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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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
(1898-1936)
조선족, 본명은 김훈이고 별명은 필사제이며 조선 평안북도에서 출생했다. 1925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30년 8월, 중앙군위의 파견으로 중공동만특위 위원 겸 군위 서기를 력임, 《동만유격대사업대강》, 《동만적위대사업대강》을 제정하고 동만 각 현 로농적위대를 건립했다. ‘9.18’사변 후,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2년 4월, 중공반석중심현위를 지도해 반석로농의용군을 지도했다. 1932년 7월 후, 중앙군위의 명령으로 강서중앙쏘베트구에서 림시중앙정부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을 맡았다. 1934년, 홍군 장정시 군위 간부탄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초, 홍15군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 2월, 동부원정 도중 선봉영을 인솔해 황하를 건넌 후 부상을 입고 희생됐다.
1919년, 양림은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 가 조선의 ‘3.1’반일독립운동에 참가, 이로 인해 일본통치자의 추적대상으로 되였다. 그해 여름이 거의 될 무렵, 그는 비밀리에 길림성 통화현 하니하에 와 조선독립운동단체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그는 왕청현 서대파로 전이해 조선독립운동단체의 사관학교에서 군사교관을 맡았다. 그해 10월, 그는 대오를 거느리고 화룡현에서 일본침략자들을 타격한 저명한 전역인 ‘청산리대첩’에 참가했다.
1920년말, 양림은 상해로 갔다. 1921년 4월, 그는 운남강무학교 제16기에 입학했고 제6대 제1구대로 편입됐다. 1924년초, 중국국민당 륙군군관학교(1929년에 국민황포군관학교로 개명함)에 입학해 교련부 학생총대에서 사업했다. 1925년 1월, 제3기 학생대 제4대 상위대장을 맡고 6월 23일,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1월,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임명됐다. 1927년 8월, 당조직은 양림을 쏘련에 파견해 군사를 학습하게 했고 1930년 여름, 그는 쏘련에서 학습을 마친 후 상해로 돌아왔다.
1930년 6월, 중앙군위는 양림을 중공만주성위에 파견해 군사사업을 하게 했다. 9월 20일, 그는 중공동만특위 위원, 동만특위 군위 서기로 임명됐다. 그는 인차 각 현에 사람을 파견해 현위 군사부를 건립함으로써 유격대와 적위대에 대한 령도를 강화했다. 1931년초, 그는 연길에서 훈춘현 밀강일대로 가 군중투쟁을 령도했다. 중공동만특위 군위 서기 력임기간 그는 동만유격투쟁의 경험을 총화해 일련의 군사서류들을 제정했다. 그중《동만유격대사업대강》은 그가 1931년초에 작성한 중요한 군사저작으로서 30년대 초기 동만유격투쟁경험의 총화이며 가장 먼저 유격전을 론술한 군사문헌중의 하나이다.
1931년 ‘9.18’사변 후, 양림은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2년 4월, 그는 성당위 지시에 따라 중공반석현위를 협조해 하마하자에서 농민반일 대폭동을 발동했다. 그는 중심현당위를 협조해 적색유격대를 토대로 1932년 6월 4일, 반석로농의용군을 정식으로 설립했다.
1932년 7월, 중앙군위는 양림을 강서중앙쏘베트구역에 파견, 중화쏘베트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1933년 3월, 그는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 총동원 무장부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1934년, 그는 중앙홍군의 주력을 따라 장정의 길에 올랐고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을 맡아 당중앙, 중앙군위기관과 중앙지도자들의 안전을 수호함과 동시에 간부들을 양성, 비축하고 주력홍군에 간부를 수송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1936년초, 양림은 홍15군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2월, 당중앙과 중앙군위는 대일작전을 실현해 화북의 위기를 막기 위해 황하를 건너 동부원정을 하기로 결정했다. 중앙군위는 양림에게 한개 선봉영을 지휘해 황하를 건너는 임무를 맡겼다. 선봉영이 맞은편 강기슭과 수십메터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적들에게 발각, 양림은 신속히 배를 기슭에 댄 후 적들을 향해 맹공격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적들은 하가오 방향으로 도망쳤다. 양림은 선봉영을 령솔해 맹렬히 추격했고 하가오를 향해 진공했다. 그는 적들의 비발치는 탄우 속에서 선봉영을 지휘해 촌입구에 위치한 또치까를 폭발시킨 후 계속해 적군 진지의 중심부위를 진공하여 하가오촌을 점령하고 홍군 대부대가 도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도록 보장했다. 2월 23일 오전, 양림은 계속해 부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진격했고 전투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자기의 부상보다 전투 정황을 근심하면서 동지들에게 “전방 정황은 어떻습니까? 모주석께서 강을 건느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극심한 부상을 입은 그는 응급구조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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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화
(1908-1937)
녀, 조선족, 조선 함경남도 단천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30년, 가족을 따라 훈춘현으로 이주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 재봉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1937년 3월 하순, 안순화가 령도하는 재봉대는 적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는 동지들을 엄호하여 철수시 적들에게 체포되여 후에 살해되였다. (2015년, 민정부가 공포한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1930년, 단천군에는 흉년이 들었고 안순화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 리봉수와 함께 길림성 훈춘현 포대촌으로 이주했다. 촌에 온 후 남편 리봉수는 지주 한희삼의 토지를 임대해 농사를 지었고 안순화는 한희삼 집에서 삯일을 했다. 그해 10월, 안순화와 남편은 반제동맹에 참가했다.
1931년초, 안순화는 투쟁중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후, 당의 령도하에 안순화는 군중들을 단결해 일본침략자 및 한희삼 반동무장과 투쟁을 벌렸다. 그는 부근의 남산, 류정평, 송림, 묘령, 양포, 동아라 등 촌에 심입해 부녀회, 아동단을 설립, 일부 중소지주집의 자녀들도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당시 그의 남편은 포대촌당지부 서기를 맡고 현당위 통신련락 임무도 책임졌다. 상급 문건과 현당위에서 발부한 전단지는 리봉수를 통해 일부 기층조직에 전달되고 안순화는 남편을 협조해 당조직이 맡겨준 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했다.
1932년 6월, 현당위는 안순화를 훈춘현당위와 연구구위 소재지인 연통라자항일근거지로 전이시키고 그를 훈춘현부녀위원회 위원 및 후루베촌(葫芦鳖村) 당지부 위원, 부녀주임으로 임명했다. 당시 후루베촌에는 1개 련의 구국군이 있었는데 그는 구국군과 함께 항일에 뛰여들었다. 그해 겨울, 연통라자항일유격근거지가 쏘베트정권을 건립, 혁명형세가 급속으로 발전했으며 그녀는 근거지 녀성들을 적극 발동, 조직해 유격대의 후근사업을 펼쳤다.
1933년 가을부터 1934년 봄까지 적들이 근거지에 대해 련속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안순화는 7명 녀성들을 거느리고 4대의 재봉기로 유격대에 군복을 만들어주었다. 1934년 3월, 녀성 재봉원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에 가입, 재봉대를 설립한 후 그녀가 대장을 맡았다. 그해 4월, 재봉대는 왕청현 금창으로 전이, 적들의 지속적인 ‘토벌’ 속에서 생산을 견지했다. 1935년, 사업의 수요로 당조직은 그를 부대병원에 배치하고 그녀에게 취사 그리고 부상병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겼다. 그의 남편 리봉수는 병원의 원장을 맡았다. 그해 5월, 병원은 부대와 함께 녕안현 마장 이도구 밀영으로 전이했다. 그해 가을, 부대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녕안현 마장 이도구 밀영을 떠났다. 1936년 가을, 부대병원과 함께 그는 녕안현 동경성의 한 산골로 전이했다.
1937년 3월 하순, 안순화가 령도하는 재봉대와 리봉수가 령도하는 병원은 심산의 밀영에 주둔해있었고 그녀는 부대의 량식과 탄약을 보관하는 임무도 맡았다. 어느 날, 부대 지도자들이 밀영에서 회의를 마치자마자 적들이 습격했고 쌍방은 격전을 벌였다. 부대 후근인원들은 인차 산으로 철퇴해 량식, 탄알과 재봉기를 숨겨놓았다. 적들을 격퇴시킨 후 항일련군 대부대는 인차 기타 지역으로 전이했다. 이튿날, 안순화가 적들이 밀영으로 포위해오는 것을 발견, 병원 원장인 리봉수는 10여명의 부상병들과 재봉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뒤산으로 철퇴했다. 그들을 엄호하던 안순화는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됐다. 극악무도한 적들은 안순화를 고문했지만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안순화는 적들의 잔인한 폭행으로 인해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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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1903-1937)
조선족, 본명은 김광진이며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08년초, 부모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상천평(광소촌)으로 이주했다. 1929년, 룡정대성중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교수를 엄호로 10여명 혁명청년들과 함께 반일활동을 펼쳤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그해 가을, 왕청 라자구에서 40여명 무장대오를 건립했다. 1936년 9월, 동북항일련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됐다. 1937년 10월 12일, 김근은 화천 칠성라자산에서 숙영시 적들에 의해 살해되였다.(2020년 퇴역군인사무부로부터 제3패 185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1908년 3월부터 1921년까지 김근은 선후해 광제욕서당, 화룡현 양정학교(광제욕학교), 연길중학, 길림공업학교를 다녔다. 1922년 5월, 남경대학에 입학, 이듬해 생활난으로 인해 중퇴하고 상천평으로 돌아왔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선후로 북장동, 걸만동 등 지역의 소학교 교장으로 임명됐고 그 기간 학생들에게 혁명사상을 전파했으며 농민군중들의 사상각오를 높였다.
1929년, 룡정대성중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교수를 엄호로 10여명 혁명청년들과 함께 반제반봉건 혁명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후에 그의 안해, 동생, 조카, 조카며느리까지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아 선후로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1930년 4월, 김근 등은 흑룡강성 녕안 화안구로 전이했다. 그해 6월, 그는 녕안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9월, 김근은 병치료하러 왕청 라자구로 갔고 그 후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기타 동지들과 함께 라자구에서 군사위원회를 건립했다. 그 후 무장대오를 건립하고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사업에 뛰여들었다.
1931년 여름, 무장대오를 건립해 투쟁을 전개할 데 관한 중공녕안현위의 지시에 따라 김근은 동경성에서 군중들을 발동해 반일회, 아동단 등 단체를 조직함으로써 반일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토대로 ‘9.18’사변 후 북만로농의용대를 건립하고 대장을 맡았으며 녕안, 목릉, 왕청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3년 3월, 김근은 부대를 령솔하여 왕청현 마가툰으로 갔다. 그해 4월, 중공동만특위가 마가툰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중공중앙의 ‘1.26지시편지’ 정신을 전달했으며 김근이 인솔하는 로농의용대를 리연록이 령도하는 동북항일구국유격군 군부 직속에로 귀속시킨 후 선견대로 밀산에 파견했다. 그해 6월, 김근은 부대를 거느리고 밀산 하다하에 이르렀다.
1934년 2월, 중공밀산현위는 회의를 소집, 김근이 인솔하는 로농의용대를 밀산유격대로 재편성하고 김근을 지도원 겸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10월, 중공만주성위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을 건립하고 김군이 거느리는 밀산유격대를 제2퇀으로 재편성했으며 김근을 제4군 참모처 처장으로 임명했다. 1935년 3월, 그는 제4군 제2퇀 퇀장대리로 임명됐다. 1936년 9월, 동북항일련군 제8군이 설립되였다. 이 군은 원래 의란현 토룡산 부근의 지주무장으로서 군장인 사문동은 지주출신이였으며 군내에서 대부분이 아편을 피우며 군대규률이 산만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항일련군 제8군의 령도를 강화하기 위해 김근을 이 군에 파견,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했다. 김근 등 동지들의 공동의 노력하에 제8군의 군대규률이 크게 호전되고 전투력도 점차 제고되였다. 이로 인해 적들은 김근을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했고 거액의 포상금을 내거는 등 수단으로 김근을 살해하려 했다. 1937년 10월 12일 아침, 제8군 제1사 한 변절자의 밀고로 인해 김근은 화천현 칠성라자산에서 살해되였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