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염병 통제 일선에서 고심하는 당원간부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페염이 전파되기 시작한 이래, 우리 주 광범한 당원간부들은 전염병 퇴치 제1선에서 솔선수범해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다하면서 하나 또 하나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매개 당원은 하나의 기치와도 같다. 초연이 없는 이 전역에 맞서 전 주 당원간부들은 주동적으로 앞장서 돌진하여 무너뜨릴 수 없는 ‘홍색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전 주 209만명 여러 민족 군중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전력하였다.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바이러스 제어전선에 나선 것도 당원간부들이고 추위를 무릅쓴 채 도시와 향, 진으로 통하는 검사점을 고수하면서 장기간 저온작업을 견지한 것 역시 당원간부들이며 사회구역, 촌마을 가가호호를 누비며 생활필수품을 구매해주고 관련 선전사업을 추진해온 것도 당원간부들이였다. 그들은 저마다 앞장서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에 따스함을 전달하면서 이제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고 있다.
가장 위험한 곳으로
“주임, 저를 격리병실로 보내주십시오!”
1월 31일, 연길시병원 외과 ICU 간호장 오설화는 주동적으로 첫기 일선의료일군팀에 지원했다. 그 후 련 5일 밤낮, 그는 환자 치료와 간호를 하는 한편 심리위안 사업까지 도맡았다. 의료방호 물품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하고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방호복을 입어야 했으며 한나절이 지나고 나면 몸과 마음이 피로해져 힘들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환자들의 신체상황이 날로 호전되고 마음도 점점 상쾌해지는 것을 보면 모든 피로가 순식간에 가셔진다고 했다.
“격리병실에서 사업한 경험이 있기에 제가 가는 것이 제일 적합합니다.”
2월 20일, 연변에서 무한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그녀는 다시한번 주동적으로 지원해나섰다.
“엄마가 다른 곳에 가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해. 오래 걸리지 않아. 인차 돌아올 테니 아빠 말 잘 들어…”
출발하기 전, 6살밖에 안되는 딸애를 달래고 나서 그녀는 남편에게 부탁했다.
“부모님과 아이는 당신이 수고해주세요. 내가 무한에 간다는 사실은 부모님께는 알리지 마세요.”
사랑하는 딸애와 가정을 잠시나마 떠나 가장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게 된 리유에는 의사로서의 책임과 사명이 있었고 또한 당원으로서의 사명감과 의무 때문이였다.
철 같은 경찰의 눈물
“여보,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새벽 한시경, 전화기에서 안해의 울음 섞인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역검사소에서 당직중이던 화룡시공안국 교통경찰대대 경찰 채호림은 쏟아지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켰다. 6일 전, 총망히 집을 나오면서 어머니와 간단한 작별인사가 생리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슬프고 미안하고 유감만 한가슴 가득 안고 집으로 달려간 그는 어머니 유체 앞에 오래오래 꿇어 엎딘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음력설 이튿날, 30년 경찰경력에 21년 당년한을 가진 채호림은 주동적으로 지원하여 연룡고속도로 어구 방역검사점의 림시조장을 담임하였다. 그곳은 외지차량들이 화룡시를 경과하는 제일 복잡한 곳이였다. 2월 7일, 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입원했지만 다망한 사무 때문에 단 한번 병원에 달려가 잠시 얼굴만 본 채로 그는 시종 근무집행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간혹 전화로 어머니 병세를 묻군 했는데 이렇게 생리별을 하고 나니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었다.
“특수한 시기여서 사람들이 모이면 위험하오. 장례식도 간단하게 치르기오…”
힘든 결정 끝에 로인의 장례는 그날로 결속되였다. 비통한 마음을 다잡은 채 다시 방역검사점으로 달려온 채호림은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일은 아무리 크다 해도 작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룡시의 첫 방어선을 잘 지켜내는 것은 나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마지막 념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전선에 달려가
“그나마 두 애가 말을 잘 들어줬습니다. 나이는 어려도 비상시기인 줄 알고 떠들어대지 않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훈춘시당위 정법위원회 종합처리과 과장이며 춘화진 초평촌 당건설 담당 지도원 류여진의 말이다.
초평촌은 훈춘시에서 110킬로메터나 떨어진 편벽한 곳이라 평소에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건 례상사였다. 음력설 이튿날, 금방 만나 설을 쇠고 있는 류여진 부부에게 각기 방역사업임무가 맡겨졌다. 훈춘시질병통제쎈터에서 사업하는 안해가 시름 놓고 사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류여진은 8살, 4살 난 두 애를 데리고 촌으로 달려왔다.
낮이면 류여진은 촌의 두 위원회를 도와 방역사업에 전력했다.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외래일군을 체크하고 전화문의를 했으며 촌민들을 도와 소독살균도 함께 하군 했다. 점심때가 다가오면 부랴부랴 거처로 달려와 애들에게 밥을 해먹인 후 다시 달려나가군 했다. 저녁이 되여 피곤한 몸을 끌고 거처에 돌아오면 또 불을 지펴 방을 덥히고 밥을 해 먹인 후 애들을 재워야 한다…
“다들 무사해야 내 가족도 좋아진다.”
류여진은 당원의 직책과 사명을 다하는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한차례 생생한 인생수업을 해주었다.
초연 없는 전역의 돌진자
“의사선생, 언제면 퇴원할 수 있소? 단위에 사람이 모자라 빨리 돌아가야 하오.”
“퇴원해도 인차 사업하면 안됩니다. 금방 수술했는데 푹 쉬면서 신체를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요. 난 당원이요. 반드시 내 직책을 지켜야 하오…”
룡정시교통경찰대대 개발구중대 중대장 김용철이 주치의사와 ‘담판’하던 내용이다.
1월 27일, 금방 심장수술을 마친 지 3일 되는 김용철은 의사의 당부도 마다한 채 퇴원수속을 밟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주동적으로 오가는 차량이 많은 G333 국도 검측점에 달려가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에 대한 검사사업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차를 옆으로 세우고 체온검측을 받으십시오.”
“안녕하십니까? 될수록 적게 외출하고 안전방호 조치를 잘하십시오.”
이런 말들을 하루 동안 몇백번 되풀이해야 하는지 그 자신도 기억할 수 없다.
초봄이라지만 추위가 매서웠다. 갑자기 폭설이 들이닥친 그날은 밤기온이 령하 20도를 넘어갔지만 수술을 금방 마친 김용철은 시종 24시간 일터를 고수하였다. 하도 피곤하면 길옆에 림시로 세워놓은 휴식용 텐트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배가 고프면 차거운 생수에 빵을 뜯군 했다. 전염병과 싸우는 20여일간, 김용철과 그의 전우들은 무려 5만여대에 달하는 차량, 연인수로 8만명에 달하는 행인에 대한 검측임무를 완수하였다.
“일선일수록 더욱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가 빠지면 안됩니다.”
눈보라 속에 우뚝 선 그의 모습에서 자기 직책에 대한 충성이 엿보였다.
촌마을의 의무배달원
“왕서기, 돼지고기 두근에 미나리 한근 부탁합니다.”
“집에 준비해뒀던 속효구심환이 떨어졌군요. 두병만 부탁합니다.”
…
이른아침부터 돈화시 강남진 장익촌 제1서기이며 공작대 대장인 왕전위는 촌민들이 보내오는 이러한 메시지를 받는다.
음력설 이튿날, 촌에 돌아오라는 통지를 받고 부랴부랴 친지들과 고별하고 촌에 달려간 왕전위는 촌간부들을 이끌고 유난히 바삐 돌아야 했다. 촌어구에 검문점을 설치하고 귀향일군들의 건강정황을 일일이 체크해야 했으며 선전, 설득 사업도 인내성 있게 밀고나가야 했다.
“나가지 못하게 하면 배는 어떻게 채우나?”
통제조치가 나오자 외부출행이 제한받게 된 촌민들이 우려가 생겼다. 그들의 의식주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은 왕전위의 최대사였다. 그 후로 왕전위는 매일 차를 몰고 30여킬로메터를 달려 촌민들의 생활필수품을 구매하고 각종 업무를 대신해주는 지원자가 되였다. 그러기를 련 20일,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오이 한근, 소독수 하나, 약 한병… 촌민들이 그에 대한 의뢰와 신임, 감격이 슴배여있다고 그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
“배달원동무, 오늘은 뭘 샀습니까?”
촌민들이 가끔 왕전위를 보고 우스개를 한다.
“촌에 온 지도 4년철을 잡습니다. 어느새 한가족처럼 됐구요. 그들을 위해 뛰여다니는 게 싫지 않습니다!”
왕전위의 소박한 말이다.
완전히 승리하는 그날까지 견지할 터
“일선의 사업일군들이 따뜻한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참 수고하는 분들입니다. 저는 상인 먼저 당원입니다.”
전염병이 전파되기 시작한 후 연변광익영양도시락배송유한회사 총경리 겸 당지부 서기 주조충은 주동적으로 사회책임을 짊어지고 개인헌금 20만원을 내놓은외 가족과 친구들을 동원하여 10만 4000원을 모은 후 전부 영양도시락을 만드는 데 투자했다. 매일 왕청현 10개 사회구역, 176개 방역검역소 일선 사업일군들에게 무료로 점심과 저녁 영양도시락을 알심들여 만든 후 배달해주는 게 그의 중요한 일상으로 되였다.
매일 아침 7시, 주조충은 회사에 나와 음식소재 점검부터 제작과정 감독 그리고 현장 소독과 종업원들의 체온검사 등 일을 에누리없이 추진한다. 일선에서 수고하는 사업일군들에게 영양도 풍부하고 입맛도 좋은 건강식을 제공하기 위해 그는 번마다 직접 음식을 맛보군 했고 매일 메뉴를 바꾸면서 정성을 다했다.
“반드시 깨끗하고 안전해야 합니다.”
“집에서 먹는 밥과 같다는 느낌이 들게 정성을 넣어야 합니다.”
매일 주조충이 가장 많이 곱씹는 말들이다.
“이 전투가 끝나지 않으면 나도 중도에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주조충은 도시락배송을 전염병을 완전히 전승하는 그날까지 견지하겠다는 승낙을 공개적으로 한 사람이다. 전선은 장병들이 지키고 후방의 보급사업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것이다.
연변에서 전면적으로 이 초연 없는 전투를 시작한 후 위험한 곳일수록, 임무가 과중한 곳일수록, 수요가 박절한 곳일수록 당원들이 앞장서 달려가는 곳이 되였다. 흰 가운을 걸치면 그들은 사신과 박투하는 천사이고 경복을 입으면 24시간 직무에 충성하는 전사이며 휘장을 팔에 달면 바로 사사건건 인민군중을 위해 로심초사하는 사업일군들이였다. 사실 이러한 ‘전투복’을 벗으면 그들 역시 생활의 부담과 떼여버릴 수 없는 친정에 고민하는 일반 백성들임에도 말이다. 천만 당원들이 필승의 신념으로 인민군중들과 한마음한뜻이 되여 각자 일터에서 전심전력하고 있을진대 승리의 그날이 아직도 멀가?
주당위 조직부 제공
리혜숙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