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가 70여년 전에 쓴 재난소설 <페스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재난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바로 스쳐가는 악몽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재난은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까뮈는 인간과 온역의 공존관계를 현실적인 위험으로 첨예하게 정리하고 온역에 대한 인간의 인식 한계를 꼬집으면서 온역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항상 어딘가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 메시지를 날린다.
유럽을 초토화시키며 2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흑사병)’가 발생하여 몇세기가 흘렀으나 오늘날 재난에 대한 인간들의 생각은 크게 변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온역(바이러스) 재난으로 얼룩진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면 대체로 인간은 무방비상태에서 당해오다가 온역(바이러스)이 잠시 자취를 감추고 숨어버리자 완전멸망으로 착각하면서 ‘재난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바로 스쳐가는 악몽쯤으로 생각하는’ 실책을 반복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와 같은 실책이 결국 온역(바이러스)의 재역습으로 부활하면서 인간비극의 반등(反弹)을 초래하도록 한 것이 아닐가?
온역(바이러스)이라는 ‘적’은 시종 잠복형인데 반해 인간은 시종 로출형으로서 ‘적’의 돌발적인 기습에 피동적인 방어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비극은 수천년을 지속해왔으나 지금까지 ‘기습’과 ‘방어’의 갑을구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모든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는 만능백신이 개발되지 못한 현실에서 인간에 대한 바이러스의 ‘갑’질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우리 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공화국 사상 초유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페염의 감염경로는 17년 전 사스(SARS)의 감염경로와 너무 흡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는 똑같은 성격의 피해를 반복해야 하는 인식 한계와 더불어 바이러스와의 장기공존 국면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사건은 발생하는 게 아니라 초래되는 것이다. 모두 그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연계에서 인간은 더없이 무력한 존재이다.
“인간은 갈대, 즉 자연에서 가장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파스칼
인간의 생각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될 때 자연은 수용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자연은 가차없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린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온역(바이러스) 감염의 대부분이 동물 왕국에서 발원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자연계에는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다. 동물세계는 인간세상보다 더 오랜 력사를 갖고 있다. 페스트, 조류인플루엔자, 돼지인플루엔자, 에볼라바이러스, 메르스바이러스 그리고 사스바이러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모두 인간과 동물의 불협화음에서 유발된 것임을 우리는 인식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촌 포유동물 바이러스는 천여종을 훨씬 릉가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만도 백여종이 넘어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인간에게 감염피해를 준 바이러스는 고작 ‘빙산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오늘까지는 천산갑, 너구리, 삵, 박쥐일 뿐이지만 래일은 또 어떤 동물이 공포의 대상이 될는지… 천여종의 동물바이러스가 언제 어떤 형태로 인간을 괴롭힐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바이러스 감염은 통행제한이 없다. 어디든 맞춤한 중간숙주(宿主)만 있으면 침투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야생동물 교역과 도륙이 절제되지 못한 지역, 특히는 비위생적인 생활공간과 생태파괴로 변질된 야생동물 서식환경 그리고 인간들의 취약한 의지와 작태는 모두 바이러스 감염의 최적 과녁이 된다는 점도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의 대결에서 통감하고 있는바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유론리에 따른 그 어떤 생태 훼손과 파괴를 좌시하고만 있지 않으며 인간의 그 어떤 합리적인 변명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기다 바이러스 재난 확산이 풍막차, 말과 범선 등 교통도구에 의해 몇년의 시간을 거쳐야 가능했던 19세기와 달리 오늘날은 글로벌 련통(连通)의 ‘고속시대’와 함께 한다는 게 문제다. 이번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4주라는 짧은 시간에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을 감염시키지 않았던가?
신종 바이러스는 ‘스쳐가는 악몽’이 아니라 인간과 장기공존하는 천적임을 인식하고 지구전에 대비한 우리의 한계와 깨달음을 리성화 시각에서 보완해야 한다.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 패하며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언제나 패하고 만다.” 손자병법의 이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보아내고 바이러스라는 이 ‘적’과의 장기공존 대치국면에서 인간의 전략을 완벽화하는 것이야말로 ̒지피지기 백전백승̓의 유일한 활로이다. 이번에 우리 나라가 무한을 살리고 중국을 지켜내며 지구촌으로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장사가 팔목을 자르는(壮士断腕)” 비장한 결단 즉 슈퍼 격리전략은 ‘적’의 침투경로를 파악한 토대에서 기획된 ‘지피지기’의 전민전쟁이다. 960만평방킬로메터 국토에서의 ‘예방통제’를 14억이 동참한 ‘전면격리’ 대안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이 거사, 사회주의 중국만이 펼쳐낼 수 있는 큰 그림에 국제보건기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멋진 그림이 보여주는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인민전쟁이 승리로 이어질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바이러스와의 장기공존, 장기전쟁 과정에 있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17년 전의 사스와의 전쟁과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장기공존의 큰 틀에서 이 전쟁의 ‘예방통제’와 ‘격리’의 주역인 우리 인간자신을 자성해봐야 한다. 사스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천백년 내려오던 우리의 고질화된 비속한 습관을 격중하였고 고루한 생활방식의 치부를 강타하였다. 늘 문제시 되여왔던 금이 가고 비뚤어진 우리의 공중도덕 의식과 보건위생 의식이 바이러스를 불러온 것임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두차례 우리 나라 국토에서 벌어진 초연이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 대신 전대미문의 생사의 벼랑에서 우리 사회 공중도덕의 재건, 타인을 존중하는 사회적 책임감의 육성, 사회관리 통제능력과 공중생활 품질의 향상에 대한 절박감을 뼈저리게 통감하였는바 이것은 신종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의외의 청정제라고 할 수 있다.
“무한 힘내라!”, “중국 힘내라!”, 중국 전역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이 격려의 웨침에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힘내라는 뜻이 내포됐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태의식, 도덕의식, 보건의식, 공중의식 재건에서 힘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봐야 한다.
연변은 바이러스 ‘무풍지대’가 아니다. 이번 바이러스 급습에 연변도 방어망이 뚫리지 않았던가? 하늘길, 바다길, 땅길이 전방위적으로 열린 ‘고속시대’를 영위해가는 연변은 이제 페쇄된 변강오지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는 대외개방의 전초기지에서 신종 바이러스와의 장기공존에 대치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민족대류동의 거센 흐름에 로출돼있는 연변은 신종 바이러스가 노리는 주요한 과녁이 될 수도 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무한상륙에 대비해 연변도 자기진맥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만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예고없이 우리 고장을 급습했을 때 우리는 과연 능란하게 대응할 수 있을가? 우리 조선족 민중들은 과연 성숙된 자세로 타민족과 함께 ‘도시봉쇄’, ‘전면격리’의 준엄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
연변이 그 어떤 바이러스의 침투에도 무난하게 대처하는 관건은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적시적으로 보완하면서 바이러스와의 장기공존에 맞물리는 리성적인 자세를 갖춰나가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거쳐 새롭게 부각될 내 고향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