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간마을에서 태여났다. 그때 인민공사 시절에는 천을 사거나 쌀을 살 때면 배급표를 들고 가서 사야 했고 벽에 바른 신문지가 집집마다의 특색이였다. 우리 집 벽에는 거울 하나가 걸려있었는데 거울 옆에는 액자로 된 가족사진이 걸려있었고 남은 공간에는 크고 작은 상장들이 빼곡이 붙어있었다. 아버지 것도 있었고 형님들 것도 있었다. 이웃들은 늘 우리 가족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이 훌륭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항상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꼈다. 당시 대대간부는 부대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당원군인이였는데 빛바랜 록색 군복을 입고 바지가랑이를 걷어붙인 채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소학교를 다닐 때였다. 어느 날 방과후 집에 막 들어섰는데 락화생 튀김과 두부볶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님이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잔치날일가?’라고 의아해있는 나에게 큰 형님이 으쓱해하며 말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 7월 1일은 우리 당의 생일이고 나의 생일날이기도 하지.” 지금도 그날 흐뭇해하고 대견해하던 아버지, 어머니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의 생일은 이렇게 나의 마음속에 간직되였고 그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 가득차 올랐으며 나도 언젠가는 꼭 당의 생일을 보낼 수 있기를 꿈꾸게 되였다.
매번 학교에서 가정상황표를 작성할 때면 나는 큰 형님의 정치면모란에 ‘중국공산당 당원’이라고 또박또박 정연하게 적어넣었는데 그때의 자부심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림업국에 출근하던 큰 형님은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저녁 늦게 돌아오며 로고를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사업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에 대한 나의 인식은 차츰 뚜렷해졌고 공산당원이 되고 싶은 소망도 천천히 싹이 트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고중을 졸업한 후 가정형편이 어려운 원인으로 나는 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공사의 일원이 된 나는 문학창작에 뛰여들었다. 나는 대량의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이 깊게 읽었던 책은 로홍군, 로팔로군의 회고록을 담은《붉은 기발 휘날리며》였다. 그 책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중국인민지원군 ‘얼음조각련’의 이야기를 읽었고 그들처럼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해 21살이였던 나는 대대당지부에 첫 입당신청서를 제출했다.
나의 고향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있고 한면이 산을 기대고 있었는데 어느 해 여름 홍수가 졌다. 나는 대대간부들과 함께 고향사람들을 조직해 남산으로 대피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을 때 로서기는 다리가 불편한 모만리가 대피대오에 없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자진해서 마을로 돌아가 모만리를 업고 나왔다. 로서기는 “관건적인 시각에 용감하게 나서다니, 당원이 되기에 충분하구나.”라고 흐뭇해했다.
1987년 7월 14일, 나는 영광스러운 공산당원이 되였다. 그해 나는 25세였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당기 앞에서 선서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격동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선서가 끝난 뒤 로서기는 나의 손을 잡고 “우리 마을에서 자랑스러운 공산당원이 한명 늘었구나. 오늘부터 공산당원임을 시시각각 잊지 말고 공산당원의 사명을 시시각각 아로새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 높은 표준으로 스스로를 엄격히 요구하고 공산당원의 선봉모범 역할을 발휘해 당과 인민을 위해 기여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다년간 당조직의 교양과 양성하에 나는 기자의 신분으로 뛰여보고 당사무 사업일군으로 일해봤으며 성급 작가로 성장했다. 나는 도서《진한장장군전》편찬에 참가하고 드라마《충렬 대가군》극본 창작을 완성했으며 신문, 잡지에 백만자에 가까운 글을 발표하면서 홍색문화를 고양하는 데 힘을 이바지했다. 어떤 일터에 있든 나는 그때 로서기가 했던 당부를 저버리지 않고 근면하게 사업했다.
올해로 나는 36년의 당년한을 가진 당원이 되였다. 평화시대에 입당을 선택하는 것은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말이 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하기로 선택한 이상 나는 반드시 신념을 확고히 하고 초심을 지키며 당에 대한 열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변함없이 유지해나갈 것이다.
(필자는 돈화시 단강가두 림봉사회구역 퇴직당원)
소학교를 다닐 때였다. 어느 날 방과후 집에 막 들어섰는데 락화생 튀김과 두부볶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님이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잔치날일가?’라고 의아해있는 나에게 큰 형님이 으쓱해하며 말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 7월 1일은 우리 당의 생일이고 나의 생일날이기도 하지.” 지금도 그날 흐뭇해하고 대견해하던 아버지, 어머니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의 생일은 이렇게 나의 마음속에 간직되였고 그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 가득차 올랐으며 나도 언젠가는 꼭 당의 생일을 보낼 수 있기를 꿈꾸게 되였다.
매번 학교에서 가정상황표를 작성할 때면 나는 큰 형님의 정치면모란에 ‘중국공산당 당원’이라고 또박또박 정연하게 적어넣었는데 그때의 자부심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림업국에 출근하던 큰 형님은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저녁 늦게 돌아오며 로고를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사업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에 대한 나의 인식은 차츰 뚜렷해졌고 공산당원이 되고 싶은 소망도 천천히 싹이 트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고중을 졸업한 후 가정형편이 어려운 원인으로 나는 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공사의 일원이 된 나는 문학창작에 뛰여들었다. 나는 대량의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이 깊게 읽었던 책은 로홍군, 로팔로군의 회고록을 담은《붉은 기발 휘날리며》였다. 그 책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중국인민지원군 ‘얼음조각련’의 이야기를 읽었고 그들처럼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해 21살이였던 나는 대대당지부에 첫 입당신청서를 제출했다.
나의 고향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있고 한면이 산을 기대고 있었는데 어느 해 여름 홍수가 졌다. 나는 대대간부들과 함께 고향사람들을 조직해 남산으로 대피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을 때 로서기는 다리가 불편한 모만리가 대피대오에 없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자진해서 마을로 돌아가 모만리를 업고 나왔다. 로서기는 “관건적인 시각에 용감하게 나서다니, 당원이 되기에 충분하구나.”라고 흐뭇해했다.
1987년 7월 14일, 나는 영광스러운 공산당원이 되였다. 그해 나는 25세였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당기 앞에서 선서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격동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선서가 끝난 뒤 로서기는 나의 손을 잡고 “우리 마을에서 자랑스러운 공산당원이 한명 늘었구나. 오늘부터 공산당원임을 시시각각 잊지 말고 공산당원의 사명을 시시각각 아로새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 높은 표준으로 스스로를 엄격히 요구하고 공산당원의 선봉모범 역할을 발휘해 당과 인민을 위해 기여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다년간 당조직의 교양과 양성하에 나는 기자의 신분으로 뛰여보고 당사무 사업일군으로 일해봤으며 성급 작가로 성장했다. 나는 도서《진한장장군전》편찬에 참가하고 드라마《충렬 대가군》극본 창작을 완성했으며 신문, 잡지에 백만자에 가까운 글을 발표하면서 홍색문화를 고양하는 데 힘을 이바지했다. 어떤 일터에 있든 나는 그때 로서기가 했던 당부를 저버리지 않고 근면하게 사업했다.
올해로 나는 36년의 당년한을 가진 당원이 되였다. 평화시대에 입당을 선택하는 것은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말이 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하기로 선택한 이상 나는 반드시 신념을 확고히 하고 초심을 지키며 당에 대한 열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변함없이 유지해나갈 것이다.
(필자는 돈화시 단강가두 림봉사회구역 퇴직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