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3년 10월 14일에 정년퇴직하였다. 허나 퇴직한 후에도 밀렸던 편집출판 사업을 마무리하느라 3년간 눈코 뜰 새 없이 분망히 보냈다.
‘이러다간 로후생활이 엉망이 되겠구나. 어떡한담?’
고민 끝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고 취미에도 맞는 로어 학습을 계속 해보려고 작심했다.
힘들게 얻어낸 방청생 자격
2006년 8월 하순의 어느 날, 나는 무작정 연변대학 외국어학원 로어학부 학부장 사무실에 찾아갔다.
“어느 학급 학생의 학부형이신가요?” 로어학부당지부 서기가 아주 상냥하게 물었다.
“저는 이미 퇴직한 로인인데 이 학부의 방청생이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나는 애걸하다싶이 청을 들었다.
“아직 로인을 받은 전례가 없고 학원과 학교 지도부에서도 절대 비준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계속하여 간청했지만 수업시간이 됐다면서 그는 사무실을 나갔다.
첫날은 그렇게 허탕치고 말았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련속 며칠간 아침 8시에 로어학부장 사무실에 ‘출근’하여 한편으로 위생청결을 하면서 한편으로 간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8월말 아침, 내가 종전 대로 ‘출근’하였더니 지부서기가 이렇게 말을 건넸다.
“9월 3일부터 1학년 신입생들과 함께 학습하십시오. 그러나 아래 3가지는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 맨 뒤줄에 앉아야 하고 둘째,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 지각하여서는 절대 안됩니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거듭 감사를 드리며 “꼭 선생님이 말씀한 3가지 요구를 준수하겠습니다.”고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원하던 대로 연변대학 로어학부 방청생이 되였다.
‘할아버지’ 방청생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우연한 기회에 우리 선생님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나를 ‘로선생(老先生)’이라고 불렀다.
“로선생의 학습정신은 참 좋은데 끝까지 배워낼 수 있을가?”
“글쎄, 로선생은 년세가 많으니 3주일도 견지하기 어려울 거야.”
그들의 의논은 나를 더욱 분발케 하였다. 얼마 안지나 1학년 전학기 중간시험이 있었다. 참답게 복습한 데다가 명제가 간단하여 나는 97점을 맞고 학급 5등 안에 들었다. 그 뒤로 선생님과 동학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60세를 훨씬 넘어서 어찌 20세도 채 되지 않은 학급 동학들과 비기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학들의 학습성적은 매일과 같이 제고되는데 헐레벌떡 따라가느라 나는 매일매일 숨이 가빴다. 나이 앞에선 장사가 없다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때론 진한 커피 두잔을 련속 마셔도 수업시간에 달려드는 졸음을 달랠 수 없었다. 신체가 피로한 원인도 있었겠지만 주로는 과문을 잘 리해하지 못해 집중력이 떨어진 데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결심을 단단히 내렸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그날 배울 과목을 예습하였다. 확실히 효과를 보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니 졸음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이리하여 나의 학습성적은 줄곧 학급에서 중상류에 속하게 되였다.
2학년 기말시험이 끝난 뒤 나는 그만 학습을 접으려 하였다. 이 정도로 공부하면 자습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이에 선생님들은 한사코 말리면서 꼭 끝까지 견지하라고 격려하였다. 우리 학급 학생들도 “할아버지 떠나지 마세요. 저희랑 함께 졸업하자요.”라고 하면서 간곡히 청을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지도와 동학들의 부추김에 4년간 대학생활을 원만히 완수하였다.
졸업을 하던 그해, 학원 권원장이 대학 4년 학습증서를 직접 나한테 발급하였다(학습증서에 실습기간은 적지 않고 교실에서 학습한 기간만 적었다). 증서를 받아쥔 순간 자연히 눈시울이 불거졌다.
교정생활은 힘들면서도 아주 즐거웠다. 외국어를 배우고 보니 세상으로 향한 창문이 조금 더 열려진 것 같았다.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생활을 만끽할 수 있어 늘그막의 삶이 더욱 충실해진 것 같았다.
“로선생의 학습정신은 참 좋은데 끝까지 배워낼 수 있을가?”
“글쎄, 로선생은 년세가 많으니 3주일도 견지하기 어려울 거야.”
그들의 의논은 나를 더욱 분발케 하였다. 얼마 안지나 1학년 전학기 중간시험이 있었다. 참답게 복습한 데다가 명제가 간단하여 나는 97점을 맞고 학급 5등 안에 들었다. 그 뒤로 선생님과 동학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60세를 훨씬 넘어서 어찌 20세도 채 되지 않은 학급 동학들과 비기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학들의 학습성적은 매일과 같이 제고되는데 헐레벌떡 따라가느라 나는 매일매일 숨이 가빴다. 나이 앞에선 장사가 없다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때론 진한 커피 두잔을 련속 마셔도 수업시간에 달려드는 졸음을 달랠 수 없었다. 신체가 피로한 원인도 있었겠지만 주로는 과문을 잘 리해하지 못해 집중력이 떨어진 데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결심을 단단히 내렸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그날 배울 과목을 예습하였다. 확실히 효과를 보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니 졸음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이리하여 나의 학습성적은 줄곧 학급에서 중상류에 속하게 되였다.
2학년 기말시험이 끝난 뒤 나는 그만 학습을 접으려 하였다. 이 정도로 공부하면 자습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이에 선생님들은 한사코 말리면서 꼭 끝까지 견지하라고 격려하였다. 우리 학급 학생들도 “할아버지 떠나지 마세요. 저희랑 함께 졸업하자요.”라고 하면서 간곡히 청을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지도와 동학들의 부추김에 4년간 대학생활을 원만히 완수하였다.
졸업을 하던 그해, 학원 권원장이 대학 4년 학습증서를 직접 나한테 발급하였다(학습증서에 실습기간은 적지 않고 교실에서 학습한 기간만 적었다). 증서를 받아쥔 순간 자연히 눈시울이 불거졌다.
교정생활은 힘들면서도 아주 즐거웠다. 외국어를 배우고 보니 세상으로 향한 창문이 조금 더 열려진 것 같았다.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생활을 만끽할 수 있어 늘그막의 삶이 더욱 충실해진 것 같았다.
추억에 남은 일들…
우리 반 로씨야선생님 세르게이는 키가 엄청 크고 수염이 더부룩하며 대머리인 50대 남성이였다. 그는 사우나를 무척 즐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우나는 극동지구 로씨야인의 일상생활에서 필수라고 한다. 나는 한달에 한번씩 그와 함께 사우나방에 다녀오군 했다. 그때면 그는 너무도 좋아서 싱글벙글해하였다. 사우나방에서 우리 둘은 서로 때밀이도 하고 물장난도 하였다. 비록 문화는 다른 점이 많았지만 사람과 사람지간에 진심어린 정을 나누는 데는 막힘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수업시간과 시험을 칠 때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2학년 기중시험이였을 때이다. 시험문제를 제비 뽑은 다음 10분간 준비하고 5분간 구두시험을 쳐야 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준비를 마치고 5분간 열변을 토하였는데 그는 머리를 숙이고 필기장에 무엇인가 적기만 했다. 답변이 끝나자 그는 나에게 7.5점(10점 만점)을 주었다. 나는 억울해서 왜 이렇게 낮게 주는가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의 필기장을 보여주었다. 그 기록을 보니 어떤 문제에서는 0.1점을 깎고 어떤 문제에서는 0.5점을 깎았으며 밑에 평어도 적혀있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말 진지하고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010년 6월 30일, 화창한 여름날에 우리는 졸업사진을 찍었다. 나는 너무 기뻐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집을 나섰다. 우리 학원 보도원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학생이 어찌 이런 복장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어요.”라고 하면서 나에게 학사복을 입히고 학사모를 씌워주었다. 더워서 땀벌창이 되였으나 청춘을 되찾은 것 같은 심정이여서 입이 두 귀에 가 걸릴 번하였다.
그때 외국어학원에는 일어, 영어, 로어 3개 학부가 있었는데 당해 졸업생이 150여명이나 되였다. 나는 남자라고 제일 뒤로부터 두번째 줄에 섰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앞이 아찔해났다. 우리 반 남학생 여섯은 나의 안전을 고려하여 호위병마냥 내 뒤줄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인생 70 고개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인 나는 남학생이라고 학생들 속에 서 있는데 그 딸애는 학원 지도자, 로교수들과 함께 앞줄에 앉아있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집하는 순간이였다.
가끔 이 졸업사진을 꺼내 보노라면 참으로 감개무량해진다. 사진 속의 늙은이도 마치 20대 새파란 청춘으로 되돌아간 듯, 청춘기백이 찰찰 넘치는 애들과 함께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4년간의 학습생활에서 귀여운 동학들은 나를 가족으로, 친구로, 동창생으로 간주해줬다. 졸업할 때 나보고 부디 건강장수하고 10년 지어 20년 뒤에 동창모임을 가질 때까지 핸드폰번호도 바꾸지 말고 총련락관이 되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오냐, 이 할아버지동창생은 훌륭한 정보련락관이 되여 너희들의 희소식을 학수고대하겠다!
그러나 수업시간과 시험을 칠 때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2학년 기중시험이였을 때이다. 시험문제를 제비 뽑은 다음 10분간 준비하고 5분간 구두시험을 쳐야 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준비를 마치고 5분간 열변을 토하였는데 그는 머리를 숙이고 필기장에 무엇인가 적기만 했다. 답변이 끝나자 그는 나에게 7.5점(10점 만점)을 주었다. 나는 억울해서 왜 이렇게 낮게 주는가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의 필기장을 보여주었다. 그 기록을 보니 어떤 문제에서는 0.1점을 깎고 어떤 문제에서는 0.5점을 깎았으며 밑에 평어도 적혀있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말 진지하고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010년 6월 30일, 화창한 여름날에 우리는 졸업사진을 찍었다. 나는 너무 기뻐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집을 나섰다. 우리 학원 보도원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학생이 어찌 이런 복장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어요.”라고 하면서 나에게 학사복을 입히고 학사모를 씌워주었다. 더워서 땀벌창이 되였으나 청춘을 되찾은 것 같은 심정이여서 입이 두 귀에 가 걸릴 번하였다.
그때 외국어학원에는 일어, 영어, 로어 3개 학부가 있었는데 당해 졸업생이 150여명이나 되였다. 나는 남자라고 제일 뒤로부터 두번째 줄에 섰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앞이 아찔해났다. 우리 반 남학생 여섯은 나의 안전을 고려하여 호위병마냥 내 뒤줄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인생 70 고개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인 나는 남학생이라고 학생들 속에 서 있는데 그 딸애는 학원 지도자, 로교수들과 함께 앞줄에 앉아있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집하는 순간이였다.
가끔 이 졸업사진을 꺼내 보노라면 참으로 감개무량해진다. 사진 속의 늙은이도 마치 20대 새파란 청춘으로 되돌아간 듯, 청춘기백이 찰찰 넘치는 애들과 함께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4년간의 학습생활에서 귀여운 동학들은 나를 가족으로, 친구로, 동창생으로 간주해줬다. 졸업할 때 나보고 부디 건강장수하고 10년 지어 20년 뒤에 동창모임을 가질 때까지 핸드폰번호도 바꾸지 말고 총련락관이 되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오냐, 이 할아버지동창생은 훌륭한 정보련락관이 되여 너희들의 희소식을 학수고대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