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97
김정일(1956-)
조선족으로서 길림성 왕청현 사람이다. 1974년, 사업에 참가하여 197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왕청현민정국 농촌구제과(农救科) 과장, 왕청현민정국 부국장으로 있었다. 20여년 동안 그는 ‘인민을 근본으로 삼고 인민을 위해 어려움을 해결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민정사업의 취지를 항상 명심하고 민정사업에 자신의 모든 정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간암 확진판정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앓는 몸으로 자신의 일터에서 사업을 견지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군중에게 당과 정부의 배려와 따스함을 전했다. 그는 선후로 국가민정부에서 수여한 ‘유자의 소’상, 전국5.1로력메달, 길림성 ‘백성을 위하는 훌륭한 공복’, 연변주 ‘민정계통 10대 공복’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겠다”는 말은 그의 진심의 소리였다. 1990년 1월, 김정일은 왕청현민정국 농촌구제과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당시 과실에는 김정일 한사람 뿐이라 어디에 재해가 발생하면 그곳이 바로 그의 사무실이 되였다. 정황을 조사하고 손실을 확인하며 리재민들의 생활을 타당하게 배치해주고 상급 부문의 재해구조 자금과 물품을 쟁취하느라 오후가 돼야 점심을 먹고 밤중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김정일은 늘 기층으로 내려가 어려움을 파악하고 제때에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1998년 5월, 김정일은 부국장으로 되여 재해 구조와 구제, 도시 최저생활보장 사업을 책임졌다. 리재민과 빈곤군중들이 제때에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가족을 관심하듯이 항상 군중의 안위와 복지를 념려하고 그들을 도와 근심과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그는 “민정국은 구조대상의 친정집이고 우리는 그들의 혈육입니다.”고 하면서 어려운 군중의 ‘친정식구’ 노릇을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정일은 어디를 가든 머리속에 늘 사업과 군중 생각 뿐이였다. 그는 “군중에겐 작은 일이란 없다. 언제나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매번 재해호와 빈곤호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솥뚜껑을 열어 무엇을 먹는지 살펴보고 입을 옷이 있는지, 덮을 이불이 있는지, 창고에 먹을 량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직접 살펴보며 생활을 살뜰히 보살폈다. 또한 촌민위원회에 가서 구제금과 물품들이 집집마다 발급되였는지, 각 마을마다 빈곤호가 얼마나 되는지 상황을 분명히 파악했다. 양로원을 방문할 때면 방마다 차례로 들어가 로인들이 먹고 자는 환경이나 의료위생조건을 알아보고 여러가지 규정제도가 실시되는 정황을 살펴보았으며 로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했다.
2006년 10월초, 농촌사회복지봉사중심의 설립과 ‘오보촌’ 건설을 추진하던중 김정일은 간암 확진판정을 받았다. ‘사형’에 가까운 ‘판결’ 앞에서 김정일은 태연했다. 수술을 마친 김정일은 집에서 3일밖에 쉬지 않고 또다시 봉사중심 공사 현장에 나섰다. 지도자와 동지들이 그에게 건강에 중시를 돌리고 휴식을 많이 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병치료로 이미 사업에 영향을 주었는데 퇴원하여 집에 누워있을 리유가 더욱 없다고 고집했다. 김정일과 동지들의 노력하에 왕청현제2사회복지봉사중심의 건설공사는 끝내 예정 대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김정일은 부국장으로 지낸 동안 단 한번도 례물을 받은 적이 없고 자기 리익을 챙긴 적도 없으며 인정이나 관계를 통해 일처리를 한 적도 없다. 그는 “권력은 인민이 저에게 준 것이니 전 인민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고 했다. 그는 진정으로 당의 선진성과 훌륭한 공산당원의 고상한 품성을 한몸에 지닌 모두의 본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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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송숙(1963-)
녀, 조선족으로서 길림성 연길시 사람이다. 대학 학력이며 1980년에 사업에 참가하고 1992년 8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연길시공원방직공장 공청단지부 서기, 연길시공원유치원 원장을 거쳐 현재 연길시 공원가두 원휘사회구역 당위 서기 겸 주민위원회 주임, 주부녀련합회 부주석 직을 맡고 있다. 림송숙은 자영업을 포기하고 20년 동안 사회구역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과정에 총 40만자의 《민생일기》 20권을 적었다. 림송숙은 공산당원의 헌신정신으로 사회구역에서 7가지 사업역할의 ‘가족 사업법’을 실천하여 ‘가장 아름다운 사회구역 서기’로 불리웠다. 선후로 18차, 19차 당대표, 길림성 9차, 10차 당대표로 당선되고 전국 우수당사무사업자, 전국로력모범, 전국 10대 ‘가장 아름다운 사회구역 사업일군’, 전국3.8붉은기수, 전국 민족단결진보 모범개인, 중국청소년사회교양 ‘은행상’특별기여상 등 50여개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사회구역 서기가 된 그날부터 림송숙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조직의 믿음과 주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원휘사회구역에 사는 주민들을 더욱 행복하게 하고 원휘사회구역에서 근무하는 동지들을 더욱 즐겁게 하자는 것이였다.
림송숙은 군중을 위해 봉사하며 사회구역 주민들의 ‘돌봄이’ 역할을 잘했다. 림송숙은 솔선하여 ‘5개 대오’ 사회구역 진입 활동을 전개하고 8개의 편민봉사소를 설립하여 호적 관리, 민정 우대무휼, 계획생육, 취업과 사회보험, 갈등조정 등 봉사를 제공했다. 취임한 지 얼마 안되였을 때 한 주민이 집의 하수도가 막혔다며 사회구역을 찾았다. 림송숙은 수리를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오전 내내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이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후에 주민이 또 찾아와서 “림서기, 온 오전 집에서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군요.”라고 해서야 그 일을 떠올린 림송숙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 후로 림송숙은 민생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본 것, 생각한 것,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 경험과 감수 등을 꼼꼼히 기록했는데 꼬박 20년을 꾸준히 견지하여 지금은 총 20권에 40만자의 작품으로 되였다.
사회구역은 ‘작은 사회이자 대가정’이고 사회구역 간부는 ‘작은 주임이자 큰 살림군’이다. 연길에 취직 오는 로무자가 많아짐에 따라 림송숙은 ‘외래인원을 위해 잘 봉사하자’는 것을 사업일정에 올리고 외래 로무일군의 서류를 건립하고 취업부문과의 소통을 통해 취업문제를 돕거나 해결해주는 등 외래인원을 위하여 전방위적인 봉사를 제공했다.
원휘사회구역에는 현재 500여명의 외국, 외지 진출 로무인원이 있는데 그들의 뒤바라지를 하는 것은 림송숙의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으로 되였다. 림송숙은 류재아동들의 ‘보호자’ 역할을 잘했으며 원휘사회구역 ‘아동보호애심협회’를 설립하고 ‘밝은 어린이 성장역’활동을 전개했으며 관할구역 류재아동들에게 과외수업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로령화 사회 추세를 마주하고 림송숙은 원휘사회구역에 솔선으로 ‘재택양로봉사중심’을 설립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하여 로인들을 대상으로 일대일 방문, 위문을 전개하며 집중독보회를 조직하고 무료 건강검진과 방문진료를 해주는 등 활동을 펼쳤다. 또한 ‘애심 구조카드’를 발급하고 ‘1회 클릭’전화를 설치했으며 법률자문과 법률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로인들의 부양, 재산, 혼인 등 면의 합법적인 권익을 충분히 보장했다.
다년간 원휘사회구역은 림송숙의 인솔하에 선후로 ‘중국 사회구역 발전상’, ‘전국 학습형 시범 사회구역’, ‘전국 사회구역사업 봉사 시범 사회구역’, ‘전국 조화건설 시범 사회구역’, ‘전국 평안 사회구역’, ‘길림성 선진 기층당조직 기준병’, ‘길림성 민족단결모범 시범 사회구역’ 등 100여개의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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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섭(1947-)
조선족으로서 흑룡강성 해림현 사람이며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1969년 12월에 입대했다가 1974년 3월에 제대하여 사업에 참가했다. 제대 후 로동자, 교원으로 지내다가 왕청현 동광향당위 서기, 왕청현문화국 국장, 왕청현당위 조직부 부장, 왕청현당위 부서기, 왕청현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 직무를 력임했다. 2005년 4월 퇴직 후,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5년간 그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혁명영렬들의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인물전기를 작성했다. 선후로 항일전쟁 영웅렬사 기념비와 중대한 력사사건 유적지 기념비 109개를 재건하고 동북항일련군 사적 100여만자를 발굴, 정리했으며 사진 5000여장을 수집하고 향토교재 24권을 편찬했으며 기록편 6부를 기획했다. 또한 동장영렬사릉원과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유적지를 건설하고 영웅렬사들을 위한 첫 현급 사이트를 만들었으며 동북항일련군 사적 보고회를 100차 열고 전 현의 42개 중소학교에 영웅렬사중대(반)를 설립했으며 1700여명의 빈곤 아동과 독거로인을 지원했다. 선후로 전국 리퇴직간부 선진개인, 전 성 미성년자 사상도덕교양 선진사업일군, 2013년도 ‘길림성 감동’ 인물, 길림성 훌륭한 이, 연변주 민족단결진보 모범개인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시대의 본보기’,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고 성당위, 성정부, 길림성군구로부터 ‘항전 정신을 고양하는 본보기’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으로 있었던 15년간 그는 전 현 177개 항전유적지와 렬사희생지를 답사하고 《왕청영웅렬사전》 등 100여만자에 달하는 항전력사자료를 편찬했다. 또한 영웅렬사이름벽을 지었고 기념관을 건설했으며 기록편을 찍었고 영웅렬사 사이트를 만들었으며 자금을 조정하여 항일전쟁 유적지와 영웅렬사기념비 109곳을 건설하여 왕청현의 홍색지도를 완성했고 항일련군정신이 대대손손 전해지게 했다.
가난한 조선족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김춘섭은 어린시절 어머니가 허약하고 자주 앓은 탓에 동네 ‘백가밥(百家饭)’을 먹고 자랐다. 후에 참군하고 돌아와 로동자, 교원으로 지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습니다. 당의 양성과 교양이 없었더라면 저의 오늘도 없었을 것입니다.”고 늘 말했다. 군에 있을 때 그는 부대편성의 간소화에 직면하고 결연히 조직의 결정에 복종했으며 제대하여 고향건설에 뛰여들었다. 퇴직 후 조직의 수요에 따라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고 자각적으로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관심하는 중임을 떠멨다.
왕청현은 홍색자원이 풍부하다.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연변 여러 민족을 령도하고 왕청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펼치면서 동장영 등 많은 항일영렬들이 용솟음쳐나왔다. 김춘섭은 홍색유전자를 전승하고 혁명영렬들을 선전하기 위해 백방으로 발품을 팔아 혁명영렬들의 비석을 세웠다. 그는 본인이 직접 답사하고 설계했으며 시공을 조직하고 감독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의 렬사릉원이 끝내 2014년에 완공되였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왕청의 항전력사를 알리기 위하여 60세였던 그는 돋보기를 걸고 타자를 배우면서 비문을 쓰고 력사자료를 편찬했다. 또한 중소학생들이 즐겨 보는 《민족영웅 동장영》 등 3권의 도서와 중공동만특위 3명의 항일영렬을 주제로 한 어린이 그림책을 기획, 편집했다. 그는 선후로 《왕청영웅렬사전》 등 도합 100여만자에 달하는 향토교재 24권을 편찬하고 《항일명장 박길송》 등 6편의 항전기록편을 기획, 제작했으며 북경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을 동원하여 ‘왕청영렬사이트’를 만들어 동북항일전쟁의 력사와 왕청의 홍색력사를 널리 알리기에 노력했다.
아이들 마음속의 ‘김할아버지’인 김춘섭은 이야기로 홍색유전자를 전승했다. 2015년 3월, 그는 왕청현교육국과 공청단왕청현위의 대대적인 협조와 적극적인 지지하에 전 현 42개 중소학교에 영렬중대(반)를 설립했다. 15년간, 그는 선후로 당, 정부, 군대, 기관,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에서 의무적으로 150여차 보고를 펼치고 ‘5로 강사단’을 조직했으며 청소년 성장 관련 사진전을 21차 진행하고 왕청현항일전쟁기념관, 왕청현민족단결교양관 등 교양기지에서 장기간 의무선전원을 맡으면서 새세대관심사업에 최선을 다했다.
100
최광일(1966-)
조선족으로서 199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왕청현공안국 교통경찰대대 차량관리소 지도원이다. 경찰로 일한 30년 동안 구류소, 파출소, 교통경찰대대 등 단위의 밀수검거, 마약검거 등 어느 일터에서나 시종 사업을 생명처럼 간주하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과감히 책임지며 일류의 사업업적을 창조했다. 그는 시종 인민의 리익을 중히 여기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진심으로 봉사하면서 과로로 병이 나고 아프더라도 일터를 고수하고 사심없이 헌신하며 실제 행동으로 경찰조직 가입시의 선서를 지킴으로써 인민경찰의 참뜻을 증명했다. 그는 개인 1등공 1회, 3등공 1회 수상했으며 연변주 5.1로력메달, 2014년도 길림성 감동 10대 인물, 제4회 길림성 도덕모범 및 길림성 훌륭한 이 2014년도 인물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2014년 9월, 길림성당위와 성정부는 최광일 동지에게 ‘모범인민경찰’ 영예칭호를 수여하고 전 성의 간부와 군중들이 최광일 동지를 따라배우는 활동을 전개했다. 2014년 10월, 그는 전국 제5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민경찰’로 선정되고 공안부로부터 ‘전국 공안계통 1급 영웅모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15년 12월에는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시대의 본보기’로 선정되였다. 2017년 10월, 길림성 제11기 당대회에서는 최광일 동지를 19차 당대회 대표로 추천했다.
2000년을 전후하여 중국과 조선 변경지대에는 밀수범죄가 창궐하여 현지의 치안안정에 엄중한 영향을 끼쳤다. 왕청현공안국은 전문적으로 밀수검거대를 조직하고 최광일을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매번 대원들을 이끌고 심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적어도 한달은 잠복근무를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가장 견디기 힘든 전망근무를 맡았으며 범죄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서있군 했다. 근 1년 동안 그와 대원들은 악렬한 환경을 극복하고 범죄혐의자 20여명을 나포하고 밀수차량 50여대를 압수했으며 사건 금액은 1000만원에 달했다.
최광일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 돌격하며 용감무쌍한 정신으로 인민경찰의 강직한 혈기를 보여주었다. 매번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최광일은 늘 위험은 자신이 감당하고 안전은 전우에게 양보하면서 임무 수행중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다. 2002년 8월의 어느 날, 당시 마약검거 경찰이였던 최광일은 사복차림으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마침 한 식당 입구에서 두무리의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한무리는 손에 날카로운 칼과 쇠막대기 등 흉기를 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언제든 흉기로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위급한 순간 최광일은 쏜살같이 그들에게 달려들며 “경찰이다. 칼을 내려놔라!”고 웨쳤다. 하지만 악당들은 겁없이 최광일에게 달려들며 칼을 휘둘렀다. 최광일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그들과 박투하다가 복부가 칼에 두차례 찔렸고 창자가 흘러나오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였다. 그는 여전히 참고 견디며 뒤따라온 전우들과 함께 범인들을 제압했다.
2012년 8월, 한차례 근무수행중 최광일은 복부에 통증을 느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였다. 검사결과 급성 맹장염으로 확진되였다. 수술 후 며칠째 고열이 가라앉지 않아 추가검사를 받았더니 뇨독증이였다. 초기에 최광일은 한주일에 두번, 한번에 4시간씩 혈액투석을 했는데 몸이 허약해져 걸을 때도 휘청거렸다. 조직에서 그에게 휴식할 것을 재삼 권했지만 그는 견결히 일선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병세가 악화되자 2015년에 심장관상동맥우회수술과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다. 2016년 7월 14일, 업무에 복귀한 최광일은 여전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7시 출근하며 굳건히 일터를 지켰다.
19차 당대회가 승리적으로 소집되고 영광스럽게 당대표로 당선된 최광일은 더욱 자신의 사명을 소중히 생각했다. 조직에서는 교통경찰 최광일의 ‘문명일터’를 도로에서 ‘창구’로 옮겨주었다. “일선 근무지를 떠나 차가 끊이지 않는 도로를 떠났지만 저는 여전히 교통경찰입니다. 인민군중을 위해 일하는 길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최광일의 굳은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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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1956-)
조선족으로서 길림성 왕청현 사람이다. 1974년, 사업에 참가하여 197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왕청현민정국 농촌구제과(农救科) 과장, 왕청현민정국 부국장으로 있었다. 20여년 동안 그는 ‘인민을 근본으로 삼고 인민을 위해 어려움을 해결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민정사업의 취지를 항상 명심하고 민정사업에 자신의 모든 정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간암 확진판정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앓는 몸으로 자신의 일터에서 사업을 견지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군중에게 당과 정부의 배려와 따스함을 전했다. 그는 선후로 국가민정부에서 수여한 ‘유자의 소’상, 전국5.1로력메달, 길림성 ‘백성을 위하는 훌륭한 공복’, 연변주 ‘민정계통 10대 공복’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지키는 책임을 다하겠다”는 말은 그의 진심의 소리였다. 1990년 1월, 김정일은 왕청현민정국 농촌구제과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당시 과실에는 김정일 한사람 뿐이라 어디에 재해가 발생하면 그곳이 바로 그의 사무실이 되였다. 정황을 조사하고 손실을 확인하며 리재민들의 생활을 타당하게 배치해주고 상급 부문의 재해구조 자금과 물품을 쟁취하느라 오후가 돼야 점심을 먹고 밤중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김정일은 늘 기층으로 내려가 어려움을 파악하고 제때에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1998년 5월, 김정일은 부국장으로 되여 재해 구조와 구제, 도시 최저생활보장 사업을 책임졌다. 리재민과 빈곤군중들이 제때에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가족을 관심하듯이 항상 군중의 안위와 복지를 념려하고 그들을 도와 근심과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그는 “민정국은 구조대상의 친정집이고 우리는 그들의 혈육입니다.”고 하면서 어려운 군중의 ‘친정식구’ 노릇을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정일은 어디를 가든 머리속에 늘 사업과 군중 생각 뿐이였다. 그는 “군중에겐 작은 일이란 없다. 언제나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매번 재해호와 빈곤호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솥뚜껑을 열어 무엇을 먹는지 살펴보고 입을 옷이 있는지, 덮을 이불이 있는지, 창고에 먹을 량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직접 살펴보며 생활을 살뜰히 보살폈다. 또한 촌민위원회에 가서 구제금과 물품들이 집집마다 발급되였는지, 각 마을마다 빈곤호가 얼마나 되는지 상황을 분명히 파악했다. 양로원을 방문할 때면 방마다 차례로 들어가 로인들이 먹고 자는 환경이나 의료위생조건을 알아보고 여러가지 규정제도가 실시되는 정황을 살펴보았으며 로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했다.
2006년 10월초, 농촌사회복지봉사중심의 설립과 ‘오보촌’ 건설을 추진하던중 김정일은 간암 확진판정을 받았다. ‘사형’에 가까운 ‘판결’ 앞에서 김정일은 태연했다. 수술을 마친 김정일은 집에서 3일밖에 쉬지 않고 또다시 봉사중심 공사 현장에 나섰다. 지도자와 동지들이 그에게 건강에 중시를 돌리고 휴식을 많이 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병치료로 이미 사업에 영향을 주었는데 퇴원하여 집에 누워있을 리유가 더욱 없다고 고집했다. 김정일과 동지들의 노력하에 왕청현제2사회복지봉사중심의 건설공사는 끝내 예정 대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김정일은 부국장으로 지낸 동안 단 한번도 례물을 받은 적이 없고 자기 리익을 챙긴 적도 없으며 인정이나 관계를 통해 일처리를 한 적도 없다. 그는 “권력은 인민이 저에게 준 것이니 전 인민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고 했다. 그는 진정으로 당의 선진성과 훌륭한 공산당원의 고상한 품성을 한몸에 지닌 모두의 본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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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송숙(1963-)
녀, 조선족으로서 길림성 연길시 사람이다. 대학 학력이며 1980년에 사업에 참가하고 1992년 8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연길시공원방직공장 공청단지부 서기, 연길시공원유치원 원장을 거쳐 현재 연길시 공원가두 원휘사회구역 당위 서기 겸 주민위원회 주임, 주부녀련합회 부주석 직을 맡고 있다. 림송숙은 자영업을 포기하고 20년 동안 사회구역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과정에 총 40만자의 《민생일기》 20권을 적었다. 림송숙은 공산당원의 헌신정신으로 사회구역에서 7가지 사업역할의 ‘가족 사업법’을 실천하여 ‘가장 아름다운 사회구역 서기’로 불리웠다. 선후로 18차, 19차 당대표, 길림성 9차, 10차 당대표로 당선되고 전국 우수당사무사업자, 전국로력모범, 전국 10대 ‘가장 아름다운 사회구역 사업일군’, 전국3.8붉은기수, 전국 민족단결진보 모범개인, 중국청소년사회교양 ‘은행상’특별기여상 등 50여개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사회구역 서기가 된 그날부터 림송숙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조직의 믿음과 주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원휘사회구역에 사는 주민들을 더욱 행복하게 하고 원휘사회구역에서 근무하는 동지들을 더욱 즐겁게 하자는 것이였다.
림송숙은 군중을 위해 봉사하며 사회구역 주민들의 ‘돌봄이’ 역할을 잘했다. 림송숙은 솔선하여 ‘5개 대오’ 사회구역 진입 활동을 전개하고 8개의 편민봉사소를 설립하여 호적 관리, 민정 우대무휼, 계획생육, 취업과 사회보험, 갈등조정 등 봉사를 제공했다. 취임한 지 얼마 안되였을 때 한 주민이 집의 하수도가 막혔다며 사회구역을 찾았다. 림송숙은 수리를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오전 내내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이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후에 주민이 또 찾아와서 “림서기, 온 오전 집에서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군요.”라고 해서야 그 일을 떠올린 림송숙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 후로 림송숙은 민생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본 것, 생각한 것,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 경험과 감수 등을 꼼꼼히 기록했는데 꼬박 20년을 꾸준히 견지하여 지금은 총 20권에 40만자의 작품으로 되였다.
사회구역은 ‘작은 사회이자 대가정’이고 사회구역 간부는 ‘작은 주임이자 큰 살림군’이다. 연길에 취직 오는 로무자가 많아짐에 따라 림송숙은 ‘외래인원을 위해 잘 봉사하자’는 것을 사업일정에 올리고 외래 로무일군의 서류를 건립하고 취업부문과의 소통을 통해 취업문제를 돕거나 해결해주는 등 외래인원을 위하여 전방위적인 봉사를 제공했다.
원휘사회구역에는 현재 500여명의 외국, 외지 진출 로무인원이 있는데 그들의 뒤바라지를 하는 것은 림송숙의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으로 되였다. 림송숙은 류재아동들의 ‘보호자’ 역할을 잘했으며 원휘사회구역 ‘아동보호애심협회’를 설립하고 ‘밝은 어린이 성장역’활동을 전개했으며 관할구역 류재아동들에게 과외수업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로령화 사회 추세를 마주하고 림송숙은 원휘사회구역에 솔선으로 ‘재택양로봉사중심’을 설립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하여 로인들을 대상으로 일대일 방문, 위문을 전개하며 집중독보회를 조직하고 무료 건강검진과 방문진료를 해주는 등 활동을 펼쳤다. 또한 ‘애심 구조카드’를 발급하고 ‘1회 클릭’전화를 설치했으며 법률자문과 법률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로인들의 부양, 재산, 혼인 등 면의 합법적인 권익을 충분히 보장했다.
다년간 원휘사회구역은 림송숙의 인솔하에 선후로 ‘중국 사회구역 발전상’, ‘전국 학습형 시범 사회구역’, ‘전국 사회구역사업 봉사 시범 사회구역’, ‘전국 조화건설 시범 사회구역’, ‘전국 평안 사회구역’, ‘길림성 선진 기층당조직 기준병’, ‘길림성 민족단결모범 시범 사회구역’ 등 100여개의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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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섭(1947-)
조선족으로서 흑룡강성 해림현 사람이며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1969년 12월에 입대했다가 1974년 3월에 제대하여 사업에 참가했다. 제대 후 로동자, 교원으로 지내다가 왕청현 동광향당위 서기, 왕청현문화국 국장, 왕청현당위 조직부 부장, 왕청현당위 부서기, 왕청현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 직무를 력임했다. 2005년 4월 퇴직 후,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5년간 그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혁명영렬들의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인물전기를 작성했다. 선후로 항일전쟁 영웅렬사 기념비와 중대한 력사사건 유적지 기념비 109개를 재건하고 동북항일련군 사적 100여만자를 발굴, 정리했으며 사진 5000여장을 수집하고 향토교재 24권을 편찬했으며 기록편 6부를 기획했다. 또한 동장영렬사릉원과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유적지를 건설하고 영웅렬사들을 위한 첫 현급 사이트를 만들었으며 동북항일련군 사적 보고회를 100차 열고 전 현의 42개 중소학교에 영웅렬사중대(반)를 설립했으며 1700여명의 빈곤 아동과 독거로인을 지원했다. 선후로 전국 리퇴직간부 선진개인, 전 성 미성년자 사상도덕교양 선진사업일군, 2013년도 ‘길림성 감동’ 인물, 길림성 훌륭한 이, 연변주 민족단결진보 모범개인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시대의 본보기’,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고 성당위, 성정부, 길림성군구로부터 ‘항전 정신을 고양하는 본보기’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으로 있었던 15년간 그는 전 현 177개 항전유적지와 렬사희생지를 답사하고 《왕청영웅렬사전》 등 100여만자에 달하는 항전력사자료를 편찬했다. 또한 영웅렬사이름벽을 지었고 기념관을 건설했으며 기록편을 찍었고 영웅렬사 사이트를 만들었으며 자금을 조정하여 항일전쟁 유적지와 영웅렬사기념비 109곳을 건설하여 왕청현의 홍색지도를 완성했고 항일련군정신이 대대손손 전해지게 했다.
가난한 조선족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김춘섭은 어린시절 어머니가 허약하고 자주 앓은 탓에 동네 ‘백가밥(百家饭)’을 먹고 자랐다. 후에 참군하고 돌아와 로동자, 교원으로 지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습니다. 당의 양성과 교양이 없었더라면 저의 오늘도 없었을 것입니다.”고 늘 말했다. 군에 있을 때 그는 부대편성의 간소화에 직면하고 결연히 조직의 결정에 복종했으며 제대하여 고향건설에 뛰여들었다. 퇴직 후 조직의 수요에 따라 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고 자각적으로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관심하는 중임을 떠멨다.
왕청현은 홍색자원이 풍부하다.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연변 여러 민족을 령도하고 왕청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펼치면서 동장영 등 많은 항일영렬들이 용솟음쳐나왔다. 김춘섭은 홍색유전자를 전승하고 혁명영렬들을 선전하기 위해 백방으로 발품을 팔아 혁명영렬들의 비석을 세웠다. 그는 본인이 직접 답사하고 설계했으며 시공을 조직하고 감독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의 렬사릉원이 끝내 2014년에 완공되였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왕청의 항전력사를 알리기 위하여 60세였던 그는 돋보기를 걸고 타자를 배우면서 비문을 쓰고 력사자료를 편찬했다. 또한 중소학생들이 즐겨 보는 《민족영웅 동장영》 등 3권의 도서와 중공동만특위 3명의 항일영렬을 주제로 한 어린이 그림책을 기획, 편집했다. 그는 선후로 《왕청영웅렬사전》 등 도합 100여만자에 달하는 향토교재 24권을 편찬하고 《항일명장 박길송》 등 6편의 항전기록편을 기획, 제작했으며 북경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을 동원하여 ‘왕청영렬사이트’를 만들어 동북항일전쟁의 력사와 왕청의 홍색력사를 널리 알리기에 노력했다.
아이들 마음속의 ‘김할아버지’인 김춘섭은 이야기로 홍색유전자를 전승했다. 2015년 3월, 그는 왕청현교육국과 공청단왕청현위의 대대적인 협조와 적극적인 지지하에 전 현 42개 중소학교에 영렬중대(반)를 설립했다. 15년간, 그는 선후로 당, 정부, 군대, 기관,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에서 의무적으로 150여차 보고를 펼치고 ‘5로 강사단’을 조직했으며 청소년 성장 관련 사진전을 21차 진행하고 왕청현항일전쟁기념관, 왕청현민족단결교양관 등 교양기지에서 장기간 의무선전원을 맡으면서 새세대관심사업에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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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일(1966-)
조선족으로서 199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왕청현공안국 교통경찰대대 차량관리소 지도원이다. 경찰로 일한 30년 동안 구류소, 파출소, 교통경찰대대 등 단위의 밀수검거, 마약검거 등 어느 일터에서나 시종 사업을 생명처럼 간주하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과감히 책임지며 일류의 사업업적을 창조했다. 그는 시종 인민의 리익을 중히 여기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진심으로 봉사하면서 과로로 병이 나고 아프더라도 일터를 고수하고 사심없이 헌신하며 실제 행동으로 경찰조직 가입시의 선서를 지킴으로써 인민경찰의 참뜻을 증명했다. 그는 개인 1등공 1회, 3등공 1회 수상했으며 연변주 5.1로력메달, 2014년도 길림성 감동 10대 인물, 제4회 길림성 도덕모범 및 길림성 훌륭한 이 2014년도 인물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2014년 9월, 길림성당위와 성정부는 최광일 동지에게 ‘모범인민경찰’ 영예칭호를 수여하고 전 성의 간부와 군중들이 최광일 동지를 따라배우는 활동을 전개했다. 2014년 10월, 그는 전국 제5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민경찰’로 선정되고 공안부로부터 ‘전국 공안계통 1급 영웅모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15년 12월에는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시대의 본보기’로 선정되였다. 2017년 10월, 길림성 제11기 당대회에서는 최광일 동지를 19차 당대회 대표로 추천했다.
2000년을 전후하여 중국과 조선 변경지대에는 밀수범죄가 창궐하여 현지의 치안안정에 엄중한 영향을 끼쳤다. 왕청현공안국은 전문적으로 밀수검거대를 조직하고 최광일을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매번 대원들을 이끌고 심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적어도 한달은 잠복근무를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가장 견디기 힘든 전망근무를 맡았으며 범죄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서있군 했다. 근 1년 동안 그와 대원들은 악렬한 환경을 극복하고 범죄혐의자 20여명을 나포하고 밀수차량 50여대를 압수했으며 사건 금액은 1000만원에 달했다.
최광일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 돌격하며 용감무쌍한 정신으로 인민경찰의 강직한 혈기를 보여주었다. 매번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최광일은 늘 위험은 자신이 감당하고 안전은 전우에게 양보하면서 임무 수행중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다. 2002년 8월의 어느 날, 당시 마약검거 경찰이였던 최광일은 사복차림으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마침 한 식당 입구에서 두무리의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한무리는 손에 날카로운 칼과 쇠막대기 등 흉기를 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언제든 흉기로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위급한 순간 최광일은 쏜살같이 그들에게 달려들며 “경찰이다. 칼을 내려놔라!”고 웨쳤다. 하지만 악당들은 겁없이 최광일에게 달려들며 칼을 휘둘렀다. 최광일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그들과 박투하다가 복부가 칼에 두차례 찔렸고 창자가 흘러나오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였다. 그는 여전히 참고 견디며 뒤따라온 전우들과 함께 범인들을 제압했다.
2012년 8월, 한차례 근무수행중 최광일은 복부에 통증을 느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였다. 검사결과 급성 맹장염으로 확진되였다. 수술 후 며칠째 고열이 가라앉지 않아 추가검사를 받았더니 뇨독증이였다. 초기에 최광일은 한주일에 두번, 한번에 4시간씩 혈액투석을 했는데 몸이 허약해져 걸을 때도 휘청거렸다. 조직에서 그에게 휴식할 것을 재삼 권했지만 그는 견결히 일선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병세가 악화되자 2015년에 심장관상동맥우회수술과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다. 2016년 7월 14일, 업무에 복귀한 최광일은 여전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7시 출근하며 굳건히 일터를 지켰다.
19차 당대회가 승리적으로 소집되고 영광스럽게 당대표로 당선된 최광일은 더욱 자신의 사명을 소중히 생각했다. 조직에서는 교통경찰 최광일의 ‘문명일터’를 도로에서 ‘창구’로 옮겨주었다. “일선 근무지를 떠나 차가 끊이지 않는 도로를 떠났지만 저는 여전히 교통경찰입니다. 인민군중을 위해 일하는 길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최광일의 굳은 결심이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끝)
오수란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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