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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경
(1905-?)
조선족, 원명은 문필도이고 문갑송이라는 가명을 썼으며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태여났다. 1928년, 공산국제는 그를 중공만주성위에 파견했다. 1930년초, 만주성위는 왕경을 연변에 파견해 당조직 회복 사업을 하도록 했다. 2월, 왕경은 화룡현 달라자 천평촌에서 중공연변특별지부를 설립하고 서기로 임명됐다. 8월, 연변지역의 첫 당원대표대회가 평강에서 소집되고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설립됐으며 왕경이 서기로 임명됐다. 10월, 중공동만특별위원회가 설립되고 료여원이 서기로, 왕경이 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 1934년, 왕경은 일본의 봉천검거반에 체포된 후 희생됐다.
왕경은 길림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 ‘5.30운동’ 혁명물결 속에서 학생운동에 적극 참가하고 혁명사상을 접수했다. 반동세력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받게 되자 그는 인차 학교를 떠나 쏘련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쏘련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참가하고 쏘련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공산국제는 그를 중국 동북에 파견, 그러나 할빈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돼 수감됐다. 1929년, 출옥 후 당의 파견을 받고 봉천(오늘날의 심양, 이하 같음)의 중공만주성위 비서처에서 인쇄사업을 하고 잡지《로동자의 길》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1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안해 대보영(한족)과 함께 연변에 왔으며 팔도하자, 달라자 일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왕경은 화룡현교육국 국장이며 진보인사인 관준언의 소개로 광개구 천평에서 화룡현제2소학교 교원으로 취임, 그곳에서 교원의 신분으로 당의 사업을 전개했다. 2월, 왕경은 천평에 중공연변특별지부를 건립하고 서기로 되였으며 4개 지부를 회복했는데 여기에는 15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왕경을 서기로 하는 중공연변특별지부는 공산국제의 ‘한 나라 한개 당’의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주의자들과 련계를 취하고 농촌에서 조선족 군중들을 조직해 반제반봉건 투쟁을 벌였으며 당건설 사업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에 뛰여들었다. 동시에 각 지역에서 군중단체를 조직, 건립해 반일투쟁을 벌였다.
1930년 8월, 평강에서 연변지역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소집, 회의에서는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설립되였음을 선포하고 왕경을 서기로 임명했다. 회의 후, 현당위 각 지역에서 추수폭동을 조직하고 당의 기층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왕경은 왕청현에서 하마탕구당위와 라자구당위를 설립했다. 10월, 중공연화중심현위 회의를 소집, 중공연화중심현위를 해체하고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설립했으며 료여원을 서기로, 왕경을 조직부장으로, 양림을 군위서기로 임명했다. 회의 후, 왕경은 직접 왕청에 가 중공왕청현위를 설립하고 산하에 7개 구당위를 설립했다. 이 시기 연변지역은 특위, 현당위, 구당위, 지부로 구성된 완전한 당의 조직체계가 형성되였다. 1931년 4월, 통계에 따르면 당시 공산당원이 636명, 공청단원이 1750명에 달하고 반일회, 반제동맹, 농민협회 등 군중단체 성원들이 1만 2000여명에 달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난 후 중공동만특위는 각 현의 간부들을 소집해 긴급련석회의를 소집, 중앙과 성당위의 지시를 전달했으며 투쟁강령을 통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구호를 제기하고 ‘추수투쟁’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추수투쟁’에서 동만특위는 큰 타격을 받았다.
1932년초부터 왕경은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선후하여 할빈시, 파언(巴彦), 반석 등 지역에서 사업을 펼치고 11월, 반석에서 로농의용군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1933년초, 중공만주성위는 왕경을 대안현에 파견, 당의 조직을 회복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그 후 그는 또 료중지역에서 당의 조직을 회복하는 사업을 전개했고 중공료대림시현위를 건립, 선전부장으로 임명됐다. 1934년 5월 6일, 그는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 봉천검거반에 체포되였다. 희생시간은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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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태
(1903-1934)
백일평이라고도 함. 산동성의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3월, 북경향산자유원에서 연변으로 왔고 훈춘현 현립제1소학교에서 어문교원을 담임하면서 혁명활동을 전개했다. 1933년 7월, 훈춘현 항일유격총대 정위였던 백천태는 항일대오를 확충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산림대를 쟁취했다. 1934년 1월 15일, 무릎까지 오는 눈길을 헤치면서 산림대를 영접하러 밀영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백천태는 5살 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북경향산자유원에 입양됐다. 그는 로씨야 ‘10월혁명’과 북경 ‘5.4’운동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 빠르게 성숙됐다. 1927년, 백천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3월, 백천태는 중공북방국의 파견을 받고 길림성 훈춘현 현립제1소학교 어문교원으로 배치되여 혁명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다방면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애국주의교양 활동을 펼쳤다. 백천태는 이 학교에서 4년간 근무했고 그의 교양하에 많은 학생들이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32년 4월, 일본침략군이 훈춘에서 제1차 ‘대토벌’을 진행했다. 중공훈춘현위의 지시에 따라 백천태는 학교를 떠나 춘화에서 왕옥진이 령도하는 구국군에 참가하고 정치부 선전사업에 종사했다. 같은 해 11월, 중공훈춘현위는 투쟁의 수요에 근거해 령남, 령북 2개 항일유객대를 훈춘현 항일유격총대로 합병한 후 2개 유격대대를 설립했으며 백천태를 제1대대 정위로 임명했다. 유격대는 주로 훈춘현성 동북부 춘화 부근의 연통라자 산간지대에서 활동했으며 대원이 70여명에 달했다.
1933년 7월, 백천태는 훈춘현 항일유격총대 정위로 임명됐다. 중앙의 ‘1.26지시편지’ 정신을 관철, 시달하기 위해 백천태는 유격대의 각급 간부를 거느리고 열심히 사업했으며 각종 항일무장력량을 단결, 교양해 련합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훈춘현 경내의 항일무장은 구국군외에도 ‘애국’, ‘청산’, ‘점산’, ‘사계호’ 등 산림대가 있었다. 그들을 단합해 함께 항일하기 위해 백천태는 유격대 기타 지도자들과 함께 산림대의 상황을 연구, 분석했고 주동적으로 그들과 접촉했다. 같은 해 9월 상순, 백천태는 훈춘현 항일유격총대를 거느리고 왕청 항일유격대대와 함께 길림구국군 오의성 총사령대리가 발기하고 지휘한 동녕현성 공략 전역에 참가했다. 이번 전역에는 각 부의 항일무장력량 2000여명을 련합했다.
1934년 1월 15일, 백천태는 유격대원을 인솔해 유격대에 합류하려는 한개 산림대를 마중하러 마적달 서북구 밀영으로 향했다. 그들이 밀영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에 찍힌 발자국을 밟고 뒤따라온 일본 ‘토벌대’에게 포위됐다. 긴박한 상황에 백천태는 부대를 지휘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총에 맞아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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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영
(1907-1934)
장장영이라고도 함. 안휘성 종양현 사람이다. 1921년, 안휘성립제1사범학교에 입학, 재학기간 안경사회주의공청단에 가입했으며 안경시 ‘학생련합회’ 지도성원으로 임명됐다. 1925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예비과 제1고등학교에 입학, 재학기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일본 동경중공특별지부의 지도성원으로 선거되고 1928년 7월 귀국했으며 중공상해로중구 서기로 임명됐다. 1929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을 설립하는 사업에 참가, 그 조직 발기인중 한명이다. 그 후 중공하남성위 서기, 중공천진시위 서기, 중공대련시위 서기를 련임했다. 1931년 11월,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4년 3월 21일,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 대북구의 반‘토벌’ 작전에서 희생됐다. 그의 인생궤적도 그의 이름처럼 민족의 장기적인 번영을 위해 전력으로 전투한 일생이였다.(2014년 민정부로부터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동장영은 1907년 11월 안휘성 동성현(지금의 종양현)에서 태여났다. 1921년초, 그는 안휘성립제1사범학교에 입학하고 4월, 안경사회주의공청단에 가입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당의 령도와 교양하에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그해 여름, 그는 봉건군벌 및 그 폭정을 반대하는 투쟁인 안경(安庆) ‘6.2운동’과 리조진 성장을 내쫓는 투쟁에 참가했다. 이 두차례 전쟁에서 그는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학생들로부터 명실상부한 령수로 추대되였으며 안경 ‘학생련합회’의 지도성원으로 되였다.
1925년 여름, 동장영은 일본류학의 길에 올랐고 동경제국대학 예비과 제1고등학교 재학기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그는 일본 동경중공특별지부의 지도성원으로 선거되였다. 일본 류학 기간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해 각종 정치투쟁에 참여했다. 1928년 5월, 일본침략자들의 ‘제남학살사건’에 분개한 그는 류학생들을 거느리고 항의활동을 전개했다. 일본당국은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2개월 후 석방, 중국으로 추방했다. 귀국 후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동장영은 남경, 절강과 하남 등 지역에서 당조직 복구 사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중공상해시 호중구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0년 3월 2일, 그가 참여하고 발기한 중국좌익작가련맹이 상해에서 설립됐다.
1930년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장영은 선후로 중공하남성위 서기, 중공천진시위 서기, 중공대련시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1년 11월, 중공만주성위는 동북지역 항일투쟁의 령도를 강화하기 위해 동장영을 투쟁이 더욱 첨예하고 환경이 더욱 간고한 동만지역에 파견, 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했다.
1932년초, 동장영과 동만특위 령도하에 왕청, 연길, 화룡과 훈춘 등 지역에서 10여개 달하는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령도하는 반일유격대가 건립됐다. 이는 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이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발전)의 건립에 든든한 토대를 마련했다.
1932년 4월, 일본침략자들은 동만 각 지역을 미친 듯이 ‘토벌’했다. 동장영은 항일군민을 거느리고 용감하게 반격했다. 연길현, 훈춘현과 왕청현 유격대에서 련이은 승전보를 보내왔다. 1932년 11월, 동장영은 동만특위 기관을 거느리고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서 왕청현당위와 함께 사업을 펼쳤다. 이로써 소왕청항일유격대는 동만항일투쟁의 지도중심으로 되였다.
1933년 3월 30일, 일본침략군은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을 소멸하기 위해 마촌을 중심으로 하는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해 ‘대토벌’을 진행했다. 동장영은 인차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동북항일구국유격군 리연록 사령을 총지휘로 하는 유격대, 별동대, 구국군 련합작전 방안을 제정했다. 이번 전역에서 아군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3월 21일, 동장영은 일부 전사들을 거느리고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 대북구일대로 전이, 하지만 적들이 몰래 뒤따라오고 있었다. 전투에서 동장영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왕청현당위 부녀부장이며 조선족 녀전사인 최금숙이 신속히 달려와 그를 부축해 밀영 북쪽의 수림으로 전이하던중 적들의 총격에 의해 희생했다. 당시 동장영은 27세였고 최금숙은 21세였다.
1935년 8월, 중공중앙은 ‘8.1선언’에서 동장영을 항일구국에 목숨 바친 민족영웅이라고 극찬했다. 1951년 11월, 환북행정공서는 동장영 동지를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동북렬사기념관 등 기념관에서 동장영의 영웅사적을 진렬했다. 신편《중국공산당 력사》제1권에도 동장영의 항일기여를 수록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왕청현당위, 현정부와 사회 각계 관심과 지지하에 동장영 묘를 왕부도로 남쪽에 위치한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 대북구 입구에 옮겼다. 그곳에 면적이 2500평방메터에 달하는 동장영렬사릉원, 동장영기념관을 건설하고 동장영이 전투하던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유적지 입구에 동만항일영렬기념비를 신축했다. 왕청현에서는 렬사의 이름으로 장영촌, 장영거리, 장영사회구역, 동장영홍군학교 등을 명명했다.
2014년 9월 1일, 민정부에서 제1패 전국 300명 저명 항일영렬와 영웅군체 명단을 공포, 동장영이 8위에 올랐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