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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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1911—1972)
조선족, 본명은 오기섭이며 로씨야 동남부 쌍성자(지금의 로씨야 우쑤리스크시)에서 출생했다. 1920년,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주했으며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1월, 동경성 우가툰특별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1933년 이후부터 밀산현 하달하촌 등 지역의 당지부 서기, 항일구국회 회장, 동북항일련군 제4군 제2퇀 후방류수처당지부 서기 등을 력임했다. 1936년, 쏘련으로 갔으며 1938년,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을 졸업했다. 1939년, 연안으로 돌아와 선후로 연안경비구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 지도원,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 당위 위원, 교무위원, 총무처 처장 등 직무를 력임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에서 사업하면서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 처장, 연변대학 교장, 중공길림성위 위원,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 전원 등을 력임했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주석,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길림성 부성장을 력임했으며 제1기 전국정협 위원, 8차 당대회 후보중앙위원을 담임했다. 1965년 11월, 중공길림성위 제2기 16차 회의에서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72년 7월 3일, 무한에서 병으로 서거했다.
1920년, 주덕해는 어머니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수동촌(지금의 룡정시 승지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듬해 현지 4년제 소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농사를 짓게 되였다. 1927년, 주덕해는 야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진보사상의 계몽을 받게 되였으며 1928년 여름, 당시 연변일대에서 활동하던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30년 8월, 주덕해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단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중공녕안현위 기관에서 통신사업을 했다. 1931년 1월, 주덕해는 현당위의 지시에 따라 전도훈이라는 가명으로 남호두에 가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녕안현 남호두구위를 건립하고 서기를 맡았다. 5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 9.18사변 이후 주덕해 등은 남호두지역 농민들을 발동하여 ‘추수투쟁’을 전개했으며 저장된 량식을 거둬들였다. 1932년 1월, 주덕해는 현당위의 지시에 따라 우가툰에 전이했으며 오동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청단 우가툰 특별지부 서기를 맡았다. 1933년초, 주덕해는 밀산현 이인반촌에 당지부를 건립했으며 서기를 담임했다. 구당위의 지시에 따라 서대림자촌으로 전이한 그는 오영일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서대림자촌의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10월, 서대림자항일구국회를 건립했으며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주덕해라는 이름으로 혁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35년 2월, 주덕해는 명을 받고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신편 2퇀에 가서 류수처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얼마 후, 병으로 더는 부대에서 사업할 수 없게 된 그는 발리현 소석참 수전촌에 가서 병치료를 하면서 지방의 사업을 협조했다.
1936년 6월, 길동지구 당조직에서는 주덕해를 쏘련으로 파견하여 학습하게 했다. 1939년 3월에 귀국하여 9월에는 연안으로 가 항일군정대학 간부훈련대 동북반에 입학했다. 그해 겨울,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 지도원을 맡았다. 또한 대생산운동에서 남니만으로 진입했다. 1942년초, 주덕해는 중앙해외연구반에서 학습하며 연안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43년초, 주덕해는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건설에 참여하고 건교 후 학교 당위 위원, 교무위원회 위원, 총무처 처장을 담임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주덕해는 부대를 따라 연안에서 출발했고 1945년 11월, 할빈에 도착했다. 독립대대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되고 주덕해는 정치위원을 담임했다.
1947년초, 중공송강성위의 위탁을 받고 주덕해는 아성, 빈현, 방정, 연수, 주하, 오상, 목단강 등 조선족집거지역의 토지개혁 운동을 책임지고 령도했다.
1948년 4월, 주덕해는 명을 받고 부대를 떠나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 처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주덕해는 연변으로 부임하여 조선민족대학—연변대학의 건설사업을 시작하게 되였다. 4월 1일, 중국조선족의 첫 고등학부인 동북조선인민대학(지금의 연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주덕해가 교장을 맡았다. 주덕해는 교육사업에 대해 고도의 중시를 돌렸는데 수년간의 노력을 거쳐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위생학교, 한어사범학교, 재무학교, 예술학교 등 고등학교 및 중등전문학교들을 건립하여 대량의 사회주의건설 사업에 필요한 각종 전문기술인재와 민족간부들을 양성했다. 연변의 교육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보급, 발전되였다. 9월, 그는 전국정협 제1기 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대회에 참가했다.
1952년 8월 9일, 중앙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 실시강요>를 반포했다. 중공연변지구위원회와 연변전원공서는 <강요>와 성당위, 성정부의 결정에 따라 8월 29일, 연길시에서 연변 여러 민족 각계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인민대표대회 직능을 대행했다. 회의에서 주덕해는 선거에 의해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연변에서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하기 시작한 후 주덕해는 각급 간부들에게 맑스주의 민족관과 조국관을 심어주는 교양을 다잡고 진행했으며 조선족 간부들과 군중들에게 중국공산당을 열애하고 사회주의조국을 열애하며 여러 민족 간부들이 한마음한뜻으로 단결일치하여 변강을 건설할 것을 강조했다.
1954년 7월, 주덕해는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을 맡았고 1955년 1월, 부성장(여전히 연변의 사업을 주최함)으로 임명되였다. 주덕해는 연변에 부임한 이후 실제에 심입하여 조사연구를 펼쳤고 연변의 산과 강을 누비면서 생산을 발전시키고 산하를 다스렸으며 실제 상황에 부합되는 많은 중요한 조치들을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은 그의 노력하에 실천에 옮겨졌으며 연변으로 하여금 ‘새로운 면모로 바뀌게 했다’.
1965년 11월, 주덕해는 길림성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72년 9월 3일, 주덕해는 페암으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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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죽송(1916—1973)
조선족, 조선 무산군에서 태여났으며 1922년에 부모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대신창촌에 이주했다. 그는 소년시기부터 애국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농업생산을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여 벼재배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1954년 3월 5일,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최죽송은 선후로 시(현), 주, 성, 전국 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으며 저명한 농민벼전문가로 거듭났다. 최죽송은 호조조 조장, 농업생산합작사 주임, 대장, 지부서기, 공사 부사장,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위원, 상무위원, 길림성감찰위원, 성인대 대표 등을 력임했으며 성, 주, 시의 당대표로 선거되였다. 1964년, 최죽송은 전국농업회의에서 담진림 부총리로부터 ‘남진(영강), 북최(죽송)’라는 칭호를 받았다. 1973년 10월, 최죽송은 장춘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초, 최죽송은 중공연변지구위원회와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에서 제기한 ‘자원의 원칙에 따라 생산호조를 조직하자’는 호소에 적극 따라 신풍촌에서 호조조를 조직했다. 1948년, 다섯 가구의 가난한 농민(그중 두 가구는 군인가족)들로 조직된 ‘최죽송 호조조’는 12가구로 발전했다. 치밀하게 조직하고 긴밀히 단결한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수매임무를 초과 달성했다. 같은 해 겨울에 이르러 이 호조조는 18가구로 확대되였다.
신풍촌에서는 벼재배에 줄곧 관수산종법을 사용했는데 비료를 주지 않고 조방형 재배방식으로 그 수확량이 비교적 낮았다. 락후한 경작방식을 개변하기 위해 최죽송은 호조조를 조직할 때부터 남녀로소를 동원하여 거름을 넉넉히 주게 했다. 가을이 되니 헥타르당 산량이 2500킬로그람에 달해 온 마을에서 벼 수확량이 가장 높은 호조조가 되였다. 1948년에는 산량이 헥타르당 3000킬로그람으로 증가했다. 3년간의 노력을 거쳐 최죽송 호조조는 거름을 주지 않던 데로부터 거름을 주게 되였고 논에 직접 파종을 하던 데로부터 모내기를 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증산과 증수에서 뚜렷한 효과를 거두었다.
1951년, 최죽송 실험논의 산량은 헥타르당 6400킬로그람에 이르러 높은 수확고를 기록했다. 같은 해, 그는 길림성농업로력모범대회에 참가하여 ‘길림성농업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그가 이끄는 호조조는 농업부로부터 ‘1951년도 벼생산 다수확 모범’으로 임명되였다.
1954년 3월 5일, 최죽송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55년, 농업합작화의 고조 속에서 신풍대대는 고급농업생산합작사를 설립했다. 최죽송은 사원들을 이끌고 중만숙(中晚熟) 품종을 선택하여 개량육모법을 보급했으며 논밭은 ‘두번 갈아엎고 두번 써레질을 하여’ 합리적인 밀식을 실행했다. 그해 가을, 전체 합작사의 헥타르당 벼생산량은 5111킬로그람에 달했는데 그중 6헥타르의 실험기지에서는 헥타르당 벼생산량이 7500킬로그람에 달했다. 1956년 4월, 농업부 농업고찰조는 최죽송의 벼생산 상황에 대해 고찰하고 충분히 긍정했다. 7월 20일, 《인민일보》는 고찰조의 글을 발표했는데 다년간 과학적인 실험을 견지하면서 벼생산에서 풍작을 이룩한 최죽송의 사적을 소개한 동시에 <누가 북방에서는 벼를 심을 수 없다고 했는가>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1957년, 최죽송은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다.
1962년, 주은래 총리는 최죽송이 벼생산에 있어 대면적으로 풍작을 거둔 경험을 칭찬했다. 1963년, 중공길림성위에서는 연구를 거쳐 4개 현의 5개 공사에 최죽송의 벼생산 다수확 시범기지를 건립하고 최죽송의 벼생산 다수확 기술을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농업과학원에서는《최죽송의 벼생산 다수확 기술》이라는 책을 편찬했으며 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다. 1964년, 최죽송의 벼재배기술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중대기술성과 2등상을 수여받았다. 그외에도 최죽송이 연구해낸 일련의 벼 증산의 선진경험은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풍작상’을 선후로 4차례 수상했다.
1964년, 전국농촌회의에서 최죽송은 벼생산에서 대면적의 풍작을 거둔 경험을 소개하여 회의 참가자들의 높은 긍정과 찬양을 받았으며 ‘농민벼전문가’로 불렸다. 담진림 부총리는 “우리 나라에는 두명의 유명한 농민벼전문가가 있는데 바로 남진(진영강), 북최(최죽송)이다.”라고 말했다. 대회에서는 최죽송에게 ‘북방 농민벼전문가’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길림성농업과학원과 중국농업과학원에서는 각각 최죽송을 특약연구원으로 초빙했다. 같은 해, 최죽송은 선후로 연변주인민정부 위원, 상무위원, 길림성감찰위원회 위원과 성인대 대표로 당선되였다. 그 후에도 최죽송은 육묘방법을 일층 개진했다. 1971년, 최죽송은 성, 주, 시의 당대표로 선거되였으며 길림성특등로력모범으로 평의되고 또 한번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다.
1973년 10월 11일, 헥타르당 벼생산량이 평균 7275킬로그람에 달해 또 한번의 높은 수확고를 기록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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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여원(1904—1973)
호남성 안화현 사람이다. 1923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공안화특별지부 서기, 중공상서지구위원회 서기, 중공호남성위 농업위원회 서기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28년 6월, 명을 받고 동북 봉천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에 가서 사업했다. 1929년 6월, 류소기가 중공만주성위 서기를 맡고 료여원이 중공만주성위 위원 겸 비서장을 맡았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위 서기를 맡았으며 1931년 4월, 중공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38년 11월, 자강항일유격대에 참가해 정치위원을 맡았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중국차잎회사 중남분회사에서 사업했으며 1955년, 광동성차잎회사에 부임하여 과장을 맡았다. 1973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료여원은 호남성 안화현 양림향 로갑방의 한 소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3년 6월, 진담추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중공상구구위의 파견으로 안화현에서 당건설사업을 책임졌으며 중공안화현특별지부 서기로 임명되였다. 1926년 4월, 중공상서지구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1927년 4월, 무한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제5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다. 7월, 중공익양특위 서기를 맡았으며 10월에는 중공호남성위 농업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28년 봄, 중앙장강국에서는 그를 중공상악감변특위 조직부장으로 임명했다.
1928년 6월, 료여원은 명을 받고 봉천의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1929년 6월, 중앙정치국에서는 류소기를 중공만주성위 서기로 파견했으며 료여원을 중공만주성위 위원, 비서장으로 임명했다. 1930년 7월, 중공만주총행동위원회에서는 료여원을 파견하여 사업조를 이끌고 길돈철도연선과 동만 각 현을 순시하면서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도록 했다.
1930년 8월 13일, 료여원, 왕경 등은 약수동에서 동만지구 제1차 당원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공연화중심현위를 설립했는데 산하에 10개 구당위와 48개의 지부를 두었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에서 당의 기층조직을 건립했다. 료여원은 동만에서 순시사업을 펼치는 한달여 동안 대량의 혁명사업을 전개했다. 8월 26일, 중공만주총행동위원회로 돌아간 그는 9월 20일에 일만자에 달하는 ‘동만길돈철도연선 각 현 순시 사업보고’를 작성했다. 보고에서는 동만지역에 대한 당의 령도사업을 강화하는 것의 중요의의에 대해 제시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료여원의 ‘보고’를 청취한 후 9월 25일, 중공동만특위를 설립, 료여원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하며 동만지구 사업에 대한 당의 령도를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 동시에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돈화, 액목, 무송, 화전, 장백 등 10개 현을 중공동만특위가 령도하도록 귀속시켰다. 11월, 료여원은 중공만주성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31년 1월, 료여원은 중공동만특위의 기타 지도자들과 함께 동만의 혁명운동 정세를 분석하고 성당위의 지시를 관철할 데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토론, 제정했다. 그들은 ‘동만유격대 사업요강’, ‘동만적위대 사업요강’, ‘반제국주의운동에 관하여’, ‘통일전선사업에 관하여’, ‘부녀운동에 관하여’, ‘비밀사업에 관하여’ 등 문건들을 제정했다. 혁명활동 경비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연길, 조양천 등 곳에 량식점, 서약국, 사진관, 리발관 등을 경영했는데 이러한 장소들은 상업점포인 동시에 특별위원회 각 부문의 활동거점이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중공동만특위의 경비문제가 해결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위에 500원 은돈을 상납하기도 했다. 4월, 료여원은 중공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부임되였다.
1931년 11월 12일, 그는 중공만주성위 선전부 비서 양선택과 함께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되였다. 1936년 6월 출옥한 후, 당조직과 련락을 취할 수 없었던 그는 할 수 없이 고향인 호남성 안화현으로 돌아가 목탄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1938년 11월, 그는 청년 농민 료렬광과 함께 무장대오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했으며 자강항일유격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12월, 유격대는 300명으로 늘어났으며 료여원은 정치위원을 맡았다.
전국이 해방된 후, 료여원은 한구에 위치한 중국차잎회사 중남구 분회사에서 사업했다. 1955년, 그는 광동성차잎회사에 부임하여 과장을 맡았다. 료여원은 1973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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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1911—1972)
조선족, 본명은 오기섭이며 로씨야 동남부 쌍성자(지금의 로씨야 우쑤리스크시)에서 출생했다. 1920년,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주했으며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1월, 동경성 우가툰특별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1933년 이후부터 밀산현 하달하촌 등 지역의 당지부 서기, 항일구국회 회장, 동북항일련군 제4군 제2퇀 후방류수처당지부 서기 등을 력임했다. 1936년, 쏘련으로 갔으며 1938년,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을 졸업했다. 1939년, 연안으로 돌아와 선후로 연안경비구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 지도원,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 당위 위원, 교무위원, 총무처 처장 등 직무를 력임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에서 사업하면서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 처장, 연변대학 교장, 중공길림성위 위원,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 전원 등을 력임했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주석,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길림성 부성장을 력임했으며 제1기 전국정협 위원, 8차 당대회 후보중앙위원을 담임했다. 1965년 11월, 중공길림성위 제2기 16차 회의에서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72년 7월 3일, 무한에서 병으로 서거했다.
1920년, 주덕해는 어머니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수동촌(지금의 룡정시 승지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듬해 현지 4년제 소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농사를 짓게 되였다. 1927년, 주덕해는 야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진보사상의 계몽을 받게 되였으며 1928년 여름, 당시 연변일대에서 활동하던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30년 8월, 주덕해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단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중공녕안현위 기관에서 통신사업을 했다. 1931년 1월, 주덕해는 현당위의 지시에 따라 전도훈이라는 가명으로 남호두에 가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녕안현 남호두구위를 건립하고 서기를 맡았다. 5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 9.18사변 이후 주덕해 등은 남호두지역 농민들을 발동하여 ‘추수투쟁’을 전개했으며 저장된 량식을 거둬들였다. 1932년 1월, 주덕해는 현당위의 지시에 따라 우가툰에 전이했으며 오동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청단 우가툰 특별지부 서기를 맡았다. 1933년초, 주덕해는 밀산현 이인반촌에 당지부를 건립했으며 서기를 담임했다. 구당위의 지시에 따라 서대림자촌으로 전이한 그는 오영일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서대림자촌의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10월, 서대림자항일구국회를 건립했으며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주덕해라는 이름으로 혁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35년 2월, 주덕해는 명을 받고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신편 2퇀에 가서 류수처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얼마 후, 병으로 더는 부대에서 사업할 수 없게 된 그는 발리현 소석참 수전촌에 가서 병치료를 하면서 지방의 사업을 협조했다.
1936년 6월, 길동지구 당조직에서는 주덕해를 쏘련으로 파견하여 학습하게 했다. 1939년 3월에 귀국하여 9월에는 연안으로 가 항일군정대학 간부훈련대 동북반에 입학했다. 그해 겨울,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 지도원을 맡았다. 또한 대생산운동에서 남니만으로 진입했다. 1942년초, 주덕해는 중앙해외연구반에서 학습하며 연안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43년초, 주덕해는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건설에 참여하고 건교 후 학교 당위 위원, 교무위원회 위원, 총무처 처장을 담임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주덕해는 부대를 따라 연안에서 출발했고 1945년 11월, 할빈에 도착했다. 독립대대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되고 주덕해는 정치위원을 담임했다.
1947년초, 중공송강성위의 위탁을 받고 주덕해는 아성, 빈현, 방정, 연수, 주하, 오상, 목단강 등 조선족집거지역의 토지개혁 운동을 책임지고 령도했다.
1948년 4월, 주덕해는 명을 받고 부대를 떠나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 처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주덕해는 연변으로 부임하여 조선민족대학—연변대학의 건설사업을 시작하게 되였다. 4월 1일, 중국조선족의 첫 고등학부인 동북조선인민대학(지금의 연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주덕해가 교장을 맡았다. 주덕해는 교육사업에 대해 고도의 중시를 돌렸는데 수년간의 노력을 거쳐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위생학교, 한어사범학교, 재무학교, 예술학교 등 고등학교 및 중등전문학교들을 건립하여 대량의 사회주의건설 사업에 필요한 각종 전문기술인재와 민족간부들을 양성했다. 연변의 교육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보급, 발전되였다. 9월, 그는 전국정협 제1기 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대회에 참가했다.
1952년 8월 9일, 중앙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 실시강요>를 반포했다. 중공연변지구위원회와 연변전원공서는 <강요>와 성당위, 성정부의 결정에 따라 8월 29일, 연길시에서 연변 여러 민족 각계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인민대표대회 직능을 대행했다. 회의에서 주덕해는 선거에 의해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연변에서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하기 시작한 후 주덕해는 각급 간부들에게 맑스주의 민족관과 조국관을 심어주는 교양을 다잡고 진행했으며 조선족 간부들과 군중들에게 중국공산당을 열애하고 사회주의조국을 열애하며 여러 민족 간부들이 한마음한뜻으로 단결일치하여 변강을 건설할 것을 강조했다.
1954년 7월, 주덕해는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을 맡았고 1955년 1월, 부성장(여전히 연변의 사업을 주최함)으로 임명되였다. 주덕해는 연변에 부임한 이후 실제에 심입하여 조사연구를 펼쳤고 연변의 산과 강을 누비면서 생산을 발전시키고 산하를 다스렸으며 실제 상황에 부합되는 많은 중요한 조치들을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은 그의 노력하에 실천에 옮겨졌으며 연변으로 하여금 ‘새로운 면모로 바뀌게 했다’.
1965년 11월, 주덕해는 길림성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72년 9월 3일, 주덕해는 페암으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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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죽송(1916—1973)
조선족, 조선 무산군에서 태여났으며 1922년에 부모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대신창촌에 이주했다. 그는 소년시기부터 애국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농업생산을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여 벼재배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1954년 3월 5일,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최죽송은 선후로 시(현), 주, 성, 전국 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으며 저명한 농민벼전문가로 거듭났다. 최죽송은 호조조 조장, 농업생산합작사 주임, 대장, 지부서기, 공사 부사장,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위원, 상무위원, 길림성감찰위원, 성인대 대표 등을 력임했으며 성, 주, 시의 당대표로 선거되였다. 1964년, 최죽송은 전국농업회의에서 담진림 부총리로부터 ‘남진(영강), 북최(죽송)’라는 칭호를 받았다. 1973년 10월, 최죽송은 장춘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초, 최죽송은 중공연변지구위원회와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에서 제기한 ‘자원의 원칙에 따라 생산호조를 조직하자’는 호소에 적극 따라 신풍촌에서 호조조를 조직했다. 1948년, 다섯 가구의 가난한 농민(그중 두 가구는 군인가족)들로 조직된 ‘최죽송 호조조’는 12가구로 발전했다. 치밀하게 조직하고 긴밀히 단결한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수매임무를 초과 달성했다. 같은 해 겨울에 이르러 이 호조조는 18가구로 확대되였다.
신풍촌에서는 벼재배에 줄곧 관수산종법을 사용했는데 비료를 주지 않고 조방형 재배방식으로 그 수확량이 비교적 낮았다. 락후한 경작방식을 개변하기 위해 최죽송은 호조조를 조직할 때부터 남녀로소를 동원하여 거름을 넉넉히 주게 했다. 가을이 되니 헥타르당 산량이 2500킬로그람에 달해 온 마을에서 벼 수확량이 가장 높은 호조조가 되였다. 1948년에는 산량이 헥타르당 3000킬로그람으로 증가했다. 3년간의 노력을 거쳐 최죽송 호조조는 거름을 주지 않던 데로부터 거름을 주게 되였고 논에 직접 파종을 하던 데로부터 모내기를 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증산과 증수에서 뚜렷한 효과를 거두었다.
1951년, 최죽송 실험논의 산량은 헥타르당 6400킬로그람에 이르러 높은 수확고를 기록했다. 같은 해, 그는 길림성농업로력모범대회에 참가하여 ‘길림성농업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그가 이끄는 호조조는 농업부로부터 ‘1951년도 벼생산 다수확 모범’으로 임명되였다.
1954년 3월 5일, 최죽송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55년, 농업합작화의 고조 속에서 신풍대대는 고급농업생산합작사를 설립했다. 최죽송은 사원들을 이끌고 중만숙(中晚熟) 품종을 선택하여 개량육모법을 보급했으며 논밭은 ‘두번 갈아엎고 두번 써레질을 하여’ 합리적인 밀식을 실행했다. 그해 가을, 전체 합작사의 헥타르당 벼생산량은 5111킬로그람에 달했는데 그중 6헥타르의 실험기지에서는 헥타르당 벼생산량이 7500킬로그람에 달했다. 1956년 4월, 농업부 농업고찰조는 최죽송의 벼생산 상황에 대해 고찰하고 충분히 긍정했다. 7월 20일, 《인민일보》는 고찰조의 글을 발표했는데 다년간 과학적인 실험을 견지하면서 벼생산에서 풍작을 이룩한 최죽송의 사적을 소개한 동시에 <누가 북방에서는 벼를 심을 수 없다고 했는가>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1957년, 최죽송은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다.
1962년, 주은래 총리는 최죽송이 벼생산에 있어 대면적으로 풍작을 거둔 경험을 칭찬했다. 1963년, 중공길림성위에서는 연구를 거쳐 4개 현의 5개 공사에 최죽송의 벼생산 다수확 시범기지를 건립하고 최죽송의 벼생산 다수확 기술을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농업과학원에서는《최죽송의 벼생산 다수확 기술》이라는 책을 편찬했으며 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다. 1964년, 최죽송의 벼재배기술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중대기술성과 2등상을 수여받았다. 그외에도 최죽송이 연구해낸 일련의 벼 증산의 선진경험은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풍작상’을 선후로 4차례 수상했다.
1964년, 전국농촌회의에서 최죽송은 벼생산에서 대면적의 풍작을 거둔 경험을 소개하여 회의 참가자들의 높은 긍정과 찬양을 받았으며 ‘농민벼전문가’로 불렸다. 담진림 부총리는 “우리 나라에는 두명의 유명한 농민벼전문가가 있는데 바로 남진(진영강), 북최(최죽송)이다.”라고 말했다. 대회에서는 최죽송에게 ‘북방 농민벼전문가’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길림성농업과학원과 중국농업과학원에서는 각각 최죽송을 특약연구원으로 초빙했다. 같은 해, 최죽송은 선후로 연변주인민정부 위원, 상무위원, 길림성감찰위원회 위원과 성인대 대표로 당선되였다. 그 후에도 최죽송은 육묘방법을 일층 개진했다. 1971년, 최죽송은 성, 주, 시의 당대표로 선거되였으며 길림성특등로력모범으로 평의되고 또 한번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다.
1973년 10월 11일, 헥타르당 벼생산량이 평균 7275킬로그람에 달해 또 한번의 높은 수확고를 기록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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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여원(1904—1973)
호남성 안화현 사람이다. 1923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공안화특별지부 서기, 중공상서지구위원회 서기, 중공호남성위 농업위원회 서기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28년 6월, 명을 받고 동북 봉천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에 가서 사업했다. 1929년 6월, 류소기가 중공만주성위 서기를 맡고 료여원이 중공만주성위 위원 겸 비서장을 맡았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위 서기를 맡았으며 1931년 4월, 중공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38년 11월, 자강항일유격대에 참가해 정치위원을 맡았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중국차잎회사 중남분회사에서 사업했으며 1955년, 광동성차잎회사에 부임하여 과장을 맡았다. 1973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료여원은 호남성 안화현 양림향 로갑방의 한 소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3년 6월, 진담추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중공상구구위의 파견으로 안화현에서 당건설사업을 책임졌으며 중공안화현특별지부 서기로 임명되였다. 1926년 4월, 중공상서지구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1927년 4월, 무한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제5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다. 7월, 중공익양특위 서기를 맡았으며 10월에는 중공호남성위 농업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28년 봄, 중앙장강국에서는 그를 중공상악감변특위 조직부장으로 임명했다.
1928년 6월, 료여원은 명을 받고 봉천의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1929년 6월, 중앙정치국에서는 류소기를 중공만주성위 서기로 파견했으며 료여원을 중공만주성위 위원, 비서장으로 임명했다. 1930년 7월, 중공만주총행동위원회에서는 료여원을 파견하여 사업조를 이끌고 길돈철도연선과 동만 각 현을 순시하면서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도록 했다.
1930년 8월 13일, 료여원, 왕경 등은 약수동에서 동만지구 제1차 당원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공연화중심현위를 설립했는데 산하에 10개 구당위와 48개의 지부를 두었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에서 당의 기층조직을 건립했다. 료여원은 동만에서 순시사업을 펼치는 한달여 동안 대량의 혁명사업을 전개했다. 8월 26일, 중공만주총행동위원회로 돌아간 그는 9월 20일에 일만자에 달하는 ‘동만길돈철도연선 각 현 순시 사업보고’를 작성했다. 보고에서는 동만지역에 대한 당의 령도사업을 강화하는 것의 중요의의에 대해 제시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료여원의 ‘보고’를 청취한 후 9월 25일, 중공동만특위를 설립, 료여원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하며 동만지구 사업에 대한 당의 령도를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 동시에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돈화, 액목, 무송, 화전, 장백 등 10개 현을 중공동만특위가 령도하도록 귀속시켰다. 11월, 료여원은 중공만주성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31년 1월, 료여원은 중공동만특위의 기타 지도자들과 함께 동만의 혁명운동 정세를 분석하고 성당위의 지시를 관철할 데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토론, 제정했다. 그들은 ‘동만유격대 사업요강’, ‘동만적위대 사업요강’, ‘반제국주의운동에 관하여’, ‘통일전선사업에 관하여’, ‘부녀운동에 관하여’, ‘비밀사업에 관하여’ 등 문건들을 제정했다. 혁명활동 경비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연길, 조양천 등 곳에 량식점, 서약국, 사진관, 리발관 등을 경영했는데 이러한 장소들은 상업점포인 동시에 특별위원회 각 부문의 활동거점이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중공동만특위의 경비문제가 해결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위에 500원 은돈을 상납하기도 했다. 4월, 료여원은 중공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부임되였다.
1931년 11월 12일, 그는 중공만주성위 선전부 비서 양선택과 함께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되였다. 1936년 6월 출옥한 후, 당조직과 련락을 취할 수 없었던 그는 할 수 없이 고향인 호남성 안화현으로 돌아가 목탄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1938년 11월, 그는 청년 농민 료렬광과 함께 무장대오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했으며 자강항일유격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12월, 유격대는 300명으로 늘어났으며 료여원은 정치위원을 맡았다.
전국이 해방된 후, 료여원은 한구에 위치한 중국차잎회사 중남구 분회사에서 사업했다. 1955년, 그는 광동성차잎회사에 부임하여 과장을 맡았다. 료여원은 1973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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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화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