웽그리아가 배출한 세계적인 음악거장 리스트는 당대의 가장 뛰여난 피아노 대가였고 전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주자였다. 그런 그가 한번은 독일의 어느 작은 도시에 머물게 되였다. 리스트가 투숙한 호텔 로비에는 연주회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연주자의 략력을 보니 ‘음악가 리스트의 제자’라고 버젓이 씌여있었다. 그런데 리스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제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한편 그 무명의 연주자도 리스트가 그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연주자는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하다가 끝내 리스트를 찾아가 창백한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저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연주 실력도 그닥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라고 자칭하면 저에게 수업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이 생기지 않을가 하여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제 음악회는 당장 취소하겠습니다.”
무명연주자의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들은 리스트는 그더러 그 자리에서 한번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했다. 그 무명연주자가 피아노를 칠 때 리스트는 가담가담 연주를 멈추게 하고 여기저기 잘못된 부분을 자세하고 성의껏 지적해준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젠 내 제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스승 리스트도 연주회에 찬조하고 출연할 것이라고 알리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당초에 내 제자라고 거짓 선전한 것은 분명 잘못이였습니다.”
리스트가 찬조하고 출연한 연주회는 대성공을 이루었고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로 되였다.
무명연주자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즉시 리스트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기에 리스트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나아가서는 진짜로 그의 제자가 되는 영광까지 얻을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해변에서 12킬로메터가량 떨어진 대서양의 황량한 작은 섬인 로벤섬은 험한 파도로 쉽게 다가갈 수 없고 상어떼가 출몰하는 등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17세기부터 감옥과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병원으로 사용되였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지옥의 섬으로 불리울 만큼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로 전락됐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격리 제도에 대항해 싸운 혁명가 넬슨 만델라는 이곳 4.5평방메터의 독방에서 1964년부터 케이프타운의 감옥으로 이감되기 직전인 1982년까지 생활했다. 백인정권이 정부전복 음모를 꾀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다.
당시 만델라는 이미 나이가 지긋했으나 백인통치자들은 젊은 범인들을 대하듯 그를 잔혹하게 학대했다. 수인번호 ‘46664’를 달고 로벤섬 채석장에서 로역했는데 고역은 오히려 그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만델라는 중범이였기에 그를 간수하는 교도관은 3명이나 되였다. 간수들은 만델라에게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1990년, 갖은 고초를 겪은 만델라는 27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73세에 석방됐다.
석방된 후 그는 수감 당시의 간수들, 그를 테로분자라고 억눌렀던 사람들 그리고 인종차별격리 정권의 전직, 현직 대통령들과 그들의 가족을 직접 방문했다. 내전 직전까지 갔던 당시 남아프리카에 필요한 지도자는 인종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여 적을 끌어안고 서로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만델라와 같은 위인이였다.
1993년, 만델라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노벨 평화상 수상은 남아프리카를 하나로 단합시키고 평화적 방법으로 정치적 목표를 이뤄낸 그의 크나큰 공헌과 헌신을 말해줬다.
1994년 4월 27일, 만델라는 76세에 남아프리카 사상 최초로 흑인이 참여한 민주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만델라의 거동은 또 한번 세계를 놀래켰다.
취임식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나라의 정계 요인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 당년에 만델라를 간수하던 옥경 3명도 참석했다.
취임식이 시작되고 만델라는 손님들에게 환영을 표했다. 그는 이토록 많은 존귀한 손님들을 접대할 수 있어 크나큰 영광이라면서 특히는 당년의 3명 옥경이 참석한 것에 대해 최대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3명의 간수들에게 기립을 요청하고 취임식 전체 참가자들에게 그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만델라의 드넓은 흉금과 관용의 정신은 그를 27년이나 잔혹하게 학대한 백인들로 하여금 진땀을 흘리게 했으며 취임식에 참가한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년세가 든 만델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3명의 교도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온 세계가 숨죽였다.
집권한 뒤 만델라는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데클레르크를 부대통령으로 임명하고 자신에게 종신형을 구형한 검찰관을 대통령관저에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다.
또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해 과거에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청문회에 나가 진실을 남김없이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는 대사면의 위대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흑인을 탄압해온 백인에 대한 보복 없는 과거청산의 전범을 세웠다. 인종차별 격리정책의 나라가 모든 인종, 나아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울려 사는 화해의 나라로 바뀌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혁명가 만델라는 340여년의 식민통치와 46년간의 백인종족정권을 퇴장시키고 남아프리카의 통합을 이뤄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복수의 칼끝을 들이대는 대신 관용의 길을 선택한 만델라. ‘분노와 폭력으로는 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몸소 실천한 것이다.
‘원쑤도 사랑하라’는 경전의 그런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범인(凡人)으로서의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럼 왜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리유는 이렇다.
용서는 상생의 길이다. 용서만이 복수와 원한의 악순환을 끊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해준다. 원한이 사무쳐 서로 복수를 하다 보면 결국 둘 다 죽고 만다. 복수를 하면 당분간은 통쾌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자기한테도 좋을 점이 없게 된다. 닦은 덕이나 지은 죄,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돼있는 것이 세상의 리치이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복수로 한생을 랑비할 것인가? 혹은 복수를 대대손손 대물림되게 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용서하고 풀어주는 아량과 용기가 필요하다.
용서해야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스어 용서라는 단어의 어원은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케 하다’이다.
용서를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첫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여 결국 본인을 해치게 된다. 용서하지 않아서 화병이 드는 경우가 많다. 미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용서이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내재되여있는 분노와 미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나는 한창 나이에 사기를 당해 원한을 품게 되였고 한동안 그 원한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결국 내 인생이 상대방에게 끌려다닌 것으로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기를 당하면 사기군을 원망하고 증오한다. 또한 “세상에 못 믿을 게 사람이야.”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을 믿지 않고 뭘 믿고 살아간단 말인가? 사기를 당한 것도 랭정히 따지고 보면 자기 책임이 크다. 내가 뭔가 리득을 보려고 그를 선택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게 바뀐다. 생각을 바꾸어 원한과 증오에서 해탈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관용과 포용, 용서와 화해에 관한 위인들의 이야기는 나를 사색하게 만들었고 깨달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