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광
(1899-1933)
조선족, 화룡현 사람. 1930년,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하고 같은 해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2년 6월, 중공훈춘현위 서기로 임명됐다. 중공훈춘현위는 그의 령도하에 연통라자와 대황구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했다. 1933년 6월, 항일통일전선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삼도구 마영툰에서 구국군을 위문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일본괴뢰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희생됐다. (2020년 퇴역군인사무부에서 공포한 제3패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조선 함경북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서광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피해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토산자로 이주했다. 1919년, 그는 룡정대성중학교에 입학하고 1930년 5월, ‘붉은 5월 투쟁’에 적극 뛰여들었다. 같은 해 6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6월, 중공동만특위는 서광을 중공훈춘현위 서기로 임명했다. 그는 부임한 후 항일유격대오를 확충하는 사업을 우선적으로 틀어쥐였다. 서광은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 10여명 유격대원을 거느리고 반석향 남진맹 무장자위단을 습격하고 10여자루의 보총을 로획했다.
7월, 그는 연통라자에서 당의 사업을 펼쳤다. 현지 군중들은 늘 적들의 ‘토벌’을 받아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이를 료해한 그는 인차 훈춘현당위 성원들을 조직해 회의를 소집하고 반석향 장륙구에 위치한 일본인의 묵축회사 목장을 습격, 60마리 소를 연통라자에 남겨놓고 춘화에서 100마리 소를 포목, 소금 등 물품과 바꾼 후 연통라자 현지 군중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그들의 생활곤난을 해결해주었다. 같은 해 9월, 중공훈춘현위는 각 지역에 분산되여있던 무장대오를 훈춘현 령남(연통라자), 령북(대황구) 유격대로 통일 편성했다.
1932년 가을, 동만특위는 항일유격투쟁의 새로운 형세에 근거해 각 지역에서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고 공고히 할 것을 호소했다. 서광과 기타 현당위 성원들은 간고한 노력을 거쳐 대황구, 연통라자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했다. 두 지역은 혁명사업을 비교적 일찍 전개한 지역으로 군중토대가 좋으며 산이 높고 수림이 무성하며 골짜기가 종횡으로 뻗어있어 유격전을 펼치기 매우 유리했다. 서광은 혁명군중들을 령도해 근거지에서 쏘베트정부를 설립했다. 이로 인해 인민이 주인이 되고 유격대를 지원하며 가는 곳마다 적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1933년 4월, 투쟁형세에 따라 중공훈춘현위는 령남, 령북 유격대를 기본력량으로 훈춘현유격총대를 통일 편성했다.
1933년 6월, 중공중앙은 ‘1.26지휘편지’를 동만에 전달하고 동북에 반일통일전선을 건립할 데 대한 방침을 제기했다. 이는 서광과 현당위 성원들의 높은 중시를 일으켰다. 당시 훈춘현 경내에는 동북군의 3개 영이 주둔해있었는데 서광은 우수한 당원간부들을 통일전선 사업을 하도록 동북군에 파견했다. 훈춘현당위는 마적달소학교 운동장에서 2000여명이 참가한 민병련합대회를 소집했다. 서광은 대회에서 항일구국의 의의를 선전하고 군민이 일치단결해 함께 항일하고 함께 일본침략자들을 쫓아낼 것을 호소했다. 서광은 근거지 군중과 아동들로 이루어진 위문대를 거느리고 삼도구 마영툰의 구국군을 찾아 위문공연을 했다. 위문활동이 끝난 후 위문대는 마영툰과 1리 떨어진 설대산 유격대가 머무는 숙소로 갔다. 그들이 잠든 사이 마적달(马滴达)에 주둔한 적군이 밤을 타 그들을 습격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서광은 한조의 대원들을 거느리고 기타 동지들을 엄호하면서 포위를 뚫고 나갔다. 그는 적들을 유인하도록 대원들을 지휘해 화력이 그들 방향으로 집중되게 했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대부분 동지들이 포위를 뚫고 나갔지만 서광의 대오는 적들에게 포위되였고 그는 장렬히 희생됐다.
7
리용국
(1904-1933)
조선족, 연길현 사람.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공청단연화중심현위 서기, 공청단동만특위 서기를 력임했다. 1932년, 중공왕청현위 서기로 임명된 후 전 현의 ‘춘황투쟁’을 령도하고 소왕청, 요영구, 하마탕, 라자구 등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했다. 그는 또 사수평쏘베트정부, 소왕청쏘베트정부와 하마탕, 요영구 혁명위원회를 건립했다.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 한동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리용국은 1915년,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봉림동촌으로 이주했다. 1922년부터 선후하여 룡정현은진중학교, 룡정동흥중학교에 입학하고 진보단체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했으며 1925년 12월 동흥중학교를 졸업한 후 룡정일대에서 학생혁명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러나 반동통치자들의 잔혹한 진압에 리용국 등은 핍박에 의해 쏘련 연해주로 전이했다. 1926년 여름, 훈춘에 돌아온 그는 1927년 봄에 안해와 동학들과 함께 동만 연길현 봉림동에 사립대동학교를 설립하고 야간학교와 정치강습소를 꾸려 전 촌 군중들에게 혁명사상을 적극 전파했다. 그의 교양과 인도하에 봉림동 및 주변 촌의 녀성들도 륙속 야간학교의 학습에 참가했다.
1930년 6월, 리용국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입당 후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중공봉림동지부를 설립했다. 같은 해 9월말, 중공연화중심현위는 공청단연화현위로 되였고 리용국을 공청단연화현위 서기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공청단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1년 ‘9.18’사변 후 일본제국주의는 왕청현 경내에서 량식과 생활필수품을 위주로 하는 ‘배급제’와 ‘출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인민들을 잔혹하게 압박하고 착취했다. 리용국은 가야하지역에서 중공왕청현 사수평구위를 령도해 기세 드높은 ‘추수투쟁’을 벌였다. 현당위와 구당위의 지시에 따라 그는 1000여명 빈곤농민들을 소집해 영창동 성남에서 대회를 소집했다. 회의 후 분노한 군중들은 대렬을 지어 배초구 위현정부로 향했고 연도에서 “지주의 압박과 착취를 반대하자!”, “소작료감소를 실시하라!” 등 구호를 높이 웨쳤다. 이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혁명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틀 동안 지속된 시위행진은 일부 지주들은 핍박에 못 이겨 농민들의 소작료감소 요구를 들어주고 도급맡은 토지에 대해 ‘4:6’, ‘3:7’ 분할제를 실시했다.
1932년 봄, 리용국은 중공왕청현위 군사부에 배치받고 유격대, 적위대와 리광별동대(왕덕림이 령도하는 구국군별동대) 등 무장력량을 통일 령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얼마 후 조직에서는 그를 중공왕청현위 서기로 임명했다. 임직 후, 그는 인차 룡반구에서 전 현의 ‘춘황투쟁’을 령도했다. 같은 해 4월초, 일본침략군은 농촌에 대한 ‘대토벌’을 다그쳤는데 왕청현 15개 촌당지부와 많은 혁명군중단체가 파괴되였다. 항일투쟁을 견지하기 위해 리용국은 현당위 간부와 유격대를 거느리고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했다. 9월, 투쟁형세의 수요에 근거해 리용국은 기존의 왕청현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를 현반일회로 합병, 설립하고 소왕청, 가야하, 요영구, 하마탕, 라자구와 사수평 등 지역에서 항일유격근거지를 설립했다. 12월, 피타는 노력을 거쳐 사수평쏘베트정부를 설립하고 뒤이어 소왕청쏘베트인민정부와 하마탕, 요영구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쏘베트인민정부와 혁명위원회는 위정부가 반포한 법령을 페지하고 일본침략자와 친일분자의 토지, 가옥과 재산을 몰수했으며 각종 가렴잡세를 페지했다. 1933년 11월, 그는 소왕청유격구 마촌 리수구에서 살해되였다. 1986년, 국가민정부에서는 리용국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를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8
최상동
(1901-1933)
조선족, 별명은 ‘레마크’이고 1910년 로씨야 연해주에서 출생했다. 쏘련 국내전쟁이 결속된 후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주했다. 1930년 여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1년 여름, 중공화룡현 평강구위 서기로 임명됐으며 군중들을 령도해 ‘춘황투쟁’을 펼쳤다. 1932년 5월, 중공화룡현위 서기로 임명되고 화룡현 반일유격대를 건립했으며 유격대를 거느리고 적들의 3차례 되는 ‘토벌’을 짓부셨으며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1933년 2월 일본괴뢰군 어랑촌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반격하는 작전에서 희생됐다.
최상동은 ‘10월혁명’의 고향에서 태여나 어릴 적부터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19년, 최상동은 진보 청년들과 함께 쏘베트인민의 제국주의 무장간섭을 반대하고 국내 반혁명반란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단련을 받았다.
쏘련의 국내전쟁이 결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상동은 안해와 한돌이 안된 아이와 작별하고 안정록과 함께 연해주를 떠나 화룡현 평강일대에서 농민군중에게 ‘10월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1930년 5월, 최상동은 ‘붉은 5월 투쟁’에 뛰여들었고 그해 여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8월, 최상동은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야간학교를 설립하고 전단지와 구호를 붙이고 살포하는 등 형식으로 군중들에게 혁명을 선전하고 농민폭동을 조직했다. 1931년 여름, 최상동은 중공평강구위 서기로 임명됐다. 그는 신속히 당원, 단원을 촌툰에 심입시키고 당조직을 회복, 재건했다. 그는 공청단, 농민협회, 반제동맹회, 부녀회, 소선대와 혁명호제회 등 군중반일조직을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광범하게 군중을 동원하고 중국공산당의 주위에 단결시켜 일본침략자와 국내 봉건통치세력을 함께 반대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했다. ‘9.18’사변이 폭발한 후 최상동은 구당위 기관을 령도해 유격투쟁을 전개하고 구농민적위대를 건립함으로써 농민항일무장대오의 력량을 확대했다.
1932년 3월, ‘춘황투쟁’이 시작되고 그는 구당위 간부를 거느리고 농민군중들을 찾아 발동, 조직 사업을 펼쳤다. 그는 농민들을 조직해 지주로부터 량식을 요구했고 구적위대를 령도해 현지 량식이 외류되지 못하게 막았으며 반동지주와 친일주구의 기고만장한 기세를 호되게 타격했다. 얼마 후 현당위 순시원으로서 최상동은 삼도구, 개산툰, 달라자 등 지역에서 순시사업을 펼쳤고 도중에 적들에게 발견돼 체포되였다가 기회를 엿보아 적들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1932년 5월, 최상동은 중공화룡현위 서기로 임명됐다. 당시 그는 현당위 주둔지를 달라자로부터 일본괴뢰군 통치중심과 멀리 떨어진 약수동 혁명근거지에 옮겨갔다. 그는 현당위를 령도해 동만특위 옹성라자회의 정신을 관철하고 당원과 단원 열성분자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각 구 유격대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유격대를 정돈하고 확충해 당의 령도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군중들의 반일투쟁을 발전시키고 농민폭동을 조직했으며 적들의 무기를 빼앗고 유격대의 무장력량을 장대시켰다. 이 기간 일본괴뢰군은 약수동근거지를 3차례 미친 듯이 습격했고 항일의 봉화를 진압하려고 망상했다. 중공화룡현위 및 그 항일무장력량은 비록 큰 손해를 보았지만 그해 12월까지 유격투쟁을 견지했다. 최상동은 재차 현당위 주둔지를 약수동에서 더욱 편벽한 어랑촌 산지역으로 전이하고 각 구의 반일유격대도 륙속 그곳으로 집중해 화룡현유격중대로 통일 편성했으며 화룡현의 첫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현당위 기관은 어랑촌으로 옮긴 후 군중조직을 일층 보완하고 유격전쟁에 필요한 후근부, 군수과, 무기공장, 필복공장, 병원 등 부문을 건립했다.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의 건립은 동만지역의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현당위 중심임무는 총기탈취투쟁을 통해 적들의 무기를 빼앗는 것이였다. 1933년 정월 보름, 현유격대는 ‘일본수비대’로 위장하고 총기를 등록한다는 명의로 괴뢰군의 수백발 탄알과 기타 물품을 빼앗았다.
1933년 정월 18일 새벽, 일본침략자들은 300여명 일본 괴뢰군을 모아 ‘토벌대’를 구성해 어랑촌항일근거지에 대해 미친 듯한 ‘포위토벌’을 진행했다. 최상동은 간부, 군중을 조직해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포위를 뚫고 나갔고 군중과 현당위 기관을 산으로 전이시켰다. 최상동은 그 과정에 불행히 복부에 총을 맞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괴뢰군과 박투를 벌이다 장렬히 희생되였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