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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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룡운(1913-1940)
조선족, 로씨야 극동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8년,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 로투구로 이주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봄, 리룡운은 연길현 로투구구 돌격대에 참가해 소대장을 맡았다. 1936년 7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기관총패 패장을 맡았으며 장백산구에서 싸웠다. 1939년 7월, 리룡운은 제15퇀 퇀장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리룡운은 부대를 이끌고 왕청 천교령 동탁판구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전투중에 희생됐다.
리룡운은 1930년에 혁명에 참가했으며 혁명전단지를 배포하고 교통련락을 담임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이후 그는 1931년 연변지역의 ‘추수투쟁’과 1932년 ‘춘황투쟁’에 참가했으며 그 기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32년 10월, 중공로투구구위에서 조직한 돌격대에 참가해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1933년 1월, 그는 연길현 반일유격대대 제1련 5패의 전사로 편입되여 동불사, 삼도만 일대에서 활동하고 팔도구일본경찰서 습격 전투에 참가했다. 1934년,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단 제5련에 편입되여 의란구, 삼도만, 사방대, 로투구와 처창즈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5년 5월, 하얼바령에서 일본국제렬차를 습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 사부경위련 기관총패 패장을 맡고 안도, 돈화, 화전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6년 4월 10일, 따푸차이허 공격전에 참가했다. 1936년 7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2군 4사 기관총패 패장을 맡고 림강현 경내에서 활동했다. 11월 하순, 소탕하전투에 참가하고 1937년 1월, 무송현 소협피구전투에 참가했다. 1937년 6월, 경위련을 이끌고 간삼봉전투에 참가하고 11월, 화전현 홍석라자전투에 참가했다. 1938년 겨울부터 교하현, 연길현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9년, 대류수하자전투와 대사하전투에 참가하고 같은해 8월 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5퇀 퇀장을 맡았다. 1940년 9월 7일, 리룡운은 부대를 이끌고 왕청 천교령 동탁판구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적들의 습격을 당해 전투중에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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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증민(1909-1941)
본명은 관유유(关有维)이고 위민생(魏民生), 위서경(魏锄耕), 풍강(冯康) 등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산서성 둔류현에서 출생했으며 1927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중공할빈시위 서기를 맡았다. 1935년 2월, 중공동만특위 서기를 담임했다.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국제 제7차 대표대회에 참가하고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정치위원과 군당위 서기를 겸임했다. 7월, 중공남만성위 서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과 제2군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1938년 5월, 제1로군 부총사령과 총정치부 주임을 겸임했다. 양정우가 희생된 후 제1로군 군정령도사업을 책임지고 간고한 환경에서 동만, 남만 광활한 지역에서 적과의 투쟁을 견지했다. 1941년 1월 20일, 화전현 목단령 사도구 밀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2014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32년 봄, 위증민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할빈으로 왔다. 그는 선후로 할빈시당위 조직부장, 도외구당위 서기와 할빈시당위 서기를 맡았다. 1934년 겨울,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그를 동만에 파견해 사업하게 했다. 1935년 2월, 위증민은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됐다. 5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위증민이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5월말, 그는 모스크바에 가서 중공주공산국제대표단에 동만 당조직과 항일투쟁 정황을 보고하고 8부의 서면자료를 작성하여 중공대표단에 교부했다. 12월, 동만, 남만, 길동 및 송강(북만) 등 4개 성당위가 설립되고 위증민은 중공동만성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6년초, 위증민은 쏘련에서 귀국했다. 2월 5일, 그는 녕안현의 5군 밀영에서 주보중 등 제2군, 제5군의 책임자들을 회견하고 공산국제 7차 대표대회 회의정신과 중공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했다. 3월, 위증민은 안도 미혼진 밀영에서 동만당, 군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고 3개 사, 1개 교도탄으로 확대, 편성하며 위증민이 제2군 정치위원과 군당위 서기를 겸임했다. 6월, 위증민은 금천현 혜가구(지금의 통화시에 속함)에서 양정우와 함께 제1군, 제2군과 동만, 남만의 당 주요 지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을 제1로군으로 통합, 편성했다. 또 동만, 남만 당조직을 중공남만성위로 합병, 양정우가 제1로군 총사령을 담임하고 위증민이 남만성당위 서기 겸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을 담임했다.
두개의 큰 주력부대인 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이 통합, 편성된 후 기세가 더욱 드높아지고 동만, 남만 지역의 항일유격전쟁은 전에 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양정우가 부대를 이끌고 남하해 1군과 서쪽으로 정벌하는 것을 배합하기 위해 위증민은 왕덕태 군장과 함께 2군 부대를 지휘해 무송현을 공격, 100여명의 적들을 소멸하고 소탕하에서 괴뢰 정안군 150여명을 소멸했으며 동청구에서 100여명의 일본군을 전멸했다. 동시에 무송, 장백 등 현에 현당위 및 항일구국회 등 군중조직을 세우고 부대를 3개 퇀의 병력으로 확대, 편성했다. 같은 해 겨울, 왕덕태 군장이 희생되자 위증민은 홀로 지방 당조직 사업을 령도하고 부대의 작전을 지휘하는 임무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장백산구 각 현을 전전하며 도시, 농촌 근거지를 공격하고 일본 괴뢰군 ‘토벌대’를 매복, 습격했다. 1937년 3월, 위증민은 무송현 서강 양목정자 밀영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2사, 4사, 6사 지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대오를 정돈했으며 간부를 조정하고 부대의 활동방침을 확정했다. 6월, 그는 2군 교도퇀과 4사를 직접 지휘해 적이 무송, 림강, 몽강 3개 현에 설치한 교통요도의 묘령거점을 공격해 함락하고 한개 영의 괴뢰군 150여명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1937년 ‘7.7사변’ 이후 위증민은 항일련군 1로군 2사, 4사, 6사를 이끌고 장백산구에서 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는데 뜻밖으로 휘남현성을 함락시켜 항일련군의 위세를 높였다. 휘남현성전투 이후 위증민은 또 부대를 이끌고 몽강으로 전이했다. 전국항일전선을 배합하기 위해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경상적으로 출정해 적들과 싸웠다. 1938년초, 위증민은 독립려와 1군 2사를 이끌고 료동지역으로 진군해 대청구 등 거점과 10여곳의 ‘집단부락’을 함락시켰다. 5월, 그들은 집안현(지금의 집안시) 로령산구에서 양정우 부대와 합류했다. 1938년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위증민과 양정우는 공동으로 로령회의를 소집, 회의에서는 위증민이 제1로군 부사령과 총정치부 주임을 겸임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위증민은 양정우를 배합하여 부대를 지휘해 집안현 경내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군이 수축한 통화-집안 철도의 다리와 턴넬 공사를 파괴하고 문자구와 장강 등 전투에서 괴뢰군을 섬멸했다. 1938년 가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지휘부는 장백산구에 전이했다. 위증민은 항일련군 부대를 지휘해 야간습격, 매복, 우회 등 전술로 적들에게 막중한 손실을 안겼다. 1939년 8월 24일, 위증민, 진한장과 후국충은 제3방면군을 지휘해 안도현 대사하에서 련환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유인하는 계책을 사용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적들의 지원군을 공격했다. 제3방면군의 지휘인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대사하진을 함락하여 안도현성과 명월구 두 곳의 적들을 유인할 수 있었다. 부지휘 후국충은 부대를 이끌고 양목조자에 매복해있다가 안도 방면에서 몰려오는 적의 구원부대를 저격했으며 위증민은 부대를 이끌고 대장강 북쪽의 산골짜기에 매복해있다가 명월구 방면에서 몰려오는 미야모토의 ‘토벌대’를 단번에 섬멸했다. 25일, 그들은 또다시 매복해있다가 안도 방면에서 몰려오는 일본군 150여명과 20여명 ‘조선특설부대’를 섬멸했다. 9월 24일, 위증민과 진한장은 제3방면군을 이끌고 돈화현 한총령에서 매복전을 벌였으며 적들의 자동차 11대를 격파하고 일본군 돈화주둔 ‘토벌대’ 사령 마쓰시마 소장 수하 100여명을 사살했으며 기관총 등 대량의 무기와 물자를 로획했다.
1940년 2월, 양정우가 희생되자 위증민은 남만 당조직과 항일련군 제1로군의 모든 중임을 홀로 떠메야 했다. 1940년 3월,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남만성당위와 1로군 고급간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는 당의 사업과 군사문제를 토론했으며 적들의 약점을 타격하고 지방조직을 재건하며 항일유격전쟁을 견지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당시 작전부담과 간고한 생활조건으로 위증민은 엄중한 위장질환과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위증민은 병약한 몸으로 친히 부대를 이끌고 적들과 싸웠으며 선후로 하얼바령역 습격전과 황니허즈 괴뢰경찰대 공격전을 지휘했다.
1940년 늦가을, 위증민의 병세는 더욱 엄중해져 더는 부대를 이끌고 출정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전투부대를 떠나 경위패의 호송으로 화전현 목단령 이도하자의 밀영에서 휴양을 하게 되였다. 1941년 1월 20일, 위증민은 밀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42
곽지산(1904-1943)
조선족,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 팔도구에 이주했으며 1931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중공팔도구구(八道沟区) 부암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부암동 등 지역의 군중들을 조직하여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전개했다. 1935년 봄, 곽지산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퇀부 부관을 맡았다. 1938년초,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수부장을 맡았으며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사령인 위증민의 부관을 담임했다. 1943년 7월, 임무 집행시 희생했다.
곽지산은 가난한 가정생활 때문에 16살이 되여서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29년 6월 졸업 후 부암동 수동촌 사립학교에서 한어교원으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1930년 봄, 곽지산 등은 부암동에서 야학을 개설하고 청년들에게 문화지식을 가르치는 동시에 혁명사상을 선전했다. 1931년 7월 26일,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 중공동만특위의 호소하에 곽지산 등은 부암동을 중심으로 ‘추수투쟁’을 조직, 전개하고 1932년 봄에는 ‘춘황투쟁’을 전개했다. 얼마 후 곽지산은 중공팔도구구 부암지부 서기로 임명됐다. 1932년 봄, 일본침략자들이 연변 각 지역에 대해 미친 듯한 ‘토벌’을 진행했다. 부암동의 많은 가옥과 학교가 불에 타고 무고한 백성들이 살해를 당했다. 1932년 11월, 곽지산은 마을사람들을 조직하여 인구가 10여세대밖에 되지 않지만 지리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장재촌으로 전이하고 그곳에 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곽지산은 장재촌 쏘베트정부 주석, 반일회 회장 등 직무를 맡았다. 1933년 9월부터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중공중앙 ‘1.26 지시편지’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할 데 관한 정신을 관철했다. 곽지산 등은 연길현 삼도만일대의 반일삼림대에 들어가 사업을 전개했다.
1935년 봄, 곽지산은 지방에서 부대로 전이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퇀부 부관을 맡고 안도현 미혼진 밀영에서 사업했다. 1936년 3월 이후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수부장을 맡고 부대와 함께 안도, 화룡, 돈화, 교하, 화전, 무송, 장백, 림강, 몽강, 금천, 류하, 통화 등 지역을 전전했다. 1938년 초가을, 그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을 맡고 사령부의 경위원들과 함께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사령인 위증민의 곁에서 사업하면서 위증민을 대신해 일반적인 사무를 처리했다.
1939년 겨울, 위증민의 위병과 심장병이 악화되자 곽지산은 위증민을 따라 화전현 협피구 이도하자의 밀영으로 전이했다. 1941년초, 위증민은 자신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곽지산에게 밀영을 떠나 주력부대를 찾아갈 것을 명령했다. 1941년 10월, 곽지산 등은 쏘련 경내의 동북항일련군 야영지에 도착했다. 1942년 5월, 곽지산 등 11명은 동북에 파견되여 임무를 집행하게 되였다.
1943년 7월, 곽지산 등은 로흑산, 훈춘 중쏘 변경 일대의 일본괴뢰군사시설에 대해 상세하게 정찰하는 동시에 혁명군중들과 적극적으로 련락을 취했다. 하지만 곽지산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불행하게도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리룡운(1913-1940)
조선족, 로씨야 극동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8년,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 로투구로 이주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봄, 리룡운은 연길현 로투구구 돌격대에 참가해 소대장을 맡았다. 1936년 7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기관총패 패장을 맡았으며 장백산구에서 싸웠다. 1939년 7월, 리룡운은 제15퇀 퇀장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리룡운은 부대를 이끌고 왕청 천교령 동탁판구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전투중에 희생됐다.
리룡운은 1930년에 혁명에 참가했으며 혁명전단지를 배포하고 교통련락을 담임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이후 그는 1931년 연변지역의 ‘추수투쟁’과 1932년 ‘춘황투쟁’에 참가했으며 그 기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32년 10월, 중공로투구구위에서 조직한 돌격대에 참가해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1933년 1월, 그는 연길현 반일유격대대 제1련 5패의 전사로 편입되여 동불사, 삼도만 일대에서 활동하고 팔도구일본경찰서 습격 전투에 참가했다. 1934년,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단 제5련에 편입되여 의란구, 삼도만, 사방대, 로투구와 처창즈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5년 5월, 하얼바령에서 일본국제렬차를 습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 사부경위련 기관총패 패장을 맡고 안도, 돈화, 화전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6년 4월 10일, 따푸차이허 공격전에 참가했다. 1936년 7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2군 4사 기관총패 패장을 맡고 림강현 경내에서 활동했다. 11월 하순, 소탕하전투에 참가하고 1937년 1월, 무송현 소협피구전투에 참가했다. 1937년 6월, 경위련을 이끌고 간삼봉전투에 참가하고 11월, 화전현 홍석라자전투에 참가했다. 1938년 겨울부터 교하현, 연길현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9년, 대류수하자전투와 대사하전투에 참가하고 같은해 8월 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5퇀 퇀장을 맡았다. 1940년 9월 7일, 리룡운은 부대를 이끌고 왕청 천교령 동탁판구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적들의 습격을 당해 전투중에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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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증민(1909-1941)
본명은 관유유(关有维)이고 위민생(魏民生), 위서경(魏锄耕), 풍강(冯康) 등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산서성 둔류현에서 출생했으며 1927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중공할빈시위 서기를 맡았다. 1935년 2월, 중공동만특위 서기를 담임했다.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국제 제7차 대표대회에 참가하고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정치위원과 군당위 서기를 겸임했다. 7월, 중공남만성위 서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과 제2군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1938년 5월, 제1로군 부총사령과 총정치부 주임을 겸임했다. 양정우가 희생된 후 제1로군 군정령도사업을 책임지고 간고한 환경에서 동만, 남만 광활한 지역에서 적과의 투쟁을 견지했다. 1941년 1월 20일, 화전현 목단령 사도구 밀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2014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32년 봄, 위증민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할빈으로 왔다. 그는 선후로 할빈시당위 조직부장, 도외구당위 서기와 할빈시당위 서기를 맡았다. 1934년 겨울,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그를 동만에 파견해 사업하게 했다. 1935년 2월, 위증민은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됐다. 5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위증민이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5월말, 그는 모스크바에 가서 중공주공산국제대표단에 동만 당조직과 항일투쟁 정황을 보고하고 8부의 서면자료를 작성하여 중공대표단에 교부했다. 12월, 동만, 남만, 길동 및 송강(북만) 등 4개 성당위가 설립되고 위증민은 중공동만성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6년초, 위증민은 쏘련에서 귀국했다. 2월 5일, 그는 녕안현의 5군 밀영에서 주보중 등 제2군, 제5군의 책임자들을 회견하고 공산국제 7차 대표대회 회의정신과 중공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했다. 3월, 위증민은 안도 미혼진 밀영에서 동만당, 군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고 3개 사, 1개 교도탄으로 확대, 편성하며 위증민이 제2군 정치위원과 군당위 서기를 겸임했다. 6월, 위증민은 금천현 혜가구(지금의 통화시에 속함)에서 양정우와 함께 제1군, 제2군과 동만, 남만의 당 주요 지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을 제1로군으로 통합, 편성했다. 또 동만, 남만 당조직을 중공남만성위로 합병, 양정우가 제1로군 총사령을 담임하고 위증민이 남만성당위 서기 겸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을 담임했다.
두개의 큰 주력부대인 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이 통합, 편성된 후 기세가 더욱 드높아지고 동만, 남만 지역의 항일유격전쟁은 전에 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양정우가 부대를 이끌고 남하해 1군과 서쪽으로 정벌하는 것을 배합하기 위해 위증민은 왕덕태 군장과 함께 2군 부대를 지휘해 무송현을 공격, 100여명의 적들을 소멸하고 소탕하에서 괴뢰 정안군 150여명을 소멸했으며 동청구에서 100여명의 일본군을 전멸했다. 동시에 무송, 장백 등 현에 현당위 및 항일구국회 등 군중조직을 세우고 부대를 3개 퇀의 병력으로 확대, 편성했다. 같은 해 겨울, 왕덕태 군장이 희생되자 위증민은 홀로 지방 당조직 사업을 령도하고 부대의 작전을 지휘하는 임무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장백산구 각 현을 전전하며 도시, 농촌 근거지를 공격하고 일본 괴뢰군 ‘토벌대’를 매복, 습격했다. 1937년 3월, 위증민은 무송현 서강 양목정자 밀영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2사, 4사, 6사 지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대오를 정돈했으며 간부를 조정하고 부대의 활동방침을 확정했다. 6월, 그는 2군 교도퇀과 4사를 직접 지휘해 적이 무송, 림강, 몽강 3개 현에 설치한 교통요도의 묘령거점을 공격해 함락하고 한개 영의 괴뢰군 150여명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1937년 ‘7.7사변’ 이후 위증민은 항일련군 1로군 2사, 4사, 6사를 이끌고 장백산구에서 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는데 뜻밖으로 휘남현성을 함락시켜 항일련군의 위세를 높였다. 휘남현성전투 이후 위증민은 또 부대를 이끌고 몽강으로 전이했다. 전국항일전선을 배합하기 위해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경상적으로 출정해 적들과 싸웠다. 1938년초, 위증민은 독립려와 1군 2사를 이끌고 료동지역으로 진군해 대청구 등 거점과 10여곳의 ‘집단부락’을 함락시켰다. 5월, 그들은 집안현(지금의 집안시) 로령산구에서 양정우 부대와 합류했다. 1938년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위증민과 양정우는 공동으로 로령회의를 소집, 회의에서는 위증민이 제1로군 부사령과 총정치부 주임을 겸임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위증민은 양정우를 배합하여 부대를 지휘해 집안현 경내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군이 수축한 통화-집안 철도의 다리와 턴넬 공사를 파괴하고 문자구와 장강 등 전투에서 괴뢰군을 섬멸했다. 1938년 가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지휘부는 장백산구에 전이했다. 위증민은 항일련군 부대를 지휘해 야간습격, 매복, 우회 등 전술로 적들에게 막중한 손실을 안겼다. 1939년 8월 24일, 위증민, 진한장과 후국충은 제3방면군을 지휘해 안도현 대사하에서 련환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유인하는 계책을 사용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적들의 지원군을 공격했다. 제3방면군의 지휘인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대사하진을 함락하여 안도현성과 명월구 두 곳의 적들을 유인할 수 있었다. 부지휘 후국충은 부대를 이끌고 양목조자에 매복해있다가 안도 방면에서 몰려오는 적의 구원부대를 저격했으며 위증민은 부대를 이끌고 대장강 북쪽의 산골짜기에 매복해있다가 명월구 방면에서 몰려오는 미야모토의 ‘토벌대’를 단번에 섬멸했다. 25일, 그들은 또다시 매복해있다가 안도 방면에서 몰려오는 일본군 150여명과 20여명 ‘조선특설부대’를 섬멸했다. 9월 24일, 위증민과 진한장은 제3방면군을 이끌고 돈화현 한총령에서 매복전을 벌였으며 적들의 자동차 11대를 격파하고 일본군 돈화주둔 ‘토벌대’ 사령 마쓰시마 소장 수하 100여명을 사살했으며 기관총 등 대량의 무기와 물자를 로획했다.
1940년 2월, 양정우가 희생되자 위증민은 남만 당조직과 항일련군 제1로군의 모든 중임을 홀로 떠메야 했다. 1940년 3월,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남만성당위와 1로군 고급간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는 당의 사업과 군사문제를 토론했으며 적들의 약점을 타격하고 지방조직을 재건하며 항일유격전쟁을 견지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당시 작전부담과 간고한 생활조건으로 위증민은 엄중한 위장질환과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위증민은 병약한 몸으로 친히 부대를 이끌고 적들과 싸웠으며 선후로 하얼바령역 습격전과 황니허즈 괴뢰경찰대 공격전을 지휘했다.
1940년 늦가을, 위증민의 병세는 더욱 엄중해져 더는 부대를 이끌고 출정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전투부대를 떠나 경위패의 호송으로 화전현 목단령 이도하자의 밀영에서 휴양을 하게 되였다. 1941년 1월 20일, 위증민은 밀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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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산(1904-1943)
조선족,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 팔도구에 이주했으며 1931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중공팔도구구(八道沟区) 부암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부암동 등 지역의 군중들을 조직하여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전개했다. 1935년 봄, 곽지산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퇀부 부관을 맡았다. 1938년초,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수부장을 맡았으며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사령인 위증민의 부관을 담임했다. 1943년 7월, 임무 집행시 희생했다.
곽지산은 가난한 가정생활 때문에 16살이 되여서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29년 6월 졸업 후 부암동 수동촌 사립학교에서 한어교원으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1930년 봄, 곽지산 등은 부암동에서 야학을 개설하고 청년들에게 문화지식을 가르치는 동시에 혁명사상을 선전했다. 1931년 7월 26일,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 중공동만특위의 호소하에 곽지산 등은 부암동을 중심으로 ‘추수투쟁’을 조직, 전개하고 1932년 봄에는 ‘춘황투쟁’을 전개했다. 얼마 후 곽지산은 중공팔도구구 부암지부 서기로 임명됐다. 1932년 봄, 일본침략자들이 연변 각 지역에 대해 미친 듯한 ‘토벌’을 진행했다. 부암동의 많은 가옥과 학교가 불에 타고 무고한 백성들이 살해를 당했다. 1932년 11월, 곽지산은 마을사람들을 조직하여 인구가 10여세대밖에 되지 않지만 지리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장재촌으로 전이하고 그곳에 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곽지산은 장재촌 쏘베트정부 주석, 반일회 회장 등 직무를 맡았다. 1933년 9월부터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중공중앙 ‘1.26 지시편지’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할 데 관한 정신을 관철했다. 곽지산 등은 연길현 삼도만일대의 반일삼림대에 들어가 사업을 전개했다.
1935년 봄, 곽지산은 지방에서 부대로 전이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퇀부 부관을 맡고 안도현 미혼진 밀영에서 사업했다. 1936년 3월 이후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수부장을 맡고 부대와 함께 안도, 화룡, 돈화, 교하, 화전, 무송, 장백, 림강, 몽강, 금천, 류하, 통화 등 지역을 전전했다. 1938년 초가을, 그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을 맡고 사령부의 경위원들과 함께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부사령인 위증민의 곁에서 사업하면서 위증민을 대신해 일반적인 사무를 처리했다.
1939년 겨울, 위증민의 위병과 심장병이 악화되자 곽지산은 위증민을 따라 화전현 협피구 이도하자의 밀영으로 전이했다. 1941년초, 위증민은 자신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곽지산에게 밀영을 떠나 주력부대를 찾아갈 것을 명령했다. 1941년 10월, 곽지산 등은 쏘련 경내의 동북항일련군 야영지에 도착했다. 1942년 5월, 곽지산 등 11명은 동북에 파견되여 임무를 집행하게 되였다.
1943년 7월, 곽지산 등은 로흑산, 훈춘 중쏘 변경 일대의 일본괴뢰군사시설에 대해 상세하게 정찰하는 동시에 혁명군중들과 적극적으로 련락을 취했다. 하지만 곽지산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불행하게도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박진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