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27
리동광
(1904-1937)
조선족,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고 14살 때 부모를 따라 길림성 훈춘현 대황구로 이주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4년 8월, 남만반일총회 회장으로 임명됐다. 11월, 중공남만림시특별위원회 서기 겸 선전부장으로 임명되고 1933년 5월 7일, 중공반석중심현위 서기로 당선됐다. 1936년 7월, 중공남만성위 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 1937년 7월, 리동광은 흥경현(오늘의 료녕성 신빈현) 대와자구에서 부대를 지휘해 작전중 총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2015년, 민정부로부터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되였다.
1930년, 리동광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얼마 후, 중공반동(磐东)구위가 설립되고 리동광은 구위 서기로 임명됐다. ‘9.18’사변 후, 중공만주성위의 호소와 중공반석현위 지시에 따라 그는 반동의 인민들을 발동해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2월초, 중공반석중심현위는 리동광을 현당위 순시원으로 임명하고 리홍광과 함께 특무대(일명 ‘개잡이대’라고 함)를 인솔해 반동일대에서 활동하도록 했다. 1933년 5월 7일, 리동광은 반석중심현당위 서기로 임명됐다. 그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길해철도에서 2개 당지부, 1개 단지부와 6개 공회소조가 설립되였으며 길해철도 로동자들이 항일무장과 련합해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9월 18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건립됐다. 그의 조직하에 당일, 10여개 지역에서도 규모가 부동한 군중대회가 소집되였으며 독립사를 지원하는 모금활동이 일어났다. 10월부터 일본군은 1만여명의 일본괴뢰군을 모집해 반석유격구에 대해 ‘토벌’을 진행했다. 당, 단조직이 불리한 정황에 처하고 군중조직들이 전부 파괴되였다. 그는 현당위와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적들의 공격을 피해 이동했으며 이통, 서안(오늘의 료원), 동풍과 화전 일대에서 새로운 구역을 개척했다. 그가 직접 령도하는 부대는 근 1년 동안 33차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역에서 2차례만 실패하고 전부 승리를 거두었다.
백색테로의 공포 속에서 리동광은 각 지역에 심입해 각급 당조직의 회복, 정돈 사업을 지도했다. 그와 중공반석중심현위 기타 동지들의 노력으로 1934년 8월부터 현당위 산하에 4개 구위, 2개 특별지부, 2개 로동자직속지부가 설립되고 278명 당원이 있었으며 공청단, 반일회, 청년의용군 등 군중조직이 복구되고 발전했다. 8월 20일, 그는 반북에서 남만반일회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남만반일총회를 설립했으며 회장으로 당선됐다. 11월 5일, 중공남만 제1차 대표대회가 림강현 4도 2차에서 소집되고 리동광은 중공남만림시특별위원회 서기 겸 선전부장으로 임명됐다. 중공만주성위 지시에 따라 리동광은 남만유격구에서 지방혁명정권을 건립하는 사업을 적극 전개했다. 1935년 10월 6일, 남만에는 이미 15개 향정부, 56개 구정부가 설립됐다.
1936년 7월 상순, 중공남만 제2차 대표대회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개편하고 공청단남만특별위원회를 항일구국청년단으로 개명했으며 반일회와 농민협회 등 군중조직을 전부 항일구국회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소집된 동만, 남만 특위와 제1군, 제2군 주요 지도간부 련석회의(금천하리회의)는 위증민이 전달한 상급의 지시정신과 동만, 남만 항일투쟁의 실제에 근거해 남만당조직과 동만당조직을 련합한 후 중공남만성위를 건립, 위증민을 성당위 서기로, 리동광을 조직부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10월, 괴뢰만군정부(伪满军政部)는 일본 최고 고문인 사사키(佐佐木)의 지휘하에 ‘동변도대토벌’을 진행했다. 1937년 봄, 반석, 류하, 무송 3개 현당위가 선후로 적들의 파괴를 받았다. 그해 6월, 리동광은 양정우를 협조해 동북항일련군 제1군당위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7월 16일 오후, 부대는 흥경(오늘의 신빈) 영릉 황토강 대와자구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리동광은 양정우 지휘부대를 협조해 적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전역은 밤까지 이어졌고 항일련군부대가 진지에서 철수해 전이하고 있을 때 리동광이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 장렬히 희생됐다.
28
손원금
(1911-1937)
조선족, 화룡현 금곡촌(오늘의 룡정시에 속함) 사람이다.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0년 11월, 금곡촌당지부 서기로 임명되였다. 손원금은 ‘연길폭탄’의 발명자이다. 1932년, 폭탄 제조시 사고로 실명하고 손가락 4개를 잃었다. 1937년 7월,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 적들의 잔혹한 폭행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결국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손원금은 어릴 때 화룡현 달라자 원동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혁명사상을 접하고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선후로 공장, 광산에서 지하사업을 펼쳤다. 1930년 11월초, 중공금곡촌당지부 서기로 임명되고 야간학교를 꾸려 항일구국사상을 선전했다. 1931년 가을, 군중들을 발동해 ‘추수투쟁’을 펼쳤다.
‘9.18’사변 후, 동만항일군민은 일본침략자들의 기고만장한 위세를 꺾어놓고 미친 듯한 ‘토벌’을 짓부시기 위해 중공화룡현 달라자구위의 ‘무기를 제조해 자신을 무장하자’는 지시에 따라 작은 병기공장을 세웠다.
1931년말, 손원금 등은 철공소의 낡은 도구들을 갖고 편벽한 산으로 가 천연동굴 어구에서 천막집을 짓고 병기공장을 세웠다. 그들은 총을 수리하고 검, 창 등 무기들을 제조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했다. 폭탄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손원금과 전우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며 마침내 고려지를 리용해 탄약이 들어있는 상자를 만들었다. 폭발실험을 하는 날, 거대한 폭발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고 실험이 성공했다. 손원금 등은 이 폭탄을 ‘유성(有声)폭탄’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때 적들은 이 폭발소리만 들어도 무기를 버린 채 도망쳤고 전사들은 이를 리용해 적들의 무기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 폭탄은 적들을 놀라게 할 뿐 소멸하지 못했다.
1932년초, 손원금 등은 또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고추가루폭탄’, ‘돌조각폭탄’과 ‘철조각폭탄’을 제조했다. 이런 폭탄들은 적들을 폭발시킬 수는 있지만 많은 부족점이 있었고 사용하기 불편했다. 이에 손원금 등 병기공장 동지들은 경험을 총화하고 지혜를 모아 마침내 위력이 크고 사용이 편리한 ‘연길폭탄’을 제조했다. 점화해야 폭발하는 ‘연길폭탄’은 ‘점화폭탄’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때 제조한 ‘연길폭탄’은 크기와 작용에 따라 특호탄, 1호탄, 2호탄과 3호탄 4개 종류로 나뉘였다. 1932년말, 적들의 ‘토벌’이 더욱 빈번해지고 유격대 대오도 점차 확대되였으며 무기폭탄 수요도 점점 늘어났다. 조건이 간고하고 설비가 낡았으며 재료가 부족한 정황에서 병기공장의 동지들은 최대의 창조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폭탄, 폭약을 제조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총기들도 수리했으며 ‘연길폭탄’도 많은 기능이 증가되여 살상력이 한층 제고됐다. 이는 적들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연길폭탄’의 성공적인 제조는 항일무장의 무기수요를 크게 만족시켜주었다.
1932년말, 폭탄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뢰관이 폭발하면서 손원금은 눈과 손가락에 부상을 입었다. 두 눈은 실명되고 손가락 4개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 항일을 견지했다. 그는 부대와 함께 화룡현 어랑촌, 안도현 처창즈유격근거지에서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으로 부대와 근거지 군중들에게 연주를 해주고 노래를 해줌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1937년 봄, 부대가 남만으로 원정을 떠나게 되자 그는 부대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부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계속해 군중들을 조직해 반일투쟁에 참가했다. 1937년 7월, 그는 팔도하자경찰서에 체포되고 룡정일본총령사관으로 압송되였다. 적들의 잔인한 고문 앞에서 그는 절대 굴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적들에 의해 살해되였다.
29
주수동
(1918-1937)
산동 평도에서 출생하고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훈춘현으로 이주했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공청단훈춘현위 서기, 공청단동만특위 서기를 력임했다. 1935년 4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정치위원으로 임명됐고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1사 정치위원 겸 사당위 서기, 군당위 위원으로 임명됐으며 1936년 7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4사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1937년 4월 24일, 안도현 대사하 로금창전역에서 희생됐다. 2015년, 민정부로부터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주수동은 1918년에 산동성 평도현 한 수공업자 가정에서 태여났으며 9살에 아버지를 따라 길림성 훈춘현으로 이주했다. 1931년, 그는 훈춘진동관중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4월 24일, 그는 동구에 가 구국군에 가입했다. 주수동은 연통라자유격근거지에서 항일유격대에 참가, 이로써 혁명의 길에 올랐다. 당의 양성과 교양하에 그는 인차 진보를 가져왔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선후로 소선대 부대대장, 단지부 서기, 공청단왕청현위 특파원, 공청단동만특위 조직부장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35년 5월, 주수동은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부대에서 사업하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정치위원으로 임명됐으며 공청단동만특위 서기를 겸임했다. 제2군 제1퇀은 청구자를 공략한 후 또 하얼바령 부근에서 일본 군용렬차를 습격하는 전역을 조직했다. 주수동은 이번 전역의 조직자이자 지휘자의 한명이였다.
이번 전역을 통해 적군 30여명을 섬멸하고 일만요원(日满要员) 15명을 생포했다. 그중에는 남만철도주식회사 중요 관원 1명과 일본 장병 1명이 포함돼있었다. 그들은 일본괴뢰화페 수십만원 그리고 대량의 물자를 로획했다. 하얼바령전역의 승리는 동만인민의 항일투지를 불러일으켰으며 일본군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그해 여름과 가을, 주수동은 부대를 거느리고 량병대, 황송전 부근에서 두차례 매복작전으로 일본군 렬차를 습격하고 전부 승리를 거두었다.
1936년 3월, 주수동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1사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6월, 동북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이 제1로군으로 합병한 후 주수동은 제1로군 2군 4사 정치위원으로 임명, 자주 2군 6사와 협력해 남만 및 장백산구유격근거지에서 활동했다. 당시 2군 대오에는 조선족 동지들이 많았다. 주수동이 조선말을 류창하게 하다보니 많은 조선족 전사들은 그와 교류하려 했고 부대에는 여러 민족 전사들이 단결해 항일하는 조화로운 분위기가 농후했다.
그해 9월, 주수동은 4사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무송현 소탕하에서 군장 왕덕태가 지휘하는 150여명 괴뢰정안군을 섬멸하는 전투에 뛰여들고 150여자루의 보총, 2자루 기관총을 로획했다.
겨울이 되자 주수동은 4사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무송현 경내에서 목방을 보위하는 괴뢰군무장을 제거한 후 서강 밀영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때 일본군 5000여명이 밀영에 쳐들어왔다. 주수동은 4사 부대를 거느리고 왕덕태 군장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적군과 10여시간의 격전을 펼쳐 150여명 적들을 섬멸하고 적들의 포위에서 벗어났다.
1937년 4월, 주수동은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현으로 돌아갔다. 부대가 대사하 로금장에서 휴식할 때 괴뢰군 리도선 ‘토벌’대의 습격을 받았다. 리도선부대는 괴뢰군 ‘토벌’대의 ‘정예부대’로서 ‘신선대’로도 불리웠으며 일본제국주의 가장 충실한 주구였다. 아군은 수차례나 이 반동무장을 소멸하려 했지만 번번이 놓쳤고 뜻밖에 로금장에서 마주쳤다.
4사 주력부대는 로금장을 순리롭게 통과하기 위해 1개 소부대를 파견, 동북방향의 묘령 부근에서 경계를 맡도록 했다. 선두부대가 대사하에 다리를 놓고 있을 때 대부대는 강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때 리도선이 200여명을 거느리고 몰래 아군을 진공했다. 주수동 등 지도자들은 신속히 화력을 조직해 적들과 격전을 벌였다. 리도선은 아군에 의해 생포된 후 처형당했다. 한시기 동안 횡포를 부렸던 ‘신선대’는 전부 섬멸당했다. 이번 전역이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나젊은 4사 정치위원 주수동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