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향을 떠난 지 어언간 37년이 된다. 나의 출생지 도문시 량수진 량수촌은 행정소속으로 말하면 이전에는 훈춘에 속했으나 1991년에 도문으로 넘어갔다. 해마다 청명절이나 추석 때면 꼭 고향으로 돌아가 산소에 들렀다가 그 자리로 곧추 연길로 다시 돌아왔기에 고향마을을 들어가 본 적이 별로 없다. 또한 떠난 지 오랜지라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말건넬 상대도 없는 것이 실정이다. 당조 때 시인 하지장이 쓴 <회향우서(回乡偶书)>가 바로 지금의 내 처지이다.
한번은 마음먹고 고향마을에 가 보았다. 살던 옛집은 다 허물어져 온데간데 없어지고 주변의 집들도 간곳없이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서쪽켠에 있는 공급판매합작사 숙사가 그나마 남아있었기에 겨우 어림짐작으로 옛 집터를 추측할 수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몇십년 지난 고향마을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해있었다. 초가집들이 밀집해있던 옛터는 다 평지로 바뀌였고 서쪽 석두하강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벽돌집들이 새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관이 있던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량수에는 지난 60년대에 큰 홍수가 나져 강물에 떠내려온 통나무들을 건져 지은 영화관이 있었다. 초라한 초가집들 속에 우뚝 솟은 영화관은 그 당시 나름 대로의 현대맛을 뽐내였다. 영화관에서 새 영화를 상영하는 날에는 멀지 않은 우리 집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스피커가 울린다. 상영원이 영화제목을 방송한 후 레코드를 틀어놓으면 듣기 좋은 노래소리가 련이어 흘러나온다. 나는 지금껏 악보문맹이지만 부르는 옛노래들은 대부분 그때 영화관 스피커를 통해 들어 배운 것이다. <오포에서의 데이트(敖包相会)>, <초원의 밤(草原之夜)>, <련인의 선서(婚誓)>와 같은 민요들은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애창하는 노래들이다.
지금은 도시에서도 큰 영화관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였다. 있다면 수십명이 푹신한 쏘파에 편안히 앉아서 팝콘을 먹으면서 즐기는 소형 영화관이다. 그것도 젊은층들이 영화관에서 구경하면 텔레비죤에서 보는 것보다 색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면서 그런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영화관 가는 것이 일종 커다란 문화적 향수였다. 표값이 15전인가 20전인가 되였는데 그땐 그런 돈마저 없어서 어떤 개구쟁이들은 변소널판쯤으로 기여올라 도둑구경을 한다. 캄캄한 영화관에 느닷없이 고약한 구린내가 코를 찌르는지라 옆에 있던 관중이 소리쳐서 그만 덜미를 잡히군 하였다. 한번은 외국영화《쇠파리》가 상영되였는데《쇠파리》는 내가 원 소설을 읽어보았기에 영화가 어떻게 각색되였는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울며불며 애걸복걸하였으나 들은 척 만 척 끄떡없었다. 마침 갓 결혼하여 우리 집에 놀러 온 외삼촌이 보다 못해 딱하던지 영화표값을 내주는 것이였다. 총살당하면서도 다시 꿋꿋이 일어서는 주인공, 총을 면바로 쏘라며 사형집행대에 불호령하던 쇠파리, 그때 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향 영화관의 스피커 덕분에 나는 지금도 많은 옛노래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방송을 즐겨듣는 습관이 몸에 배였다. 생활이 궁핍하고 문화자원이 결여했던 그 세월에 기쁨과 지식을 가져다주는 많지 않은 통로에서 방송이 주요한 역할을 논 것만은 틀림없다.
이 얘기와 상관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외국이야기를 하나 하려 한다. 2차세계대전시에 또구리 이꾸꼬라 부르는 미국적 일본인 녀성이 있었다. 진주항 급습사건 전에 그녀는 친척방문으로 일본에 찾아왔다가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그만 발이 묶여 일본에 갇히게 되였다. 일본군부에서는 미국식 영어를 미국인 못지 않게 능란히 구사하는 그녀의 재능을 리용하여 대 미군 심리작전방송을 시작했다. 그녀의 부드럽고도 재치가 넘치는 방송풍격은 미군의 대환영을 받아 태평양전쟁터에서 제일 인기 있는 프로로 되였다. 비상한 충격력을 가진 그녀의 목소리에 홀딱 반한 미군병사들은 그녀를 ‘도꾜의 장미꽃’이라 불렀다. 그녀는 미국병사들의 마음속 련인으로 되였고 미군병사들은 그녀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려고 일본점령전투에 서슴지 않고 뛰여들었다. 그 뿐 아니라 그녀가 후에 미군에 체포되자 석방청원서까지 제출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미군병사들의 고향정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저락시키려던 일본군의 전술이 오판을 낳고 역효과를 초래한 것이다. 서방인들은 향토적 정서 즉 고향에 대한 애착심보다 미녀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이 점을 일본인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동양인에 속하는 우리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땅에 대한 애착심 즉 향수적 정서는 어느 때 어디서나 지울 수 없이 뿌리가 깊다는 뜻이다. 향수는 영어에서 노스탤지어(nostalgia)라 하지만 동방인인 일본인들은 우리가 쓰는 단어와 똑같이 향수(きょうしゅう)라 말하는 사실도 이 점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지금 나는 자녀가 북경에 거주하고 있기에 일년중 많은 시간을 북경에서 보내고 있다. 중학생 때 처음 와 본 수도, 농촌에서 태여나 농촌에서 자랐고 농촌을 별로 떠나보지 못한(당시 기껏해야 량수에서 연길로 몇번 가본 적 있을 뿐) 나에게는 북경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당시 고층건물조차 처음 본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신기하기만 하였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대도시생활에 익숙해졌고 현대화 템포에 순응되여 인젠 도시생활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마음이 크지만 한구석에는 그래도 고향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하여 나는 해마다 두번씩(청명, 추석) 고향으로 돌아가 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설사 먼 북경에 있더라도 서슴지 않고 고향으로 달려간다. 가게 되면 오래동안 못 본 친구와 친척을 만난 기분이다. 외지에서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고향의 따사로움을 깊이 느끼게 되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새시대, 새 농촌, 새 형상… 세계는 넓고 내가 걸어온 길은 멀지만 그 끝자락에는 언제나 고향산천이 자리잡고 있다. 내 일생의 제일 깊은 기억이고 평생 마음속 안식처인 고향에 대한 사랑은 도도히 흐르는 두만강 물결마냥 일시도 중단된 적 없다.
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돐이 되는 해이다. 70돐이면 인간으로 말하면 ‘고래희’의 해이다. 나의 고향은 연변의 품속에서, 더 나아가 조국의 품속에서 커다란 발전과 변천을 가져왔고 빛나는 성과들을 거두었다. 비록 대도시와 같은 번화한 거리나 껌벅이는 네온등을 볼 수 없지만, 지어 어쩐지 쓸쓸한 감도 지워버릴 수 없지만 고향의 하늘은 하냥 푸르고 물은 여전히 맑다. 그야말로 청산록수이다. 물론 동년시절에 찍힌 마음속 고향의 아름다움은 꼭 지금의 현실 속의 고향과 같지 않을 수 있다. 동심에 들떠 동년시각으로 본 어렴풋한 고향인상은 원래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단지 세파의 시련을 겪지 않은,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천진한 어린이들의 마음속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뼈속까지 스며든 향수의 정서는 언제나 어디 가나 변하지 않는다. 비록 남방농촌처럼 부유하지도 않고 금수강산같이 화려한 풍경도 없지만 고향은 그 독특한 자연미와 순박한 풍격으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우리 연변의 봄을 례로 들어봐도 그렇다. 2, 3월이면 백화가 만발하는 외지의 봄보다 훨씬 늦게 찾아오는 봄철이지만 우리 고향의 봄은 다른 곳에 없는 독특한 맛, 마음을 심취시키는 향기, 순박한 정서로 사람들에게 끝없는 희열과 상상의 날개를 심어준다. 이런 봄은 소박하지만 감칠맛이 나는 것이다. 이런 향기, 감칠맛 나는 고향의 정서를 상기하며 나는 오늘도 고향생각을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토의 정서는 여기 내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