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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2-04-01 14:41:42


(전호 이음)

21
리학충
(1910-1936)

리종학이라고도 하며 산동성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생활고로 인해 10살 때 홀로 길림성 반석현에 왔다.  ‘9.18’사변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4년 겨울,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파견으로 중공동만특위 림시사업위원회 위원으로 되였다.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 상무위원, 조직부장을 맡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치부 주임을 겸했다. 1935년 5월 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정치부 주임,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정치부 주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정치부 주임을 력임했다. 1936년 7월, ‘하리회의’에서 중공남만성위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8월 9일 무송현 대염장전역에서 희생되였다.(2014년, 민정부가 공포한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10살 되던 해, 리학충은 생계유지를 위해 홀로 길림성 반석현에 왔다. 얼마 후 그는 공청단에 가입, 중공당조직의 령도하에 반석, 길림 등 지역에서 당의 지하공작에 참가했다. 1931년 ‘9.18’사변 후 그는 중공당조직의 파견으로 쏘련에서 학습, 얼마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겨울, 리학충은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부름을 받고 귀국, 동만지역에서 당의 령도사업에 참가했다. 동만에 온 후 그는 중공동만특위림시사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1935년초, 중공동만특위확대회의에서 리학충은 특위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3월 21일, 왕청현 요영구에서 열린 동만특위와 2군 독립사 정치위원 련석회의에서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치부 주임(겸임)으로 선거됐다. 그해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으로 설립되였고 리학충은 군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됐다.
남만유격구, 동만유격구를 련합하기 위해 리학충은 주동적으로 부대를 거느리고 원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5년 8월초, 그는 150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안도현 처창즈에서 출발, 일본괴뢰군의 겹겹한 봉쇄선을 뚫고 장백산 원시림을 가로질러 8월말, 몽강현(오늘의 정우현) 서북부에 위치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유격구에 도착, 나얼훙에서 성공적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합류했다. 그해 10월 4일, 나얼훙 로룡강 서쪽 비탈 우가구에서 제1군, 제2군 간부회의가 소집됐다. 회의에서 리학충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군장 양정우 등 령도간부들은 제1군, 제2군과 중공 동만, 남만 특위를 대표해 동북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동북인민혁명림시정부와 동북항일련군 총사령부를 설립할 데 관한 중대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의견을 교류했다. 이 밖에도 쌍방은 련합해 안도현성을 공략하고 안도를 중심으로 하는 료길변구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기로 상의했다.
1936년 1월 중순, 리학충은 부대를 거느리고 녕안현 경박호항일유격근거지에서 주보중이 령도하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과 회합했다. 1월 20일, 두 군 당위특별련석회의를 소집, 회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2개 사로 확대, 편성하고 산하에 6개 퇀을 설립, 리학충이 제1사 정치위원을 겸임하도록 결정했다. 그해 3월 상순,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되고 3개 사로 확충한 후 리학충을 정치부 주임, 군당위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후 2군 군부는 1사, 2사를 거느리고 남만으로 진군, 동북항일련군 제1군과의 련합작전을 실현했다. 그해 4월초, 리학충과 군장, 정치위원은 부대를 령솔하여 돈화현 경내로 진입, 4월 8일, 2군은 따푸차이허에서 매복작전을 통해 500여명 일본군, 250여명 괴뢰경찰과 격전을 펼쳤다. 대부분 적들이 섬멸되였다. 무송으로 전이 도중 리학충은 다리에 중상을 입고 무송현 대감장 밀영에 호송되여 치료를 받았다. 그해 7월초, 금천현 하리에서 동만, 남만 당과 1군, 2군 고급간부회의에서 리학충은 중공남만성위 위원으로 임명됐다.
1936년 8월 9일, 대염장밀영이 갑자기 위자위단 100여명 괴뢰군의 포위를 당했다. 리학충은 인차 밀영 전체 인원들을 조직해 적들과 격전을 벌렸다. 하지만 이 전역에서 리학충은 장렬히 희생되였다.

22
사충항
(1906-1936)

길림성 영길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고 1929년, 길림성방군(吉林省防军) 제27려 제677퇀 제3영 반장을 맡았다. ‘9.18’사변 후 왕덕림을 따라 항일에 뛰여들었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소속한 부대가 동북항일유격총대(이후 동북항일구국유격군으로 개칭)로 개편하면서 그는 제3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 1월, 부대를 이끌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참가했다. 그 후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 사장,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사, 제5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 10월, 도가선(도문-가목사, 이하 같음) 로송령에서 일본 군용렬차를 습격하는 도중 중상을 입고 쏘련으로 치료하러 가는 길에서 희생되였다. 2015년, 민정부로부터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되였다.

1926년, 길림독군서위대탄(吉林督军署卫队团)의 병사로 되였고 1929년에는 륙군 13혼성려 7퇀 3영 왕덕림부대에 가입했다. 중국공산당 항일주장의 영향과 사충항 등 하급 장병들의 들끓는 애국격정의 추동하에 1932년 1월 왕덕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항일의 기치를 들었다. 2월 8일, ‘길림중국국민구국군’을 정식으로 설립했다. 얼마 후, 구국군은 보충퇀을 설립하고 중공동만특위가 이 부대에 파견한 공산당원 리연록이 보충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사충항이 소속되여있는 부대도 이 퇀에 가입, 그는 제9련 부련장으로 되였다. 리연록의 영향하에 사충항은 당의 열성분자로 되였다. 2월 20일, 구국군이 돈화현성을 공략하고 24일에는 회군하여 액목을 진공, 28일에는 또 요충지 교하를 공략했다. 얼마 후, 그는 련장으로 추임됐다. 3월 15일, 경박호련환전역이 결속된 후 사충항은 3영 영장으로 승급했다. 1933년 1월 1일, 구국군은 목릉 마도석 일대에서 적들과 격전을 벌렸다. 마도석반격전이 결속된 후, 리연록이 보충퇀을 이끌고 ‘동북항일유격총대’를 설립, 리연록이 총대장, 사충항은 제2퇀 퇀장을 맡았다. 1월 하순, 총대는 또 동북항일구국유격군으로 개편됐다. 이 기간 사충항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5년 2월, 사충항은 부대를 이끌고 동녕현 이도구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해 봄과 여름 교차시기, 훈춘, 왕청 두 현의 유격대와 사충항 부대, 시세영 부대 등 항일군 3000여명은 련합으로 동녕현성을 공략했다. 이번 전역에서 사충항은 다리, 복부, 왼쪽 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해 가을, 동만의 일본군 사령과 괴뢰군 7려 려장은 ‘간도군관할구역’ 사충항의 고향친구인 가참모를 앞세워 투항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가참모가 사충항에게 려장 직무를 주고 ‘군사경비’ 2만여원을 지불하는 등 우대조건을 제시했지만 사충항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군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는 전체 장병대회를 소집, 장병들이 단결해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했으며 당장에서 가참모를 총살했다.
1936년 1월, 사충항이 부대를 거느리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참가했다. 3월, 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됐고 그가 2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적들의 ‘토벌’을 피하기 위해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왕청현 석두하자, 라자구에서 출발해 녕안으로 진공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40여일간의 장정을 거쳐 마침내 5군과 합류했다. 7월, 동북항일련군 2군이 항일련군 제1로군 서렬에 편입되고 2군 2사는 제5사로 개편, 사충항은 5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10월, 일본군은 또 병력을 집중해 항일련군에 대해 전례없던 겨울철 대‘토벌’을 진행했다. 일본의 ‘토벌’계획을 짓부시기 위해 사충항은 부대를 이끌고 도가선 로송령구간의 일본 군용차량을 공격, 일본군의 공급선을 파괴했다. 격전중 그는 또 한번 부상을 입었다. 사충항의 병세가 악화되고 밀영에 약이 부족하자 조직은 그를 쏘련에 보내 치료받도록 했다. 하지만 쏘련으로 가는 도중에 사충항은 불행하게도 희생됐다.

23
왕덕태
(1907-1936)

료녕성 영구현의 한 소작농 가정에서 출생했고 생계를 위해 1926년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연길현반제동맹회 조직부 부장을 력임했다. 1932년 연길현반일유격대대 정치위원으로 임명, 1933년 9월, 중공동만특위 위원, 군사부장으로 당선됐다. 1934년 3월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치위원, 독립사 사장,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 겸 제2군 군장을 력임했다. 1936년 11월 7일, 몽강현 소탕하(오늘의 강원구)전역을 지휘하다가 희생됐다. (2014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항일군체 명록에 수록)

1926년, 왕덕태는 연길현에 이주했다. 왕덕태는 ‘추수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여들었고 얼마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12월, 그는 연길현 ‘반제동맹’ 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
1932년 봄, 중공동만특위는 또 군중들을 발동해 ‘춘황투쟁’을 벌렸다. 얼마 후,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왕덕태는 로투구탄광에서 로동자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반제동맹’을 건립하고 서기를 맡았다. 그해 4월, 조직은 그를 로투구유격대에 파견,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말, 연길현 왕우구에서 연길현반일유격대에 참가하고 소대장, 중대장, 대대 참모장, 정치위원 등 직무를 력임했다. 그해 연길반일유격대는 적들과 50여차례 전역을 펼쳤다. 1933년, 연길현내에 왕우구, 석인구, 삼도만, 위자구 등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1933년 9월, 중공동만특위는 확대회의를 소집, 왕덕태를 특위 위원으로 임명하고 군사부장을 맡아 연변 각 현 유격대 항일투쟁을 령도하도록 했다. 그해 12월, 그는 직접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를 보위하는 전투를 지휘, 60여명의 병력으로 700여명 적들의 대‘토벌’을 저격해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3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의 반일유격대를 토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정식으로 건립, 왕덕태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2군 독립사의 건립과 중공동만특위 령도간부들의 조정으로 왕덕태는 연변지역 여러 민족 인민들을 령솔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중임을 맡았다. 그는 독립사 기타 지도자들과 함께 수차례 전역을 통해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고 안도, 연길, 왕청, 녕안, 돈화 등 지역에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의 령도하에 2군 독립사는 재편성되였고 왕덕태가 사장을 맡았다. 5월 2일, 그는 하얼바령에서 적들의 국제렬차를 전복한 저명한 전투를 령도해 승리를 거두었다. 5월 30일, 독립사는 정식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확대, 편성되였고 왕덕태를 군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령도자들이 안도현 미혼진에서 회의를 소집, 부대를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재편성하고 산하에 3개 사를 설립하며 왕덕태를 군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7월, 중공 동만, 남만 당조직 및 항일련군 제1군, 제2군 령도자들이 금천현 하리항일근거지 혜가구에서 련석회의를 소집, 동북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합병하고 양정우를 총사령, 왕덕태를 부총사령 겸 제2군 군장으로 임명했다. 11월초, 왕덕태는 직접 4사 1퇀과 2퇀 3련, 6사 1부로 구성된 200여명 병사들을 지휘해 림강, 무송 두 현의 접경지역인 대양차 일대에서 2개 련의 괴뢰군을 포위했고 그들에게 맹렬한 군사, 정치 공세를 들이댔다. 적들은 하는 수 없어 전부 투항했다. 대양차전역이 결속된 후 왕덕태는 부대를 거느리고 무송, 몽강 접경지역에 위치한 소탕하촌에 가 4사 2퇀 1련, 2련과 회합했다. 11월 7일, 괴뢰기병 제7퇀 600여명의 습격을 받았다. 왕덕태는 침착하게 300여명 전사들을 지휘해 공격을 가했다. 이번 전역은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이어졌고 적을 추격하는 도중, 왕덕태는 불행하게도 희생되였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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