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창건 100돐을 즈음에 당중앙에서 수여한 50년 당년한 기념장을 받아안은 김재혁(77세) 로인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을 한가득 지니고 감개무량하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한 영광을 느끼고 있다.
1964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한 김재혁은 1965년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69년에 퇴역해 사업에 참가했다.
김재혁은 시시각각 당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당의 부름에 따라 선후하여 룡정시교육국 국장, 룡정시공업당위 서기, 룡정시 석정향당위 서기, 룡정시당위 조직부 부부장, 룡정시화학총공장당위 서기 등 직무를 력임했다. 그는 재직기간 시종일관 전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당의 훌륭한 사업일군이였고 대공무사하여 군중들의 애대를 받는 청렴한 공무원이였으며 자기 직책에 한결같이 충직한 공산당원이였다.
지도간부로서 그는 아무리 간고한 곳일지라도 당의 부름에 서슴없이 달려가 곤난을 헤쳐나갔다. 언제나 당의 수요를 첫자리에 놓고 사업에 전력을 몰두하다 보니 가정의 모든 일은 안해의 몫이였다. 그런 안해의 량해와 내조가 있었기에 김재혁이 당과 인민을 위한 사업을 첫자리에 놓고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충실하게 리행할 수 있었다.
갖은 심혈을 기울여 사업에 몰두해온 김재혁은 퇴직한 후 조직의 수요에 따라 2002년부터 룡정시로인협회 회장, 룡정시로인총회 회장을 맡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김재혁은 룡정시 로인들이 여생을 뜻깊고 유쾌하게 보낼 수 있도록 온갖 정력을 몰부었다.
그가 갓 회장직을 맡았을 때에는 각 로인협회 경비와 인력이 분산되고 협회활동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실제정황을 파악한 김재혁은 룡정시 관련 지도부문에 독립된 여러 협회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것을 제안했다. 지도부문에서는 김재혁의 건의가 로인사업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최적화 방안이라고 인정하고 적극 지지해나섰다.
김재혁은 분산된 여러 협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책임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류하고 공감대를 이루어 마침내 룡정시로인사업위원회(현재 룡정시로인총회)를 설립했다. 회장직을 맡은 김재혁은 지도부 건설을 억세게 틀어쥐고 믿음직하고 실력있는 간부 3명을 부회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총체적인 계획을 작성하고 지도부 성원의 분공을 명확히 했으며 일심협력하여 사업을 밀고나감과 아울러 각 협회에서도 자기만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격려했다.
로인총회에서는 지역 우세를 충분히 리용해 농업, 축산업 등 분야의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농민들에게 무공해 농작물 재배, 우량소 사양 등 과학지식을 전수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과학기술협회 전문가, 의료일군들을 조직하여 빈곤촌을 돌아다니면서 무료검진, 약품기증 등 활동을 폭넓게 벌려 촌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재혁은 로인들의 신체건강을 위해 문구, 탁구, 테니스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벌렸다. 해마다 6월 10일을 룡정시 ‘로인 걷기의 날’로 지정하고 걷기활동을 조직해 군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룡정시는 국가로인체육협회로부터 ‘걷기운동 선진단위’ 칭호를, 주로인체육협회로부터 ‘로인건강 걷기운동 명고향’이란 칭호도 수여받았다. 해마다 3월이면 로당원, 골간, 협회회장 학습반을 개최하여 재충전하면서 조직력을 강화하고 사업능력을 향상시켜 로인사업이 더욱 활기를 띠게 했다.
로인협회를 더욱 잘 운영하고 각종 행사를 원만하게 치르려면 자금도 필요했다. 김재혁은 기업의 홍보와 협회의 활동을 결부시키는 행사들을 조직하는 한편 관련 부문들을 찾아다니며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김재혁의 각고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로인문예경합대회, 걷기운동, 양걸춤, 태극권, 집단무경연 등 행사들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김재혁은 룡정시로인협회를 이끌고 협회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가는 한편 기부활동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문천지진과 아안지진이 발생했을 때 룡정시적십자회와 손잡고 재해지구에 의연금을 보냈고 2016년 연변지역에 특대 홍수가 발생했을 때에도 그의 솔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재혁은 도합 5265명의 로인들을 동원하여 의연금 7만 9140원을 모아 룡정시적십자회에 기부했다. 그리고 해마다 인원을 조직하여 곤난군중과 독거로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김재혁은 룡정시로인총회의 코기러기로서 공산당원의 선두적인 모범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다. 언제 어디서나 곤난 앞에서는 남 먼서 나서고 향수 앞에서는 뒤로 물러서면서 로당원의 본색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언제나 남보다 일찍 출근하여 협회 사무실은 물론 복도까지 말끔히 청소해놓고서야 시름놓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또한 휴식일이 따로 없이 가두, 향진, 촌의 로인협회 책임자를 찾아다니면서 문제점을 찾고 적극 해결해주었다. ‘남을 쉬지도 못하게 한다’는 악의없는 ‘핀잔’을 많이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재혁은 로간부들의 ‘후근부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를테면 로간부들이 사망했을 경우 유가족들이 선참으로 김재혁한테 부고를 전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부고를 접하자마자 달려가 후사처리를 원만하게 마무리짓는 것이 습관화가 되였다. 김재혁이 손수 맡아서 치른 장례식만 해도 11건이나 된다.
다년간 김재혁은 로인협회의 사업을 위해 열기가 충만되여 고심분투하면서 큰 업적을 쌓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곤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무리 간고한 생활형편에 처해있어도 언제 한번 조직에 손을 내밀지 않았으며 역경을 이겨나섰다. 평소 좋지 않은 건강상황에 김재혁은 수차례 입원치료를 받았다. 병원측에서 충분히 휴식할 것을 신신당부했지만 그는 자기 몸을 돌볼 겨를이 없이 로인총회의 사업에 전념했다. 김재혁은 줄곧 지은 지 40여년이 넘는 헐망한 집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티 한번 내지 않고 당에 대한 드팀없는 굳은 신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서 꾸준히 열정을 쏟아 당에서 맡겨준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10여년 동안 추호의 동요도 없이 로인사업을 위해 기울인 김재혁의 노력들은 알알이 무르익어 알찬 열매를 맺었다. 그는 선후하여 전 주 리퇴직간부 선진개인, 전 주 로인협회 선진사업일군, 룡정시 우수공산당원, 길림성 로과학기술사업일군협회 농촌과학기술보급 선진개인 등 영예를 수여받았다.
현재 김재혁은 로인협회 명회회장, 고문으로 활약한다. 그는 새로운 로인협회 지도부를 도와 건설적이고 합리한 건의와 의견을 내놓으면서 석양을 더욱 붉게 불태우고 있다.
황혼을 붉게 물들이며 여생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김재혁은 지난 9월, 29명 ‘연변 가장 아름다운 로인’ 회갑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는 “큰 잔치상을 받아안고 기쁨에 넘치고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당을 열애하고 조국을 열애하며 인민을 열애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흘러듭니다.”고 감격에 겨워했다.
언제나 군중을 위한 인생관을 확립하고 보람 있게 살면서 군중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는 김재혁은 명실공히 훌륭한 공상당원으로 불리고 있다.
(필자는 룡정시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