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히 부는 가을바람을 마주하며 간만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부려본다. 17년 지나온 나의 기자생활을 되돌아보니 감회가 무척 남다르다.
‘기자’라는 나의 또 다른 이름
대학졸업을 앞둔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5년 초여름, 우연한 기회에 행운스럽게 연변라지오조선어방송 음악편집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나의 각본 없는 기자생활의 드라마는 그때로부터 시작되였다.
어릴 적 라지오를 친구삼아 즐겨 들어왔던 나에게 방송음악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라지오를 통해 노래와 그 노래에 담긴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전파를 통해 또다시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였다. 하지만 기자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한 생각으로 겁없이 뛰여든 새내기였음은 분명했다. 대학시절 전공한 음악지식을 토대로 글 구성과 진행을 스스로 맡아야 했기에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기자’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열심히 뛰여온 10여년의 시간, 일터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을 이룩했다.
동희철, 안국민과 김봉호 등 연변음악 나아가 중국조선족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들의 음악인생을 보다 더 생동감 있게 전하기 위해 명절, 휴식일 따로 없이 사전 취재를 다녔다. 결혼 이튿날, 본가집에 가는 대신 <연변노래자랑> 촬영차 도문으로 향했고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각종 이벤트에 전력하면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 덕에 입사 17년간 10여차례 우수선진사업일군으로 평의받았다.
방송업무를 깐깐히 해오는 한편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8년 처녀작 <사랑 더하기> 발표를 시작으로 성인가요 30여수, 아동가요 40여수를 창작, 발표했다. 그중 다수 가요들은 국가급 상도 10여차례 수여받았다.
오늘도 성장의 길을 걷고 있는 ‘나’
‘기자’로서 열과 성을 다해온 나에게 또 한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2018년 가을, 연변라지오조선어방송 문예부 부주임 직을 맡게 되면서 평소 좋아하던 음악분야를 책임지고 사업하게 되였다.
선전보도 사업의 매체융합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맞이하게 된 시점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새로움과 다양성에 대한 추구였고 그만큼 어깨도 무거웠다.
<매주일가> 프로듀서로서 매체융합시대에 발맞춰 시대성, 민족성과 지역성이 있는 새 노래의 편집, 제작에 힘썼다. 한편 연변뉴스 APP와 위챗 등에 악보를 올리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귀로만 듣던 데로부터 보는 재미까지 더해 융합매체 프로그램 혁신에 일조했다. 특히 전염병 예방, 통제 기간 초연 없는 전쟁터에 뛰여든 백의천사들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주기 위해 록음실과 제작실을 번갈아가며 근 3개월간 연장근무를 했다. 그렇게 백의천사를 노래한 가요 10여수가 탄생되였고 뮤직비디오로 제작해 최전선에서 병마와 용감히 맞서 싸우는 백의용사들의 숭고한 로고에 바쳤다.
‘휴대전화+보이는 라지오+전통방송’ 3자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융합매체 문예프로그램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나에게 또 다른 분야의 도전과 책임이 주어졌다. 그것은 바로 ‘연출’이라는 직책이였다.
40명 내지 100여명의 출연진, 스탭진과 어울리면서 문예야회를 이끌어가야 했고 2시간 내지 4시간 남짓한 생방송 문예프로 야회의 가무, 소품, 토크와 사전록화 등 여러가지 요소를 하나로 관통하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가려면 철저한 사전준비와 세심한 대본작성이 필요했다.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전력으로 자신에 대한 요구를 높여갔다.
처음 걷는 초행길에 비록 어색함이 잔뜩 묻어있었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이어지는 도전은 나로 하여금 마법 같은 방송사업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게 했다.
방송이 좋아서, 방송을 사랑해서 앞으로도 도전을 멈출 수 없다. ‘기자’라는 숙명의 길에서 각본 없는 이 드라마를 알차게 엮어가기 위한 나의 무한도전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