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어제 울던 그 아이는 누구요?”
월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편집 전 회의에서 전날 축구경기에 대한 열띤 토론 뒤끝에 부총편집이 불쑥 던진 한마디였다.
때는 축구열이 하늘을 찌르던 2017년, 연변팀의 슈퍼리그 진출의 희열을 안고 홈장경기마다 빼놓지 않고 경기장으로 뛰여갔던 나였으나 전날 축구경기에서 “누가 울었지” 하는 물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울던 아이라니? 알고 보니 이날 텔레비죤 생중계 화면에서 슈퍼리그 시즌 첫꼴에 울면서 환호하는 한 아이의 모습을 총편집은 놓치지 않은 것이였다.
회의가 끝나자 바람으로 나는 인차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사람을 찾습니다>는 제목에 화면 속의 아이를 제보해줄 것을 위챗모멘트에 올렸다. 위챗글에 순식간에 달리는 댓글과 타언론사 기자들의 공유와 관심에 나는 순간 설레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거의 될 무렵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제보가 잇달아 들어왔다.
“위챗을 보고 전화드립니다…”
신문사 뉴미디어부가 세워진 지 50일쯤 되던 당시는 위챗계정 하나만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갓 세워진 부서의 성적표는 수수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보전화에 느낌이 좋았다. 나는 점심 먹을 새도 없이 신문편집 선생님을 차에 태우고 화룡으로 향했다. 한시간가량 운전하는 내내 스피커폰은 잠잠할 새가 없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들떠있는 나에게 옆자리에 있던 편집선생님이 한마디 해왔다. 이게 그리 설레는 일이냐고.
숨가쁘게 취재를 다녀와 <너였구나! 울던 아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과 영상을 공식계정에 올렸다. 2017년 4월 17일, 원고 발송 당일은 내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래 가장 설레였던 밤인 것 같다. 물론 운도 좋았다. 축구열풍과 인터넷의 파급력, 거기에 신문사 이름을 떡하니 밝힌 제보요청글에 누구도 탐을 못내는 독점취재가 되였다.
지금 다시 들여다보면 <너였구나! 울던 아이> 기사는 부족한 부분이 참 많다. 허나 신문뉴스에서 시간이 생명이라는 면에서 여느 언론사보다 한발 빨랐고 많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족했다. 또한 짧은 기사 속에 축구사랑과 더불어 고향사랑, 민족사랑, 조국사랑을 키워가는 변강 어린이들의 장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서 흡족한 마음도 금할 수 없었다. 글을 발송하고 나서까지도 이어지던 제보전화와 밤새 기하급수로 치솟는 조회수 그리고 격찬의 댓글로 도배되던 그날의 감동만은 잊을 수가 없다.
교원직을 그만두고 신문사에 입사한 지도 어언 18년이다. 화려한 글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묵직묵직한 상들을 수상한 경력도 없지만 기자생활은 이젠 나의 천직인 것 같다.
갓 입사했을 적 “독자들의 말을 하고 독자들을 말하게 하고 독자들을 위해 말하는 언론인이 되라.”던 선배님의 조언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어린이들의 말로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싣고 어린이들을 위하는 신문기자가 되리라.’ 속다짐했다.
아이들은 어떤 기사를 읽기 좋아할가? 아이들은 어떤 코너를 좋아할가? 아이들은 어떤 활동을 좋아할가? 고민에 고민을 하면서 내놓았던 하나하나의 기획들이 독자들과 대면할 때 나는 더없는 보람을 느꼈다.
18년간의 기자생활을 뒤돌아보면 가슴 설레였던 일이 어찌 그뿐이랴.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서장에서 순백의 하다로 반갑게 맞아주는 아이들을 만났을 때도, 꼬마독자들을 위해 펼치는 활동에서 민족복장을 차려입고 마이크를 잡던 순간도, 천진란만한 아이들을 거느리고 미니영화를 찍던 순간들도, 밤을 패가며 또랑또랑 소리작문, 미니영상들을 편집하는 순간마다 나에게는 설레임과 감동으로 점철된 격동의 시간들이였다.
아마도 신문기자라는 일이, 어린이신문 기자라는 이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수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또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