고 고속철이 통하면서 출행이 편리해져 수많은 관광객들이 생태가 잘 보전된 청정지역으로 찾아와 우리 민족 전통음식을 맛보고 우리 말과 글을 보전해가고 있는 민속문화에 갈채를 보낸다. 당의 민족정책 빛발 아래 연변은 변강이 안정되고 정치가 안정되며 경제가 발전하고 민족이 단결되여 바야흐로 세계를 향해 비약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
그제날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본다’면서 호기를 뽑으며 사래긴 밭고랑에 머리를 파묻고 땅을 허비던 시대는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향의 들녘에는 이앙기가 달려가며 푸른 씨앗 뿌려가고 산기슭엔 스리슬슬 수확기가 돌아가며 황금낟알 쏟아간다.
무연히 펼쳐진 연록색의 전야에는 큼직한 드론이 날아가며 농약 뿌리고 비료 뿌려가는 농부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핀다. 스마트폰 하나면 안방에서도 온라인 판매로 농산물을 판매하고 세계를 일주한다. 농가의 뜨락에는 소수레 대신 여러가지 류형의 농기계가 보란 듯이 서있고 잘 포장된 고향길로 황금낟알 박아 실은 차들이 달려간다. 깨끗한 골목길에는 밤에도 가로등이 켜져 길손들의 안녕을 지켜주고 시골에도 쓰레기처리장이 있다.
돌아보니 내가 성장해온 뒤에는 고향이라는 아름다운 풍경이 언제나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 비옥한 땅 우에는 이름 모를 풀과 나무와 곡식들이 시름없이 자라고 순박하고 정이 많은 고향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뿌리는 저세상에 간지 이슥하지만 나를 키워주고 나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여준 고향이라는 뿌리는 영원하다.
그 뿌리가 있었기에 나는 부단히 자양분을 흡수하고 하나둘 푸른 잎새를 펼치며 가지를 뻗어가면서 뿌리 깊은 나무로 건실하게 성장해 사업하다 정년퇴직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작은 풀>이라는 노래를 즐겨부른다.
“꽃처럼 향기 없고 나무보다 작은 나는/
아무도 모르는 한포기 작은 풀이라네/
…
강물과 산천은 나를 키워주고/
대지와 어머니는 나를 뜨겁게 포옹해주었다네”
나는 언제나 고향의 작은 풀이고 싶다.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여 고향의 변천을 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