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1서기 신광훈(30세)은 젊은 패기와 근성으로 빈곤해탈 난관공략 마지막 1킬로메터를 질주하고 있다.
2016년, 상해대학을 졸업한 신광훈은 우리 주의 인재영입 프로젝트를 통해 주빈곤부축판공실에 배치받았다. 3년 남짓 기관에서 사업을 해오다가 지난해 4월, 그는 조직의 중임을 떠안고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에 파견되여 제1서기직을 맡고 본격적으로 빈곤해탈 최전방에 투입되였다.
화룡시 시가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부흥촌은 류동인구가 많은 관계로 과거 위생환경이 비교적 차했다. 포장도로가 없었던 부흥촌은 개인 날이면 오고 가는 차들로 먼지를, 비 내리는 날이면 흙탕물을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2015년말, 빈곤층부축 도급단위인 화룡시주택및도시농촌건설국에서 부흥촌에 빈곤해탈 난관공략전 지휘부를 설립하고 농촌 거주환경 개선에 주력하면서부터 부흥촌의 촌면모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화룡시주택및도시농촌건설국의 도움하에 오늘날 부흥촌은 포장도로, 가로등 등 기초시설을 완벽히 갖추고 산뜻한 모습으로 일신되였습니다.” 신광훈은 지금 부흥촌의 탈바꿈은 화룡시주택및도시농촌건설국과 촌주재 간부들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대학기간 저는 부대에 지원하여 2년간의 군인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때의 경력이 지금 기층에 내려와 빈곤부축 사업을 전개하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군인생활을 통해 신광훈은 어려움 앞에서 굴하지 않는 근성을 키웠다. 줄곧 도시에서 살아왔던 터라 농촌생활이 불편할 법도 했지만 그는 인차 적응해나갔다.
몇년 동안 해왔던 일이라 그의 기층사업은 생각처럼 쉽게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직접 기층에 내려와서 배운 것이 더 인상 깊다고 말하는 그였다. “금방 촌에 입주하면서 제 자신의 경력을 믿고 모든 사업을 잘 이끌어나갈 거라고 자신만만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빈곤부축판공실에서 일하던 경험이 있어 빈곤부축 관련 정책에 대해 잘 알고 기층에도 자주 내려가 현지답사도 했기에 농촌의 실정에 대해 잘 료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 자신에 대한 기대도 느껴졌지만 기대와는 달리 막막한 현실도 마주쳐보았다. “실제로 기층에 내려와 보니 정책연구는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와 결부해야 된다는 것을 감명 깊게 느꼈습니다. 좋은 정책이 있어도 촌의 실제와 맞지 않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이 다반수였구요.”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락심하지 않고 촌간부들을 찾아다니며 허심하게 배웠고 촌민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구체적인 해결책을 연구하였다. 한편 빈곤부축판공실의 우세를 리용하여 많은 자료와 전형사례를 찾아보면서 촌민들에게 가장 적합한 산업을 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흥촌의 대부분 젊은이들은 외지로 나가 로령화가 심각합니다. 땅이 있어도 부치기가 힘들고 전문기술이 부족하여 산업을 전개하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여 촌간부들과 연구하여 기존의 화훼(花卉)산업을 발전시켜 촌민들이 주식에 가입하고 기업에서 촌민들에게 리익배당금을 배급하는 방식으로 촌민들의 수입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2018년 부흥촌은 연변연화림목원예개발회사와 손잡고 총 600만원을 들여 농흥원 1기 화훼대상을 건설했다. 6000평방메터 되는 부지면적에 일떠서 있는 하우스 생화 재배기지내에는 공작초, 백일초, 기관화 등 15가지 품종의 꽃들이 활짝 피여있었다. 화훼대상은 안정성이 높고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로령화가 심한 부흥촌의 실정에도 부합된다. 신광훈은 올해 화훼대상을 확대하여 빈곤해탈 성과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생활면에서 많은 개변을 가져왔수다. 수도물이 잘 안 나오는 문제도 해결해주었고 가로등도 새로 세웠으며 길도 새로 수리해주었지…” 정책설명이며 생활상 어려운 점들을 바로바로 이야기 나누고 고민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신광훈의 도래에 누구보다 더 반가웠던 것은 나이 드신 마을의 어르신분들이였다. “신서기는 어려도 든든합니다. 제가 병으로 앓고 있을 때에도 우리 집에 찾아와 병문안도 하고 아무 의탁이 없는 저한테 환경미화원으로 일자리도 배치해주어 매달 600원의 수입이 나와서 용돈으로 넉넉하지… 그외에 화훼대상도 해마다 2000여원의 수입이 나옵니다.” 리종후(74세) 로인처럼 아직 로력이 있는 빈곤호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는 일도 빈곤층부축을 유지하는 데 큰 작용을 한다고 신광훈은 설명했다.
그는 산업대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당건설을 억세게 틀어쥐였다. “기층 당조직 강화는 제1서기의 제1직책입니다. 기층 당조직이 탄탄해져야만이 군중들을 이끌어 치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신광훈은 조선족 당원이 많고 나이든 당원들이 많아 한어말 문건을 리해하기 어려워하는 상황에 비추어 해당 부문과 소통하여 조선말 학습자료를 얻어왔고 당원들을 이끌고 함께 학습했다.
“제1서기의 역할이 참 크다고 봅니다. 당건설을 틀어쥐고 촌서기를 협조하여 기층 당조직을 강화하였고 당원들과 촌민들의 결합력을 많이 이끌어주었습니다. 주빈곤부축판공실에서 일하던 경험이 있어 빈곤층부축 정책에 대한 정확한 해독과 부흥촌의 홍보선전에도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큰 병으로 앓아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시종 마을을 잊지 않고 전화로 소통하면서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촌주재 파견간부인 화룡시주택및도시농촌건설국 지휘통신과 과장 강호는 신광훈에 대해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초에 긴장하게 진행되였던 전염병 예방, 통제 긴급상황에서 신광훈은 설명절을 포기하고 초사흘부터 촌간부들과 함께 전염병 예방, 통제 제1선에 나섰다. 촌민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선전용지를 발급하고 외지인원에 대한 통계 및 공공장소에 대한 소독, 통행증 발급, 방역물자 분배, 쓰레기 정리 등 작업을 전개했다. 저녁에는 정세 변화에 따라 전염병 예방, 통제 사업 방안을 내오고 환경위생 정돈조치를 연구, 제정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
전염병 발생기간이라지만 마을주민들의 일상생활 수요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30여명의 촌민들을 위해 개인용 휴대전화로 의료보험료, 전기료금, 전화료금 등을 납부하여 촌민들의 외부 접촉 위험을 감소시켰다. 주변마을로 통하는 주간선이 부흥촌으로 통했던 터라 하루에 600~700대나 되는 차량의 등록 작업으로 24시간 쉴 시간이 없이 돌아쳐야만 했다. “시간대를 나누어 밤을 새가며 마을 길목을 지켰는데 제대로 쉬지 못해 책상에 엎드려 잠간 졸고 계시는 촌간부들을 보면 참 안스러웠습니다. 기층에도 많은 젊은 간부들이 많이 필요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기관일군에서 기층간부의 신분전환을 통해 신광훈은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들을 느꼈다. “기관에서는 정책을 제정하고 기층에서는 정책을 시달해야 합니다. 기층에 내려와 단련을 받으니 더욱 성숙된 것 같습니다. 촌민들과 소통하면서 기층의 실제정황을 제대로 료해하게 되였습니다. 향후 촌민들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할 겁니다. 촌민들이 부유하고 마을이 흥성한 부흥촌으로 만들겠습니다.” 신광훈의 자신 있는 말처럼 더욱 밝아질 부흥촌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