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15
신춘
(1907-1934)
조선족, 량도익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27년, 광주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학해 광주봉기에 참가했다. 봉기가 실패하자 길림성 화룡현에서 계속해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1930년 봄,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동북 첫 홍색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의 주요 창립자의 한사람이고 평강유격대의 창립자, 총지휘이며 중공연화현위 군사부장,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장을 력임했다. 1931년 2월, 신춘은 훈춘현정부 소재지에서 반일전단지를 인쇄, 살포하던중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수감됐다. 1934년 6월에 석방된 지 얼마 안되여 일본헌병대 특무에 의해 암살되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신춘은 부모를 따라 중국 동북으로 왔다. 1927년, 그는 북만에서 조선혁명자를 만나 그들의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얼마 후, 신춘은 광주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학해 그해 12월, 광주봉기에 참가했다. 봉기가 실패하자 그는 학업을 그만두고 길림성 화룡현으로 전이, 계속해 반제반봉건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1930년 4월, 중공연변특별지부는 ‘붉은5월투쟁행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조건이 허락되는 지역에서 쏘베트정권을 건립할 데 관한 구호를 제기했으며 신춘을 군중토대가 좋은 화룡 약수동에 파견해 ‘붉은 5월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신춘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5월, 신춘은 약수동일대에서 농민군중을 지휘해 반일시위, 폭동을 전개, 그들은 주구를 몰아내고 지주와 싸우며 지주의 재산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투쟁을 펼쳤다. 5월 27일, 약수동인민들은 경축대회를 열었다. 신춘은 이 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정식으로 설립되였음을 선포했다. 이는 동북지역의 첫 쏘베트정부였다. 대회에서는 쏘베트정부 위원을 선거하고 농민적위대를 설립했다.
얼마 후, 중공연변특별지부의 ‘5.30폭동’을 일으킬 데 대한 지시에 따라 신춘은 약수동 및 주변 일대의 농민군중들을 동원해 약수동적위대를 골간으로 하는 습격대를 구성했다. 5월 30일 밤, 그들은 투도구에 잠입해 해란강 량안의 백여명 농민폭동대와 함께 투도구 거리를 포위했다. 신춘은 습격대를 지휘해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놓고 투도구일본령사분관을 습격했으며 친일 ‘조선인민회’개최지를 불살랐다. 이는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설립된 후 규모가 비교적 큰 첫 폭동이며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얼마 후, 투도구일본령사분관은 약수동일대를 대수색했다. 100여명 청년용사들이 체포되였으며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성장하기도 전에 말살되였다.
약수동쏘베트정권은 비록 며칠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정권의 건립은 동북지역에서 처음으로 농민이 정권을 탈취하는 기치를 높이 추켜들었다. 이는 동북인민들의 반제반봉건투쟁의 혁명사기를 대대적으로 진작시키고 일본괴뢰 반동세력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으며 동북인민혁명투쟁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930년 7월, 중공평강구위는 약수동에서 제1차 당원대표대회를 소집, 회의는 평강구유격대와 각 지역 적위대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신춘을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신춘의 노력을 거쳐 약수동, 소양구, 대양구, 장인강 등 지역에서 농민적위대를 골간력량으로 하는 평강구유격대가 정식으로 설립됐다.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격대원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이면 지정 장소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신춘의 령도하에 유격대의 군사, 사상 자질이 크게 제고되였다.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유격대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신춘은 유격대를 거느리고 적들의 거점을 습격했다. 그러다 한 전역에서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1930년 10월초, 신춘은 중공연화현위 제1임 군사부장으로 임명됐다. 인민무장력량을 발전, 장대시키기 위해 신춘은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각 구, 촌을 누비면서 농민군중들을 동원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유격대는 평강구를 중심으로 개산툰, 달라자구, 삼도구까지 신속히 발전했다. 신춘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였고 중공동만특위는 그를 훈춘현에 파견해 치료받게 했다.
1930년 10월, 중공훈춘현위가 건립되고 신춘은 훈춘현당위 군사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이름을 량도익으로 고친 후 대황구일대에서 농민운동을 령도했으며 군중들을 조직해 악패지주와 싸우고 친일분자들을 처단했다. 1931년 2월, 친일주구의 밀고로 인해 대황구 북곡촌의 한 농민의 집에서 전단지를 인쇄하던 신춘은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됐다. 1934년 6월, 신춘은 연길일본헌병대 특무에 의해 암살됐다.
16
주운광
(1911-1934)
산동성 황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 1929년초, 당조직의 파견으로 동만에서 사업,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후, 주운광은 중공동만특위 순시원으로 임명됐다. 1932년 9월, 주운광은 구국군 제5혼성려 왕옥진부 정치부 주임, 구국군 결사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1933년 7월, 주운광은 중공훈춘현위 서기로 임명됐고 1934년 여름, 중공동만특위 비서장으로 전근됐다. 안도현에 내려가 사업을 검사하는 도중에 일본괴뢰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밀영에서 료양중에 체포되여 잔인하게 살해되였다. (2015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주운광은 어릴 적 학당에서 공부했다. 1926년부터 상해대학에서 재학, 그 기간 학생운동에 적극 참가하고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27년, 대혁명의 물결 속에서 주운광은 선후로 상해, 광주 등 지역에서 학생운동에 참가, 학생들을 조직해 반제, 반군벌 투쟁에 참가했다.
1929년초, 당조직은 주운광을 동북에 파견했다. 군중과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보따리장수’로 신분을 위장한 후 촌을 찾아다니면서 혁명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얼마 후, 주운광, 오빈과 구성태 등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연길에서 훈춘현 대황구, 천수동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하고 군중들을 발동해 ‘반일회’ 등 각종 군중성 조직을 조직했다.
1931년 ‘9.18’사변 후, 주운광은 중공동만특위 순시원으로 임명되고 1932년 봄, 중공훈춘현위 사업도 겸했다. 그는 전부의 정력을 항일무장을 건립하는 데 몰부었으며 공산당원 오빈 등과 함께 자금을 마련해 10여명으로 이루어진 유격대를 건립했다. 1932년 9월, 주운광은 일부 대원들을 거느리고 동흥촌에 주둔한 구국군 제5혼성려 왕옥진부에 가입해 구국군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얼마 후, 구국군은 결사대를 조직했고 주운광이 대장을 맡았다. 결사대는 구국군중에서 자질이 가장 높은 대오였다. 주운광은 구국군에서 매우 높은 위망을 갖고 있었고 항일에 적극적이고 용감한 사병들을 단결했다.
1933년 7월, 주운광은 중공훈춘현위 서기로 임명됐다. 그 기간 ‘1.26지시편지’정신에 근거해 그는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참답게 관철, 집행하고 유격대와 기타 항일무장의 관계를 개선했으며 각 항일의용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펼치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3월, 동만 각 현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합병되였다. 그해 여름, 주운광은 중공동만특위에 파견돼 비서장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위 왕덕태 등과 함께 상의를 거쳐 각 항일무장을 련합해 항일련합군 지휘부를 설립하기로 했다. 왕덕태를 지휘로, 주운광을 부지휘로 임명했으며 항일련합군 지휘부가 10여갈래의 항일무장으로 구성되고 그 인수는 1000여명에 달했다. 그해 늦가을, 일본괴뢰군이 항일무장에 대한 대규모적인 군사‘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주운광은 치밀한 반‘토벌’계획을 제정하고 현마다 시달상황을 검사했다. 그들이 안도현에서 사업을 검사하는 도중에 일본괴뢰 ‘토벌대’와 마주쳐 격렬한 전투에서 주운광은 중상을 입었다. 그 후 밀영에서 병을 치료하다가 불행히 체포됐다. 적들은 그가 중공동만특위 비서장이며 훈춘유격대의 창시인임을 알고 그를 폭행하면서 중공동만특위 기타 지도자의 정황을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주운광은 입을 꼭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속수무책인 적들은 결국 그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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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림
(1910-1935)
조선족, 길림성 연변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 1930년 여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5년 2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제2사가 왕청에서 설립, 리광림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고 3월에 중공동만특위 선전부장, 공청단동만특위 서기대리로 임명되였다. 1935년 12월, 그는 2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녕안현 강남산 동툰에서 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에 일본괴뢰군에 의해 포위되였다. 리광림을 비롯한 13명 동지들이 불행히 체포되고 그 후 살해되였다.
리광림은 소년시절에 한족, 조선족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생활난으로 중퇴했다. 그때 그는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9년초, 아버지를 따라 왕청현의 사촌동생 집을 방문한 기회에 녕안현 남호두일대에서 중공녕안특별지부의 령도하에 현지 농민들을 발동해 조세납부를 반대하는 투쟁을 펼쳤다. 그해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 1930년 여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9.18’사변 후 리광림은 공청단녕안현위 서기로 임명됐다. 그는 당의 항일 주장과 정책을 널리 선전하고 단조직을 적극 건립, 발전시켰으며 청년들이 항일투쟁에 참가하도록 동원했다. 1933년초, 일본군은 길동지역에서 대규모적인 진공을 발동, 많은 항일구국군들이 해체되였다. 각 지역의 반일무장을 단결하고 항일력량을 부단히 장대시키기 위해 중공녕안현위는 리광림을 녕안 성남부와 상툰에 파견, 왕덕림 구국군에서 사업하던 공산당원 리연록, 맹경청 등에게 ‘유격대가 각 항일부대와 련락을 갖고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을 구성해 적후유격전을 견지할 데 관한 중공녕안현위 지시’를 전달하게 했다. 그해말, 리광림은 중공만주성위 길동국으로 전근, 상무위원으로 되였다. 1934년 4월, 그는 공청단길동국 서기 겸 길동국 순시원으로 임명되였다.
1935년 1월, 항일대오를 발전, 장대시키기 위해 당조직은 녕안, 밀산, 동녕, 목릉, 발리와 왕청 등 지역의 반일의용군, 항일산림대, 구국군을 조직해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을 설립했다. 리광림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길림성 왕청현일대에서 시세영과 부현명 등을 협조해 개편사업을 진행했다. 그의 세심한 설복교양은 광범한 장병들의 긍정과 옹호를 받았고 개편사업이 순리롭게 완수되였다. 그해 3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제2사가 왕청에서 설립, 리광림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35년 겨울, 일본침략자들은 대량의 병력을 결집해 녕안의 항일무장을 미친 듯이 ‘토벌’하면서 항일무장을 소멸하려고 시도했다. 각 항일부대는 군수물자가 엄중히 부족했다. 위급한 정황에서 제2사 사장 부현명이 몇명을 거느리고 삼도하자 남방에 가 4퇀 3련을 련계해 지원하고 리광림은 4련, 5련의 일부 전사들을 거느리고 가자구일대에서 물자와 의복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리광림과 20여명 전사들이 녕안 강남 산동툰에서 물자를 마련하고 있을 때 적들에게 발각됐다. 12월 24일, 일본괴뢰군에 의해 산동툰 유씨집 오두막 뒤의 한 허줄한 빈집에 포위되였다. 2시간 남짓한 전투를 거쳐 수적으로 렬세에 처한 아군은 절반의 전사가 희생되고 리광림이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그 후 적들은 백방으로 그를 설복하고 매수하면서 그한테서 당조직의 활동정황을 알아내려 했다. 적들의 음모궤계를 훤히 알고 있는 그는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격양된 어조로 한간의 매국 죄행을 낱낱이 폭로했다. 분노한 적들은 당장에서 그를 살해했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