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장의관에서 유체고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붉은 당기에 덮여져있는 아버지의 유체가 우리 앞에 놓여져있었다.
비장한 추도곡 속에서 나는 가슴을 들먹이며 흐느끼면서 아버지유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순간 생명의 경각에 이른 시각에 비록 약하나마 또박또박하게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들리는 듯싶었다.
“얘, 이달 당비를 바쳤지?”
아버지는 1951년 7월 1일, 19살 되던 피끓는 청춘시절에 입당하셨다. 그 후 줄곧 화룡현(지금의 화룡시)상업국, 화룡현재정무역당위, 화룡현석유회사당위 서기 사업을 하시면서 한 공산당원의 천직을 고스란히 지켜갔고 열심히 사업하시며 살아오셨다. 내가 헴이 들기 시작하던 12살 때 아버지가 늘 은빛이 반짝이는 5전짜리 엽전을 모아두는 것을 보아왔다.
“아버지, 그 새 돈을 나 줘요? 응.”
내가 떼질을 쓰면 아버지는 정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드셨다.
“안돼. 이건 당비로 바칠 돈이야.”
“당비란 뭐예요? 다른 돈으로 바치면 안되나요?
“안되구 말구. 이 반짝반짝 빛나는 돈으로 당비를 바치는 것은 이 아버지의 깨끗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과 같거든. 알겠어?”
아버지는 나의 이마를 살짝 튕겨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말뜻을 다는 알지 못하였지만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몇년간 아버지는 당의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업작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셨으며 달마다 빨락이는 새 돈으로 당비를 바치군 하셨다. 그때로부터 나는 새 돈만 생기면 “아버지. 받으세요. 새 돈…” 하며 아버지께 드렸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정년퇴직 후 당뇨병을 지닌 아버지건만 로인활동실의 의무보도원으로 되여 당의 정책을 선전하면서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취지를 잃지 않으셨다. 당뇨병에 중풍으로 옹근 5년을 병마 속에서 시달리면서 나중에는 운신조차 하실 수 없게 되였고 모든 생활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전혀 안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놓고 은근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얘야, 난 인젠 운신하기조차 힘드니 네가 나를 대신하여 달마다 당비를 바쳐다오. 매달초 5일을 넘기면 안된다. 그리고 꼭 새 돈으로 말이다…”
“참, 아버지두. 이 지경에 이르렀는 데도 또 당비근심이예요? 그런 건 근심마시고 몸을 춰세우는 데 신경 쓰세요.” 나는 괴로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후로부터 아버지의 당비를 바치는 일은 내 몫이였다. 첫 몇달간 나는 명심하여 아버지의 부탁 대로 당비를 제때에 바쳤다. 그런데 일이 좀 바쁘고 또 매번 말미를 맡고 당비를 대신 바치는 일이 나중에는 부담으로 되여 차일피일 미루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휴식날, 아버지 보러 갔더니 아버지께서는 겨우 눈을 뜨시면서 “얘, 제때에 당비를 바치였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엉겁결에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수척한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띠우시며 품속에서 차곡차곡 개여진 50원짜리 새 지페 한장을 건네주며 간신히 입을 떼시는 것이였다.
“이달은 이 돈으로 당비를 바쳐다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며 그만 얼굴이 화끈해났다.
참, 거짓말을 해버린 내가 얼마나 아버지한테 안스럽던지… 나는 그만 얼굴을 돌리고 눈굽을 찍었다.
사실은 아버지의 지난달 당비를 한달이나 미루었던 것이였다.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자 바람으로 말미를 얻어 아버지의 마지막 당비를 그 깨끗한 새 돈으로 바쳤다.
한주일 후 아버지는 세상을 하직하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명심하시던 당비, 그것은 정녕 50여년 당년한을 지닌 한 공산당원의 드높은 조직관념의 표현이였고 드높은 정치각오의 표현이였으리라!
진붉은 당기를 덮은 아버지의 평온한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의 철 같은 당성의 깊이를 되새기면서 진정한 로당원의 영원한 명복을 두 손 모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