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의 홍색교양기지들은 대체적으로 도시 곳곳에 분포되여 접근성이 비교적 좋은 특점을 갖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기자는 룡정시 도심에서 담담하게 지난 기억들을 지키고 있는 홍색교양기지들을 돌아봤다.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
룡정시당위 사무청사 울안, 푸른 소나무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연노란색의 건물-일본연변침략죄증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악명이 자자했던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이다.
일제는 1909년 9월 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 체결한 후 그해 11월 2일, 룡정촌에 설치했던 ‘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1911년 5월과 1922년 11월에 화재로 인해 불에 타버렸는데 일제는 다시 건물을 재건했고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착공해 1926년에 준공된 것이다.
일제는 ‘간도’일본총령사관 지하에 감방과 고문실을 두고 혁명자와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심문했다. 1909년 11월부터 1937년 12월까지 항일투사, 무고한 백성 2만여명을 체포, 살해했고 지하 고문실에서만 4000여명이 희생됐다.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는 1940년에 룡정개척의학원으로, 1945년 9월부터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 1952년부터 2015년초까지 룡정시인민정부 사무지점으로 활용됐다. 1983년, 길림성정부로부터 성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확정된 후 보호가 강화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는 일제가 28년간 연변에서 저지른 죄행을 생동하게 기록하고 보여주고 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
일제는 1909년 9월 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 체결한 후 그해 11월 2일, 룡정촌에 설치했던 ‘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1911년 5월과 1922년 11월에 화재로 인해 불에 타버렸는데 일제는 다시 건물을 재건했고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착공해 1926년에 준공된 것이다.
일제는 ‘간도’일본총령사관 지하에 감방과 고문실을 두고 혁명자와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심문했다. 1909년 11월부터 1937년 12월까지 항일투사, 무고한 백성 2만여명을 체포, 살해했고 지하 고문실에서만 4000여명이 희생됐다.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는 1940년에 룡정개척의학원으로, 1945년 9월부터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 1952년부터 2015년초까지 룡정시인민정부 사무지점으로 활용됐다. 1983년, 길림성정부로부터 성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확정된 후 보호가 강화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는 일제가 28년간 연변에서 저지른 죄행을 생동하게 기록하고 보여주고 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
민성보사 옛터
1927년 여름, 화룡현교육국 국장 관준언과 룡정촌 전화국 국장 방지함 등 유명인사의 제의로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4개 현 교육계, 공상계의 애국인사 40명이 련합해 ‘민의를 대표하고 민의를 위해 소임을 다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내부반란을 막는다’는 취지로 동북에서 유일하게 한어와 조선어가 합쳐진 진보적 신문《민성보》를 창간, 1928년 1월에 정식으로 출간했다.
민성보사 옛터는 룡정시교원연수학교 울안에 자리해있다. 1:1비례로 복원된 민성보사 옛터는 총면적 280평방메터의 회색 단층집이였다. 실외에 세워진 가판대에는《민성보》신문 3장이 전시돼있었다.
1927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설립된 후 연변은 반제반봉건의 주요진지로 되였다. 1928년 2월, 중공만주성위는 중공당원인 주동교를 연변에 파견하여 ‘기회를 보아가며 당조직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3월, 북경향산자유원의 류건장, 조지강 등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연변에 와서 지방 당조직을 건립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8월 중공만주성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공산당 연변 최초의 당조직인 중공연변구위원회를 룡정《민성보》사에 세우면서 연변 대지에서의 첫 중국공산당 당기가 게양되였다. 이는 당의 령도하에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제반봉건투쟁이 새로운 기원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민성보사 옛터
민성보사 옛터는 룡정시교원연수학교 울안에 자리해있다. 1:1비례로 복원된 민성보사 옛터는 총면적 280평방메터의 회색 단층집이였다. 실외에 세워진 가판대에는《민성보》신문 3장이 전시돼있었다.
1927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설립된 후 연변은 반제반봉건의 주요진지로 되였다. 1928년 2월, 중공만주성위는 중공당원인 주동교를 연변에 파견하여 ‘기회를 보아가며 당조직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3월, 북경향산자유원의 류건장, 조지강 등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연변에 와서 지방 당조직을 건립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8월 중공만주성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공산당 연변 최초의 당조직인 중공연변구위원회를 룡정《민성보》사에 세우면서 연변 대지에서의 첫 중국공산당 당기가 게양되였다. 이는 당의 령도하에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제반봉건투쟁이 새로운 기원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민성보사 옛터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기념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원 연안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 제3대대이다. 항일전쟁 승리 후 항일군정대학은 중앙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전이했다. 1946년 2월, 중공중앙 동북국과 동북군정대학 본교는 화전에 제3대대의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6월, 동만분국과 동만군구의 지시에 따라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 화전군정학교, 조양천교도대, 길동군정대학 등 4개의 군정학교가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로 합병되였다. 9월에 동만분교는 연길현 룡정 동산(현 룡정4중)으로 이전하면서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개명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정확한 정치방향, 간고분투하는 사업기풍, 융통성 있는 전략전술을 확고히 하는’ 교육방침과 ‘단결, 긴장, 엄숙, 활발’의 교풍과 교훈을 계승하여 학교수업과 투쟁실천을 긴밀히 결부시키면서 선후로 4기에 걸쳐 4800여명(그중 조선족학생 2850명)의 학생을 양성했고 조남기 등 20여명의 장군과 300여명의 사단급 이상 간부를 양성함으로써 동북과 전국의 해방사업을 위해 대량의 우수한 군정간부를 육성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기념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정확한 정치방향, 간고분투하는 사업기풍, 융통성 있는 전략전술을 확고히 하는’ 교육방침과 ‘단결, 긴장, 엄숙, 활발’의 교풍과 교훈을 계승하여 학교수업과 투쟁실천을 긴밀히 결부시키면서 선후로 4기에 걸쳐 4800여명(그중 조선족학생 2850명)의 학생을 양성했고 조남기 등 20여명의 장군과 300여명의 사단급 이상 간부를 양성함으로써 동북과 전국의 해방사업을 위해 대량의 우수한 군정간부를 육성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