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지부생활 >> 사명

사명


날짜 2022-06-15 15:18:21


(전호 이음)
 
30
대극정
(1915-1938)


길림성 돈화현 사하연촌에서 출생했다. 16살이였던 대극정과 그의 네 형님들은 아버지를 따라 구국군에 참가했다. 1932년 가을, 공청단에 가입하고 부총참모장 호택민의 경호를 맡았다. 얼마 후,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제2사 제4퇀 제2련 패장으로 임명됐다. 193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목릉, 밀산, 의란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8년초, 부대를 거느리고 보청현 이도화라자 매복전과 흑하진경찰국 습격전을 진행했다. 6월, 제5군 제3사 제9퇀 퇀장으로 승임했다. 8월 13일, 부상을 입은 대극정 등 10여명 동지들은 소단산자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여 장렬히 희생됐다. 2020년, 퇴역군인사무부로부터 제3패 185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되였다.
 
대극정은 어릴 때부터 마을 사서에서 공부를 했고《삼국연의》,《악비전》,《손자병법》등 서적을 읽기 좋아했다. 1931년 ‘9.18’사변 후, 아버지 대홍창은 일본침략자들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목격하고 강렬한 복수심을 가졌다. 구국군 총지휘 왕덕림이 부대를 거느리고 사하연촌에 이르렀을 때 대홍창은 돼지와 양을 잡아 항일장병들을 위로하고 200여명 청년들을 구국군에 가입하도록 동원했다. 그는 또 100만원의 재산과 총, 폭약, 포목, 수레, 말과 식량 등을 구국군에게 지원했다. 왕덕림은 대홍창을 구국군 독립영 제5영 영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16살이였던 대극정은 아버지를 따라 네 형님들과 함께 구국군에 가입해 길동지역에서 활동했다.
1932년 가을, 대극정은 공청단에 가입했다. 1933년 6월 16일, 구국군이 안도현성을 공략하는 전역에서 대극정은 완강한 투쟁정신을 보여주었다. 얼마 후, 대극정은 부총참모장 호택민(중공당원)을 따라 동녕현에 갔고 그의 경호원으로 되였다. 대극정은 호택민이 맡긴 련락, 행군 경계 등 제반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어느 날, 대극정이 총자루를 닦다가 부주의로 호택민을 쏘게 되였고 구국군 상급 지도자들은 대극정을 처결하기로 결정했다. 호택민은 세상을 뜨기 전에 그의 사죄(死罪)를 면하고 남은 생을 혁명에 바칠 것을 부탁했다. 대극정은 석방된 후 호참모장의 림종 전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항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조직은 대극정을 시세영 부대로 파견했다. 1933년 겨울, 주보중이 변구군 1련, 3련을 령솔해 안도현에서 녕안에 도착, 이듬해 봄에 수녕반일동맹군을 결성했고 대극정도 시세영을 따라 동맹군에 가입했다. 1934년 5월, 수녕반일동맹군은 일부 대오를 동만 등 지역에 파견해 유격활동을 전개하게 했다. 6월 15일, 시세영 등 부대는 주보중의 령솔하에 동만에 도착,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와 련합해 왕청현 수분 대전자(오늘의 라자구진)를 진공했다.
1935년 봄, 수녕반일동맹군을 토대로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1936년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개편)이 설립되고 대극정은 제2사 제4퇀 제2련 패장으로 임명됐다. 4월, 새로운 유격구 개척을 위해 제5군당위는 대오를 3갈래로 나누어 활동하기로 결정, 대극정이 소속된 제4퇀 제2련은 서부파견대에 편입됐다. 그는 부군장 시세영, 제1사 사장 리형박 등을 따라 8월초에 액목현에 도착했다. 그해 대극정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제5군 주력이 중동철도 이북으로 전이했고 제2사는 선발부대로 되였다. 대극정은 제2사를 따라 철도 북쪽에 도착한 후 목릉, 밀산, 의란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대극정은 제4퇀 제2련 련장으로 승임됐다. 1937년 7월 12일, 녕안현 삼도하자 괴뢰삼림경찰대대가 항일에 가입하고 제5군 경위려로 개편, 후에 또 제5군 제3사로 개편되였으며 대극정이 제3사 제9퇀 제2련 련장으로 임명됐다. 1938년 6월 19일, 대극정은 전 련을 거느리고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 류정중, 제5군 제3사 제9퇀 퇀장 장계창과 정치위원 강신태와 함께 쌍압산탄광 한씨네 목영에서 목영과 석탄굴 내부 간첩들의 정황을 정찰하고 물자를 얻었다. 이튿날 오후, 소색금별라하(小色金别拉河) 부근에 이르렀을 때 200여명 괴뢰흥안군에 포위되고 3시간 격전 끝에 적들을 물리쳤다. 이번 전역에서 제9퇀 퇀장 장계창이 희생되고 대극정이 후임됐다. 그 후 대극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보청현 이도화라자 매복전과 흑하진경찰국 습격전에 참가했다. 8월, 9퇀 정치위원 강신태는 일부 전사들을 거느리고 색론강 부근에서 물자를 얻고 있었고 부상을 입은 대극정 등 10여명은 소단산자에서 포로들을 지키고 있었다. 8월 13일, 적들에게 포위되였다. 적들이 비행기와 대포의 엄호하에 200여명 병력을 집중해 소단산자 림시 간수소를 진공했다. 대극정은 14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적들과 3시간 남짓한 격전을 벌였다. 이번 전역에서 대극정, 2련 련장 제혜명을 비롯한 11명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31
리계순
(1914-1938)


1928년, 14살이였던 리계순은 금곡툰사립소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 5월, 금곡툰에서 친일분자와 투쟁하는 대회를 소집했는데 그는 광범한 녀성들을 조직해 표어를 붙이고 전단지를 뿌리는 등 방식으로 친일분자의 죄행을 폭로했다. 1931년 ‘9.18’사변 후, 그는 항일구국투쟁에 적극 뛰여들었다. 얼마 후, 그는 공청단구위 비밀교통원으로 되여 정보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조직은 그를 또 약수동에 파견, 평강구당위 부녀주임으로 임명했다. 1932년 여름, 약수동항일근거지가 엄중한 파괴를 당했다. 그는 일부 간부들과 함께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해 부녀회와 아동단 사업을 책임졌다. 어느 날, 그는 오빠 리지춘이 적들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가위로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항일투쟁을 재삼 다짐했다. 1933년 11월, 중공동만특위는 그와 그의 남편 김일환(당시 중공화룡현위 서기)을 안도현 처창즈에 파견해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도록 했다. 그들은 낮에는 농민으로 위장해 지주집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혁명사업에 참가했다. 1934년 11월, 김일환이 암살당했다. 당시 임신중이였던 리계순은 비통을 참고 사업을 견지했다.
1935년 10월, 일본침략군이 유격대를 향해 ‘대토벌’을 발동했다. 적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리계순은 아이를 데리고 반일자위대를 따라 처창즈 부근의 신안차(新安岔)밀림으로 전이해 소부대활동을 견지했다. 1936년 6월, 리계순은 아이를 후방의 친척한테 맡기고 자위대를 따라 오도양차(五道阳岔)로 전이했다. 그해 가을, 그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제8퇀에 참가해 새로운 전투생활을 시작했다. 1937년 봄, 그는 장백현 흑하자구(黑瞎子沟) 밀영 제6사 부대에서 후근사업을 책임졌다. 제6사 등 항일련군부대는 장백현 심산밀림에서 적들과 일련의 전투를 펼치고 리계순은 선후로 리명수, 간삼봉 등 전역에 참가했다. 전투에서 그는 지혜롭고 용감하게 적들과 싸웠다. 그해 9월 이후, 6사 주력부대가 장백현에서 몽강현으로 출발했고 부대는 그를 흑하자구 밀영병원에 남아 사업하도록 했다. 그해 12월초, 괴뢰삼림경찰대가 병원을 겹겹이 포위했다. 긴박한 정황하에 그는 먼저 기타 동지들이 포위를 뚫고 나가게 하고 자신은 식량을 잘 숨긴 후 마지막으로 병원을 떠났다. 포위를 뚫는 도중에 그는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장백현괴뢰경찰서로 압송되였다. 적들이 리계순을 고문하면서 항일련군부대의 행방을 말해라고 윽박질렀지만 그는 “절대 모른다!”고 대답했다. 1938년 1월, 리계순은 장백현 리수구에서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32
리학복
(1901-1938)


조선족, 길림성 연길현 산채구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 1915년에 가족을 따라 요하현(饶河县)으로 이주했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 대대장,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 퇀장,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군장을 력임했다. 장기간 간고한 항일유격투쟁에서 과로로 인해 병을 앓게 되고 1938년 8월 8일, 병으로 세상을 떴다. 2014년 민정부로부터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15년, 리학복은 가족을 따라 흑룡강성 요하현 삼의툰으로 이주했다. 늘 위험과 곤난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군중들 속에서 위신이 높았던 그는 ‘툰장’으로 추천됐다.
1931년 ‘9.18’사변 후, 리학복은 일본침략자를 타도할 신념을 안고 항일구국의 길에 올랐다. 1932년 10월, 중공요하중심현위는 항일무장 특무대를 건립, 리학복을 삼의툰을 중심으로 대원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1933년 4월 21일, 특무대는 요하현 대엽자구에서 요하농공의용군(그해 여름 동북국민구국군 제1려 특무영으로 개편)으로 개편했다. 그해 5월, 요하현당위는 농공의용군을 확대하기 위해 반일군중 토대가 좋은 삼의툰에 군정훈련반을 조직하고 리학복을 패장으로 임명했다. 이 기간, 리학복은 요하현 반일회 총간사와 부회장을 력임해 물자를 공급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사업을 맡았다. 그해 8월, 리학복 등 반일회 책임자들은 반동당국에 체포되였다가 사형장으로 압송 도중, 항일을 동정하던 괴뢰군 사병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해 가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얼마 후, 특무영에 파견되였다.
1934년 2월 3일, 특무영은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로 개명하고 리학복이 대대장을 맡았다. 그는 50여명 대원들을 거느리고 적들의 력량이 상대적으로 박약한 대엽자구, 화라자, 사합정자, 서풍구 등 산지역으로 전이해 유격투쟁을 전개하고 유격근거지를 건립했다. 그해 겨울, 리학복은 1개월 반 남짓한 유격전을 거쳐 적들의 ‘토벌’을 성공적으로 분쇄했다. 이번 반‘토벌’투쟁에서 25명의 적군을 섬멸하고 35자루 보총을 로획했다.
1935년 1월, 일본군은 가목사 등 지역에서 800여명 정예 보병, 기병과 괴뢰군을 소집해 유격근거지에 대해 ‘토벌’을 진행했다. 리학복은 인차 분산해 작전을 펼치던 부대를 대왕라자 일대에 집중시키고 1월 23일, 매복전을 펼쳤다. 이번 전역은 하루 동안 이어졌는데 100여명 적들을 사살, 도망친 수십명 적군은 추위에 얼어죽었다. 2월 10일, 그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폭마정자(爆马顶子)를 점령한 적군을 야간습격, 3시간의 접전을 통해 괴뢰련장 등 10여명을 사살하고 그들의 무기를 전부 빼앗았으며 폭마정자를 중심으로 한 유격근거지를 회복했다. 그해 9월 18일,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으로 개편하고 리학복이 퇀장을 맡았다. 11월, 일본군 3000여명이 폭마정자, 대엽자구(大叶子沟)를 중심으로 하는 유격근거지에 대해 겨울철 ‘대토벌’을 발동했다. 리학복은 요하현 경내에서 적들과 공방전을 펼침으로써 유격근거지를 보위하고 적들의 겨울철 ‘대포벌’을 분쇄했다.
1936년 3월 25일, 제4퇀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로 확대, 편성되였고 리학복이 부사장을 맡았다. 이때 적들은 한창 호요지역에서 3000여명 병력을 출동해 인민혁명군에 대해 ‘토벌’을 진행했다.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요하지역에서 유격투쟁을 펼쳤다. 그해 11월 15일,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2사가 정식으로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되고 산하에 3개 사를 설치했으며 리학복이 2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1937년 봄, 소남하 서대정자(小南河西大顶子) 100여명 붉은총회 회원들이 제7군에 가입, 부대는 또다시 개편하고 리학복이 1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1937년 12월, 주보중이 중공길동성위를 대표해 요하 18상지에서 하강특위확대회의를 소집, 제7군당위 위원을 선거하고 리학복을 상무위원, 제7군 군장으로 임명했다. 장기간 간고한 항일유격투쟁에서 리학복은 과로로 인해 반신불수에 걸렸고 1938년 8월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 편집: 사진:

핫 클릭

  1. 1 주제교양 전문정돈 사업 성과 괄목
  2. 2 당규약 수정안은 세계 과학기술 강국을 건설
  3. 3 문제선도 견지 정돈성과 이룩
  4. 4 당과 국가가 장기적으로 견지해야 할 지도사
  5. 5 중국공산당 지부사업 조례(시행)
  6. 6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새시대에 진입
  7. 7 당대 중국 발전 진보의 근본방향
  8. 8 당대 중국 발전 진보의 근본방향
  9. 9 사명
  10. 10 사명

칼럼

主管:中共延边州委组织部 主办: 中共延边州委组织部 出版:支部生活杂志社
地址:吉林省延吉市公园路2799号A座 邮编:133000 电话: 0433-2513269 E-mail: ybzbsh@126.com
吉ICP备:17002320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