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66
왕순문(1919—1980)
1917년 12월, 하북성 순의현(지금은 북경시에 속함)에서 태여났다. 길림성 돈화현 황니하자 삼림철도 기무계 운전수, 1949년초부터 1950년 6월까지 그가 운전한 410호 기관차는 기관차 갑종 점검수리 한개 기한을 초과하고 5만 2000여킬로메터를 안전하게 운행하여 림업운수의 기록을 창조했다. 1949년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50년에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다. 1980년 5월 18일,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왕순문은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였으며 삼촌이 그를 키워주었다. 1937년 가을, 외삼촌을 따라 길림성 돈화현 대석두 삼림구역에 가서 삼림철도를 수축하는 일을 했다. 1945년 8월에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동북민주련군 길림경비 2려가 대석두 삼림구역을 접수했다. 왕순문은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부대를 찾아 상황을 보고하면서 로동자대오 속에 숨어있는 토비들을 적발했다. 삼림구역 저목장, 삼림철도는 호장대를 설립하고 왕순문이 호장원을 맡았다. 1947년 겨울, 왕순문은 황니허 삼림철도단에 부임하여 사업했다. 그와 로동자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황니허 삼림철도운수는 1948년에 전면 회복되였다. 그는 적들과 투쟁하는 한편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제출했으며 1949년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9년 4월, 삼림철도기관차에서 책임제도를 내왔다. 왕순문과 기타 5명은 한개 소조를 무어 상태가 제일 나쁜 410호 기관차를 주동적으로 맡았다. 1949년 6월부터 년말까지 기관차는 량호한 상태를 유지했으며 동북삼림철도에서 2만 3000킬로메터 안전운행, 련속 166일간 무사고, 운수능률 90.8% 등 세가지 최고기록을 창조했다. 1949년 11월 25일, 동북삼림공업총국에서 소집한 제1차 림업로력모범대회에서 왕순문은 동북림업전선의 모범으로 평의되였으며 410기관차조는 ‘모범기관차소조’라는 영예를 받게 되였다.
1950년 9월, 북경에서 전국 로농병로력모범대표대회가 열렸다. 왕순문은 모택동 주석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으며 모주석이 북경식당에서 로력모범대표들을 초대한 연회에 참가했다. 또 천안문관람대에서 새 중국 창건 1주년 경축대회에 참가했다. 황니허에 돌아온 후 왕순문은 410기관차조 성원들과 함께 새로운 분투목표를 확립했다. 그들은 새 시기의 기관차가 되여 정치를 학습하고 기술을 학습하며 10만킬로메터를 안전운행함으로써 항미원조전쟁을 지원하고 사회주의 새 중국을 건설하는 데 더욱 큰 공헌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1951년 7월 5일까지 왕순문이 운전한 삼림철도렬차는 당시 전국 삼림철도운수의 새로운 기록을 창조했는데 기관차가 갑종 점검수리 한개 기한을 초과하여 안전하게 10만킬로메터를 운행했다. 1952년초, 당조직에서는 왕순문을 심양동북공학원부속 로농속성중학 고중반에 추천하여 학습하게 했다. 1956년 9월에 졸업한 후, 조직에서는 그를 황니허림업국 삼림처 부주임으로 임명했으며 기무사업을 책임지도록 했다. 왕순문 등 여러 사람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황니허림업국은 1957년에 성정부로부터 2등 선진삼림공업국, 1960년에 립업부로부터 ‘전국기층붉은기단위’, 1961년에는 성정부로부터 선진단위로 평의되였다.
국민경제가 곤난하던 시기, 왕순문의 신체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을 고려하여 림업국에서는 그를 행정, 후근 사업을 책임지도록 했다. 전체 삼림철도연선에는 크고 작은 식당이 70여개가 있었는데 그 어느 곳에나 왕순문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순문은 농부업기지를 건립하고 각 식당에서 닭, 돼지를 키우고 곡식과 남새를 심도록 동원하여 일선생산로동자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했다. 왕순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해 로동자들은 큰 만족을 얻었으나 그의 신체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였고 선후로 세번의 위절제술을 받았다. 1980년 5월 18일, 왕순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7
교수귀(1909—1984)
본명은 강진강이며 산동성 사수현 대삼각만촌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1년, 구국군 요진산부대에 들어가 항일구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주보중이 령도하는 수녕반일동맹군에 참가했으며 1935년,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군부에 파견되여 주보중 군장의 경위 부관을 맡았다. 1938년, 주보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2년,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패장을 맡았다. 1949년, 연변전원공서 무장과 과장으로 부임했고 그 후로 주법원 원장, 부주장, 주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을 력임했다. 1984년, 연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교수귀는 가정생활이 곤난하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지자 생계를 위해 17세에 고향을 떠나 동북으로 왔다. 철광, 철도건설 공사장에서 막로동을 하던 그는 1931년 4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구국군 요진산 부대에 참가했으며 항일구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그는 주보중이 령도하는 수녕반일동맹군에 참가했으며 진한장과 함께 련화포, 남호두, 북호두 등 액목현과 녕안현이 린접한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5년 2월, 수녕반일동맹군은 동북반일련합제5군으로 재편성되였으며 교수귀가 제1사 3퇀 2영 3련 2패 패장을 맡았다. 1935년 봄, 그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군부에 파견되여 주보중 군장의 경위 부관을 맡게 되였다. 1937년,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이 설립되고 교수귀는 제2로군 총지휘인 주보중의 경위 부관으로서 부대 수장을 보호하는 경위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했다. 1938년 4월, 교수귀는 주보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2년 3월, 교수귀는 한개 소분대를 거느리고 쏘련 야영지로부터 수화지역에 가서 적의 상황을 정찰하는 임무를 집행했다. 같은 해 8월 1일, 동북항일련군 교도려가 쏘련 야영지에서 설립되고 교수귀는 4영 패장으로 임명되였다. 후에 그는 쏘련 홍성훈장(红星勋章)을 받았다. 1945년 8월, 교수귀는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목단강 분견대에 편입되였는데 목단강에 도착한 후 녕안현성 방위 사령으로 임명되였다. 같은 해 9월말의 어느 하루, 통신원을 이끌고 거리에서 검사사업을 진행하던 그는 국민당 특무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였다. 1949년 1월, 교수귀는 연변전원공서 무장과 과장으로 부임했으며 그 후로 민정과장, 주법원 원장, 부주장, 주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84년 1월 16일, 교수귀는 연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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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연록(1895—1985)
자는 경빈이며 길림성 연길현 사람이다. 1931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이전 연길현염무국 밀수입단속련(缉私连) 련장을 맡은 적이 있다. 1932년 1월, 중공연길현위의 파견을 받고 길림중국국민구국군 왕덕림부대로 가서 사업했다. 1933년부터 동북항일구국유격군 사령, 동북인민혁명군 군장,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 등을 력임했다. 1938년 10월에 연안으로 갔다. 1939년 1월, 중공중앙동북사업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거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흑룡강성 부성장,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맡았다. 1985년, 북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7년, 리연록은 연길현염무국 밀수입단속련 련장을 맡았는데 이 기간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하고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연길유격소조에 참가했다. 1928년 가을, 리연록은 일본제국주의가 강제적으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길회철도 수축권을 탈취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고 1930년에는 ‘5.30폭동’에 참가했다.
반일투쟁 가운데서 리연록의 사상각오는 현저한 제고를 가져왔다. 1931년 7월 1일,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1월, 리연록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원 길림성방군 27려 676퇀 3영에서 병사운동 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기간 3영 영장 왕덕림에게 설복교양을 진행했다. 1932년 2월 8일, 왕덕림은 연길현 소성자에서 항일결의대회를 소집하고 ‘길림중국국민구국군’을 설립, 왕덕림이 총사령을 맡고 리연록이 총부 참모장을 맡았다. 리연록의 노력으로 구국군에서 중국공산당이 직접적으로 령도하는 제1보총퇀, 제2보충퇀을 조직했는데 병력이 700여명에 달했다. 이 기간 리연록은 돈화현성 공략 전투에 참가했다.
1932년 11월, 중공수녕중심현위에서는 제1보충퇀, 제2보충퇀을 토대로 중공에서 직접 령도하는 항일무장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 4일, 중공수녕중심현위의 지시에 따라 제1보충퇀, 제2보충퇀과 17퇀은 항일유격총대로 재편성되였으며 리연록이 총대장을 맡았다. 1월 하순, 항일유격총대는 동북항일구국유격군으로 명명되였으며 리연록이 사령을 맡았다. 리연록은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을 이끌고 녕안, 왕청 일대에서 적들과 상대하면서 선후로 일본괴뢰 ‘토벌대’를 격퇴시키고 왕청현 가야하구의 마가대툰보위전에서 적들의 사면 ‘토벌’을 물리치고 괴뢰군 한개 련을 소멸했다.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은 련전련승했다.
1933년 여름, 리연록은 밀산 일대에 분산된 리두부대를 조직하여 밀산항일유격구를 개척하자는 건의를 제기했다. 리연록의 건의는 중공동만특위와 중공만주성위 길동국의 비준을 받았다. 6월 하순, 리연록은 약 400명을 이끌고 밀산에 도착했다. 중공만주성위 길동국의 도움으로 각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되였으며 리연록이 군장을 맡았다. 9월 16일, 그가 이끈 동북인민혁명군의 각 부대는 밀산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밀산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1934년 가을,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오평이 길동지역에서 순시사업을 펼치고 밀산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을 합병시켜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재편성했으며 리연록이 군장을 맡도록 했다. 제4군은 계속하여 밀산, 발리, 의란, 방정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부단히 대오를 발전시켜나갔다. 1935년 여름,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7개 퇀, 2개 독립려, 1개 위대련을 갖춘 도합 1800여명의 대오로 발전했다. 1935년 9월 26일, 리연록은 조령을 함락시키고 림구를 탈취했다. 리연록과 3군 군장 조상지는 북만지역 련합항일의 새 국면을 개척했다.
1936년 4월, 〈동북항일련군 군대편제를 통일할 데 관한 선언〉에 따라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였으며 리연록이 군장을 맡았다. 같은 달, 그는 명을 받고 모스크바의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으로 가서 새로운 임무를 집행했다. 같은 해 11월 귀국 후, 당조직은 또 그를 상해 등 곳에 파견하여 당의 통일전선 사업에 참가하게 했다. 1937년 봄, 동북항일구망총회가 북평에서 정식으로 설립되고 리연록이 총회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38년 11월, 그는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무한을 거쳐 연안에 도착했다. 1939년 1월, 당중앙은 동북사업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1940년 봄, 리연록은 동북사업위원회의 동지들과 함께 수집, 총화, 정리를 거쳐 ‘동북항일투쟁 약간의 경험’, ‘동북개황’, ‘괴뢰만주국인민 통치방법’ 등 10여만자에 달하는 자료들을 편찬하여 당중앙 지도자들이 참고하도록 제공했다.
1945년 4월, 리연록은 7차 당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 후 당중앙은 그를 동북으로 파견해 사업하도록 했다. 리연록은 선후로 중공합강성정부 주석, 동북행정위원회 위원, 송강성정부 부성장, 중공송강성위 위원을 맡고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전국인대 대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맡았다. 1985년 6월 18일, 리연록은 북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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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순문(1919—1980)
1917년 12월, 하북성 순의현(지금은 북경시에 속함)에서 태여났다. 길림성 돈화현 황니하자 삼림철도 기무계 운전수, 1949년초부터 1950년 6월까지 그가 운전한 410호 기관차는 기관차 갑종 점검수리 한개 기한을 초과하고 5만 2000여킬로메터를 안전하게 운행하여 림업운수의 기록을 창조했다. 1949년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50년에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의되였다. 1980년 5월 18일,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왕순문은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였으며 삼촌이 그를 키워주었다. 1937년 가을, 외삼촌을 따라 길림성 돈화현 대석두 삼림구역에 가서 삼림철도를 수축하는 일을 했다. 1945년 8월에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동북민주련군 길림경비 2려가 대석두 삼림구역을 접수했다. 왕순문은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부대를 찾아 상황을 보고하면서 로동자대오 속에 숨어있는 토비들을 적발했다. 삼림구역 저목장, 삼림철도는 호장대를 설립하고 왕순문이 호장원을 맡았다. 1947년 겨울, 왕순문은 황니허 삼림철도단에 부임하여 사업했다. 그와 로동자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황니허 삼림철도운수는 1948년에 전면 회복되였다. 그는 적들과 투쟁하는 한편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제출했으며 1949년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9년 4월, 삼림철도기관차에서 책임제도를 내왔다. 왕순문과 기타 5명은 한개 소조를 무어 상태가 제일 나쁜 410호 기관차를 주동적으로 맡았다. 1949년 6월부터 년말까지 기관차는 량호한 상태를 유지했으며 동북삼림철도에서 2만 3000킬로메터 안전운행, 련속 166일간 무사고, 운수능률 90.8% 등 세가지 최고기록을 창조했다. 1949년 11월 25일, 동북삼림공업총국에서 소집한 제1차 림업로력모범대회에서 왕순문은 동북림업전선의 모범으로 평의되였으며 410기관차조는 ‘모범기관차소조’라는 영예를 받게 되였다.
1950년 9월, 북경에서 전국 로농병로력모범대표대회가 열렸다. 왕순문은 모택동 주석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으며 모주석이 북경식당에서 로력모범대표들을 초대한 연회에 참가했다. 또 천안문관람대에서 새 중국 창건 1주년 경축대회에 참가했다. 황니허에 돌아온 후 왕순문은 410기관차조 성원들과 함께 새로운 분투목표를 확립했다. 그들은 새 시기의 기관차가 되여 정치를 학습하고 기술을 학습하며 10만킬로메터를 안전운행함으로써 항미원조전쟁을 지원하고 사회주의 새 중국을 건설하는 데 더욱 큰 공헌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1951년 7월 5일까지 왕순문이 운전한 삼림철도렬차는 당시 전국 삼림철도운수의 새로운 기록을 창조했는데 기관차가 갑종 점검수리 한개 기한을 초과하여 안전하게 10만킬로메터를 운행했다. 1952년초, 당조직에서는 왕순문을 심양동북공학원부속 로농속성중학 고중반에 추천하여 학습하게 했다. 1956년 9월에 졸업한 후, 조직에서는 그를 황니허림업국 삼림처 부주임으로 임명했으며 기무사업을 책임지도록 했다. 왕순문 등 여러 사람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황니허림업국은 1957년에 성정부로부터 2등 선진삼림공업국, 1960년에 립업부로부터 ‘전국기층붉은기단위’, 1961년에는 성정부로부터 선진단위로 평의되였다.
국민경제가 곤난하던 시기, 왕순문의 신체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을 고려하여 림업국에서는 그를 행정, 후근 사업을 책임지도록 했다. 전체 삼림철도연선에는 크고 작은 식당이 70여개가 있었는데 그 어느 곳에나 왕순문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순문은 농부업기지를 건립하고 각 식당에서 닭, 돼지를 키우고 곡식과 남새를 심도록 동원하여 일선생산로동자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했다. 왕순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해 로동자들은 큰 만족을 얻었으나 그의 신체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였고 선후로 세번의 위절제술을 받았다. 1980년 5월 18일, 왕순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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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귀(1909—1984)
본명은 강진강이며 산동성 사수현 대삼각만촌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1년, 구국군 요진산부대에 들어가 항일구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주보중이 령도하는 수녕반일동맹군에 참가했으며 1935년,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군부에 파견되여 주보중 군장의 경위 부관을 맡았다. 1938년, 주보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2년,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패장을 맡았다. 1949년, 연변전원공서 무장과 과장으로 부임했고 그 후로 주법원 원장, 부주장, 주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을 력임했다. 1984년, 연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교수귀는 가정생활이 곤난하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지자 생계를 위해 17세에 고향을 떠나 동북으로 왔다. 철광, 철도건설 공사장에서 막로동을 하던 그는 1931년 4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구국군 요진산 부대에 참가했으며 항일구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그는 주보중이 령도하는 수녕반일동맹군에 참가했으며 진한장과 함께 련화포, 남호두, 북호두 등 액목현과 녕안현이 린접한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5년 2월, 수녕반일동맹군은 동북반일련합제5군으로 재편성되였으며 교수귀가 제1사 3퇀 2영 3련 2패 패장을 맡았다. 1935년 봄, 그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군부에 파견되여 주보중 군장의 경위 부관을 맡게 되였다. 1937년,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이 설립되고 교수귀는 제2로군 총지휘인 주보중의 경위 부관으로서 부대 수장을 보호하는 경위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했다. 1938년 4월, 교수귀는 주보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2년 3월, 교수귀는 한개 소분대를 거느리고 쏘련 야영지로부터 수화지역에 가서 적의 상황을 정찰하는 임무를 집행했다. 같은 해 8월 1일, 동북항일련군 교도려가 쏘련 야영지에서 설립되고 교수귀는 4영 패장으로 임명되였다. 후에 그는 쏘련 홍성훈장(红星勋章)을 받았다. 1945년 8월, 교수귀는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목단강 분견대에 편입되였는데 목단강에 도착한 후 녕안현성 방위 사령으로 임명되였다. 같은 해 9월말의 어느 하루, 통신원을 이끌고 거리에서 검사사업을 진행하던 그는 국민당 특무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였다. 1949년 1월, 교수귀는 연변전원공서 무장과 과장으로 부임했으며 그 후로 민정과장, 주법원 원장, 부주장, 주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84년 1월 16일, 교수귀는 연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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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연록(1895—1985)
자는 경빈이며 길림성 연길현 사람이다. 1931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이전 연길현염무국 밀수입단속련(缉私连) 련장을 맡은 적이 있다. 1932년 1월, 중공연길현위의 파견을 받고 길림중국국민구국군 왕덕림부대로 가서 사업했다. 1933년부터 동북항일구국유격군 사령, 동북인민혁명군 군장,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 등을 력임했다. 1938년 10월에 연안으로 갔다. 1939년 1월, 중공중앙동북사업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거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흑룡강성 부성장,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맡았다. 1985년, 북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7년, 리연록은 연길현염무국 밀수입단속련 련장을 맡았는데 이 기간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하고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연길유격소조에 참가했다. 1928년 가을, 리연록은 일본제국주의가 강제적으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길회철도 수축권을 탈취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고 1930년에는 ‘5.30폭동’에 참가했다.
반일투쟁 가운데서 리연록의 사상각오는 현저한 제고를 가져왔다. 1931년 7월 1일,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1월, 리연록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원 길림성방군 27려 676퇀 3영에서 병사운동 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기간 3영 영장 왕덕림에게 설복교양을 진행했다. 1932년 2월 8일, 왕덕림은 연길현 소성자에서 항일결의대회를 소집하고 ‘길림중국국민구국군’을 설립, 왕덕림이 총사령을 맡고 리연록이 총부 참모장을 맡았다. 리연록의 노력으로 구국군에서 중국공산당이 직접적으로 령도하는 제1보총퇀, 제2보충퇀을 조직했는데 병력이 700여명에 달했다. 이 기간 리연록은 돈화현성 공략 전투에 참가했다.
1932년 11월, 중공수녕중심현위에서는 제1보충퇀, 제2보충퇀을 토대로 중공에서 직접 령도하는 항일무장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 4일, 중공수녕중심현위의 지시에 따라 제1보충퇀, 제2보충퇀과 17퇀은 항일유격총대로 재편성되였으며 리연록이 총대장을 맡았다. 1월 하순, 항일유격총대는 동북항일구국유격군으로 명명되였으며 리연록이 사령을 맡았다. 리연록은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을 이끌고 녕안, 왕청 일대에서 적들과 상대하면서 선후로 일본괴뢰 ‘토벌대’를 격퇴시키고 왕청현 가야하구의 마가대툰보위전에서 적들의 사면 ‘토벌’을 물리치고 괴뢰군 한개 련을 소멸했다.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은 련전련승했다.
1933년 여름, 리연록은 밀산 일대에 분산된 리두부대를 조직하여 밀산항일유격구를 개척하자는 건의를 제기했다. 리연록의 건의는 중공동만특위와 중공만주성위 길동국의 비준을 받았다. 6월 하순, 리연록은 약 400명을 이끌고 밀산에 도착했다. 중공만주성위 길동국의 도움으로 각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되였으며 리연록이 군장을 맡았다. 9월 16일, 그가 이끈 동북인민혁명군의 각 부대는 밀산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밀산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1934년 가을,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오평이 길동지역에서 순시사업을 펼치고 밀산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을 합병시켜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재편성했으며 리연록이 군장을 맡도록 했다. 제4군은 계속하여 밀산, 발리, 의란, 방정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부단히 대오를 발전시켜나갔다. 1935년 여름,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7개 퇀, 2개 독립려, 1개 위대련을 갖춘 도합 1800여명의 대오로 발전했다. 1935년 9월 26일, 리연록은 조령을 함락시키고 림구를 탈취했다. 리연록과 3군 군장 조상지는 북만지역 련합항일의 새 국면을 개척했다.
1936년 4월, 〈동북항일련군 군대편제를 통일할 데 관한 선언〉에 따라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였으며 리연록이 군장을 맡았다. 같은 달, 그는 명을 받고 모스크바의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으로 가서 새로운 임무를 집행했다. 같은 해 11월 귀국 후, 당조직은 또 그를 상해 등 곳에 파견하여 당의 통일전선 사업에 참가하게 했다. 1937년 봄, 동북항일구망총회가 북평에서 정식으로 설립되고 리연록이 총회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38년 11월, 그는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무한을 거쳐 연안에 도착했다. 1939년 1월, 당중앙은 동북사업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1940년 봄, 리연록은 동북사업위원회의 동지들과 함께 수집, 총화, 정리를 거쳐 ‘동북항일투쟁 약간의 경험’, ‘동북개황’, ‘괴뢰만주국인민 통치방법’ 등 10여만자에 달하는 자료들을 편찬하여 당중앙 지도자들이 참고하도록 제공했다.
1945년 4월, 리연록은 7차 당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 후 당중앙은 그를 동북으로 파견해 사업하도록 했다. 리연록은 선후로 중공합강성정부 주석, 동북행정위원회 위원, 송강성정부 부성장, 중공송강성위 위원을 맡고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전국인대 대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맡았다. 1985년 6월 18일, 리연록은 북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