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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2-12-12 10: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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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송(1917-1943)
조선족, 왕청현 영창동 하북촌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3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룡남지휘부 소속 독립 2사 정치위원,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6지대당위 서기 겸 제17대대 대대장, 동북항일련군 제6지대 제17대 지도원, 동북항일련군 제12지대 대장을 력임했다. 그는 전투에서 세번 부상을 당하고 실명까지 했으나 투쟁을 견지했다. 1943년 8월 12일에 희생되였다. 2015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2패 600명의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박길송은 청소년시기에 진보적인 학생조직인 ‘친목회’에 가입하고 1932년 봄, 왕청현 제5구의 아동단원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춘황투쟁’에 참가했다. 1933년초,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왕청현 제5구 아동단 단장을 맡았다. 1934년, 왕청현아동국 국장을 맡고 전 현의 아동사업을 책임졌다. 1935년, 박길송은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왕청현 라자구일대에서 사업을 전개했다. 12월, 반역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여 라자구경찰서에 압송되였다. 적들은 위협하고 유인하는 등 각종 수단을 사용했으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하여 적들은 그를 석방하여 ‘긴 줄을 늘여 큰 고기를 낚으려’고 타산을 세웠다.
1936년 6월, 주보중이 령도하는 동북항일련군 제5군 1사 2퇀 2련에 편입되여(안해는 후근부 재봉팀에 편입.) 2련 전사, 반장, 패장, 련장을 력임했다. 1937년, 박길송은 동북항일련군 제3군 3사 조직과장을 맡았다. 같은 해,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6월, 동북항일련군 제3군이 4개 사, 1개 경위퇀으로 재편성된 후 박길송은 경위퇀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1939년 5월,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이 정식 편성되고 산하에 하강, 룡북, 룡남 등 3개 지휘부를 두었다. 박길송은 룡남 지휘부 제1지대에 편입되였는데 그는 전투중에 오른쪽 눈이 엄중한 부상을 입게 되였다. 이후 박길송은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6지대에 편입되였으며 지대당위 서기 및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1941년 6월,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12지대 대장을 맡았다. 얼마 후,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대부분이 쏘련 경내로 전이하고 박길송은 10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계속 동북에 남아 투쟁을 견지했다.
1943년 1월 4일, 박길송은 부대를 거느리고 경성괴뢰경찰서를 습격했다. 복귀 도중 경안 부근에서 적의 ‘토벌대’와 마주쳤는데 포위망을 돌파하는중에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적들에게 체포되여 북안경찰서에 갇혔다. 적들은 그를 백방으로 유혹하고 혹형을 들이댔지만 박길송은 굴복하지 않았다. 1943년 8월, 일본괴뢰군은 북안에서 림시법정을 열고 박길송에게 사형을 내렸다. 8월 12일, 박길송은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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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세영(1894-1944)
원명은 시조승이고 산동성 래주부 교주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899년,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에 이주하고 1929년에 화룡현 이도구공안분국 제1분주소의 순관이 되였다. 1931년 12월 28일, 그는 왕덕림이 령도하는 길림중국국민구국군에 참가했다. 1934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5년 이후에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부군장, 동북항일련군 제5군 군장을 력임했다. 1942년 8월,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제4보병영 영장을 맡았다. 1944년 가을, 임무 집행시 희생됐다. 2015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2패 600명의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31년 ‘9.18’사변 이후 시세영은 300여명의 항일대오를 조직했으며 같은 해 12월 28일, 식구 5명과 함께 가옥과 자산을 버린 채 항일대오를 이끌고 왕덕림이 령도하는 길림중국국민구국군에 가입했다.
1932년 8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공산당원인 주보중을 파견하여 구국군 속에 들어가 사업하게 했다. 1933년초, 왕덕림이 령도하는 구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진영이 무너지게 되였는데 이 대오를 단결하여 계속해 항일할 수 있도록 주보중은 구국군의 명의로 해당 부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시세영은 구국군 제4로의 사령을 맡게 되였으며 부대를 이끌고 녕안, 왕청 등 지역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다. 1933년 겨울, 시세영은 주보중이 조직하는 반일동맹군에 참가했으며 동맹군당위의 직접적 령도하에 군사령도 사업을 했다.
1934년 2월 16일, 수녕반일동맹군이 설립되고 시세영은 동맹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동맹군당위의 양성과 교양하에 시세영은 그해 겨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5년 2월, 수녕반일동맹군은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후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개편되였음.)으로 개편되였으며 시세영이 제5군 부군장을 맡았다. 그와 군장 주보중은 5군을 이끌고 적을 호되게 섬멸하고 적군의 총기와 탄약 및 기타 군용물자를 로획했다. 이 밖에도 대오를 발전, 장대시키고 군중을 동원해 용약 참군하게 함으로써 5군 병력이 3000여명으로 발전되고 유격구가 전체 길동지역으로 확대되였다.
1937년 1월 하순, 시세영은 일본군 수비대 300여명이 2월 28일에 림구로 전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제5군 2사 5퇀 및 경위영을 지휘해 매복전을 펼친 결과 포로가 된 20여명의 적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했으며 무기와 군용물자를 로획했다.
1937년 9월 29일,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이 편성되고 제2로군 총지휘부가 구성되였으며 시세영이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제5군 군장으로 임명됐다.
1938년 3월, 일본괴뢰군은 송화강 량안에서 항일련군을 향해 대‘포위토벌’을 진행했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은 서정계획을 제정했다. 7월 2일, 제4군, 제5군의 서정부대는 시세영 등의 지휘하에 삼도통 ‘집단부락’을 공격하고 12일에 루산진을 함락하였다. 루산진전투 이후 시세영은 5군 교도단 등 부대를 이끌고 조령지구에 돌아가 활동했다.
1939년 1월, 일본괴뢰군은 항일련군 부대에 대‘포위토벌’을 진행했는데 시세영은 2로군 총지휘부와 련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하여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견지했다. 3월 하순, 약 1000여명의 적들이 우쓰훈강(乌斯浑河) 북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시세영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유리한 지형을 빌어 매복해있다가 100명의 적을 살상했다.
1940년 9월,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과 제1로군 제2방면군은 녕안에서 회합했다. 시세영과 계청은 퇀 이상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중공도남특위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2월말, 시세영은 계청과 함께 쏘련 하바롭스끄(伯力)에 가서 회의에 참가했다.
1942년 봄, 시세영은 항일련군 소부대를 이끌고 중동철도 남쪽과 북쪽에서 활동했다. 5, 6월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쏘련야영지로 돌아왔으며 8월에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제4보병영 영장으로 임명됐다.
1943년 봄, 시세영은 항일련군 소분대를 거느리고 목릉, 림구 등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1944년,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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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벽(1909-1945)
조선족,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29년, 길림성 연길현 옹구 동구촌에 이주했으며 1931년 12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권영벽은 당조직의 파견으로 유격대에서 사업했다. 1933년, 당조직은 그를 옹구당위에 파견해 사업하게 했다. 1936년 권영벽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 6사 조직과장을 담임했다. 1937년, 권영벽은 중공장백현위를 세우고 서기를 맡았다. 1937년 10월, 그는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1945년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2020년, 퇴역군인사무부에서 공포한 제3패 185명의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29년, 연길현 옹구 동구촌에 정착하게 된 권영벽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반일투쟁에 적극 참가하고 1931년 12월말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5월, 권영벽은 당조직의 파견으로 유격대에서 사업하고 선후로 의란구 지주무기 탈취, 자위단 분주소 공격, 길청령 일본군 습격 등 일련의 전투에 참가했다. 1933년, 당조직은 그를 옹구당위에 파견하여 지방사업을 펼치도록 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군중들을 발동해 농민협회, 반제동맹과 호제회 등 군중조직을 세우고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여 유격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했다. 1934년 9월부터 일본침략자들은 동만에서 ‘치안숙정계획’을 밀고나가며 제3차 ‘대토벌’을 발동했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권영벽은 유격대를 따라 새로운 구역으로 전이해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1936년 5월, 권영벽은 30여명의 장병들과 정치공작인원을 이끌고 무송, 동강, 만강을 지나 장백산맥의 로룡강을 넘어 장백현 경내의 흑할자골(黑瞎子沟)에 들어섰으며 그곳을 첫 밀영지점으로 정했다. 그들은 촌민으로 분장하고 장백현 각지에 흩어져 군중들을 발동해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항일선전 등 활동을 벌였다.
7월초, 동만과 남만의 당조직 그리고 동북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의 주요 지도간부 련석회의에서는 제1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통합편성하기로 결정지었으며 제2군 군부에서 6사를 이끌고 장백산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도록 했다. 권영벽은 제2군 6사(원 제2군 3사) 조직과장을 맡았다.
1937년 봄, 6사 당위에서는 권영벽을 지방에 파견하여 사업하도록 했다. 권영벽은 6사 당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세우고 항일군중조직이 장백림해에 널리 분포되게 했으며 동북항일련군에 인력과 물력을 크게 지원했다. 동시에 중공장백현위를 건립하고 현당위 서기를 담임했다. 현당위가 설립된 뒤 신흥촌, 관도가, 도천리, 주경동, 대사동 등 지역에 3개 특별지부, 1개 지부와 10개 당소조를 건립했다. 7월, 권영벽은 십칠도구 서가강에서 제1차 현당위 회의를 소집했다. 권영벽은 동북지구의 혁명형세를 분석하면서 목전의 혁명임무를 제기하고 장백현인민을 령도해 일본괴뢰를 반대하는 투쟁에 방향을 가리켜주었다.
중공장백현위는 전 현 각급 당조직을 령도하여 항일사상을 선전하고 동북항일련군의 대적작전을 지원했다. 장백현 경내에서 활동하는 동북항일련군 각 부대는 병력이 600여명에 달하기도 했으며 부대에 공급되는 물자들은 적을 습격하여 로획한 일부외에 대부분은 항일군중들로부터 지원받은 것이였다. 군중들은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항일련군에 량식, 포목, 고무신, 식염, 땔나무, 사무용품 등을 비밀리에 보내왔으며 항일련군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편지를 나르며 부상자의 전이를 엄호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이 같은 군중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권영벽은 현당위를 령도하여 적극적으로 군중들을 동원하고 유격대를 세워 선후로 300여명의 청장년을 동원해 항일련군에 가입하게 했다.
1937년 10월의 어느 날 밤, 반역자의 밀고로 조선 혜산의 일본경찰들이 장백현 십칠도구촌에 쳐들어와 권영벽을 체포했다. 후에 적들은 그를 혜산에서 함흥, 한성(지금의 한국 서울) 감옥에 압송해갔다. 권영벽은 시종일관 견정불굴했으며 당과 항일련군 부대의 비밀을 엄격하게 지켰다. 적들은 그의 입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하자 그를 사형에 처했다. 1945년 3월 10일, 권영벽은 일본침략자에 의해 살해되였다.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장홍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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