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69
송진정(1921—1985)
길림성 연길시의 한 수공업자 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송사달, 송지동 등으로 불렸다. 1936년에 중화민족해방선봉대에 가입하여 선전위원, 분대장으로 활약했으며 1937년에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고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연안의 맑스-레닌학원 철학연구실 연구원, 화북련합대학 철학교연실 주임으로 지내다가 항일전쟁 승리 후 동북국 기관지인 《동북일보》의 편집, 중공연길시위 서기, 중공연길현위 서기로 지냈다. 새 중국 창건 이후 선후로 중공길림성위 선전부 부부장, 부장, 성당위 상무위원회 위원,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등을 력임했다. 1979년 3월에는 중공중앙 당학교 교육장, 고문을 맡았다. 12차 당대회 당대표이자 제6기 전국정협 위원이다. 1985년 2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6년, 송진정은 연길시북산소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에 가족과 함께 북평(지금의 북경)으로 가서 북평북방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이 기간 《공산당선언》, 《국가와 혁명》, 《철류》, 《훼멸》 등 책을 읽었다. 1936년 여름, 그는 중화민족해방선봉대에 가입했으며 선봉대의 선전위원 및 분대장으로 활약했다. 1937년 ‘7.7사변’ 후에는 전선봉사대에 참가하여 29군 부상자들을 위문했다. 1937년 8월, 중화민족해방선봉대의 통일적 배치에 따라 북평에서 남경으로 건너간 그는 전 시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모금과 《해방주간》 배포에 적극 참여했으며 청년학생들을 연안으로 가도록 동원했다. 그해 9월, 양백잠, 정일람 등 6명과 함께 연안에 갔다가 10월말에는 항일군정대학 제3기 3대대에 입학했다.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7월에는 연안의 맑스-레닌학원 철학연구실에서 학습했다. 1939년 7월, 당중앙은 화북련합항일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송진정은 이 학교의 철학교원으로 임명되였다. 이어 화북항일련합대학 교육과장, 철학교연실 주임 등 직을 지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송진정은 동북으로 건너가 동북국 기관지인 《동북일보》에서 편집으로 일했다. 1945년말, 송진정은 동북국 조직부의 파견을 받고 국가중점문화재를 구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였다. 당시 장춘시 위만황궁의 장서는 대부분 부의가 고궁에서 가져온 선본서(善本书)였다. 1946년 5월, 송진정은 병사들을 이끌고 송, 원판 등 선본서와 《청실록》, 희귀고화, 외국서적 등을 밤새도록 정리, 포장하여 5월 22일에 중앙길동근거지로 옮겼다. 5월말, 송진정은 중공연길시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이 기간 그는 공작대를 이끌고 직접 해란구에 내려가 군중들의 생활을 살피고 곤난을 료해했으며 빈고농민들의 계급의식을 각성시켰다.
1950년 가을, 송진정은 길림성인민정부 당조 성원, 문화처 처장으로 전근했다가 1952년에 중공길림성위 선전부 부장으로 임명되였다. 간부들을 대상한 정규화 교양에서 그는 철학, 정치경제학, 과학사회주의리론과 당사를 강의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길림성에서는 성문학예술계련합회, 성박물관, 성작가협회, 성가무극원, 성경극원, 성길극단 등이 륙속 설립되였다. 1958년, 그는 성당위의 통일적인 배치하에 북경으로 가서 교육부, 위생부와 협상한 후 각 대학에 사상동원을 하여 길림성에서 재빨리 길림대학, 길림공업대학, 길림의과대학(후에 베쮼의과대학으로 변경), 동북사범대학, 길림농업대학 등을 주체로 하는 로, 농, 의, 사 종합적인 고등교육 체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송진정은 ‘길극(吉剧)’ 창조의 조직자, 령도자이자 구체적인 실천자였으며 ‘길극’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1976년, 송진정은 중공길림성위 선전부 사업을 책임졌다. 1979년 3월에 중공중앙 당학교 교육장, 성당위 상무위원을 담임했고 1983년 10월에는 중공중앙 당학교 고문을 맡았다. 그는 12차 당대회 대표이자 제6기 전국정협 위원이다. 1984년 11월, 병으로 입원한 송진정은 투병기간에도 자신이 책임진 《현대간부 소백과전서》 편심사업을 마무리했다. 1985년 2월 15일, 송진정은 병으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70
요흔(1912-1986)
본명은 춘방으로 흑룡강성 보청현성의 상인가정에서 태여났다.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공북방국의 교통소 소장을 지냈으며 1950년에는 연변전원공서 공안처, 변방처 처장과 변방도문84퇀당위 서기를 력임했다. 1955년 11월, 중공연변지위 부서기로 부임했다. 1956년, 중공연변주위 제2서기를 맡았다. 1976년에는 중공길림성위 정법지도소조 부조장, 길림성고급인민법원 원장을 력임하다 1986년 5월에 병으로 장춘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린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난 요흔은 1921년에 현립소학교에 입학하고 1929년에 봉천사립공익중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그는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했다. 1934년, 북평영어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했고 이 기간 중국공산당 지하당원들의 지도 아래 《레닌전》, 《로신문집》 등 혁명서적들을 읽으면서 정치의식이 빠르게 향상되였다. 1935년 1월, 그는 반동교원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얼마 후 천진으로 파견되여 팽진, 림풍의 령도 아래 당의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1937년, 그는 중공북방국의 교통소 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당조직의 파견으로 연안에서 중공 조직부 2과 간사로 남방 당조직과 련락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939년 2월, 그는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졸업 후 그는 당건설연구실 41반 연구원, 당건설 조교, 교원, 당지부 서기 등 직무를 맡았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요흔은 중앙간부대대를 따라 동북에서 근거지를 개척했다. 그는 선후로 반석현공안국 국장, 길림시공안국 부국장, 길림성공안간부학교 교장을 력임했다.
1950년 10월 이후 요흔은 연변전원공서 공안처, 변방처 처장과 변방도문84퇀당위 서기 등을 력임했다. 1952년에는 미제국주의 국민당 특무 색출작전을 진두지휘해 적의 특무들을 모두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정부로부터 표창과 장려를 받았다. 1953년 11월, 연변규률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검찰서 검찰장으로 지내다가 1955년 11월에 중공연변지위 부서기, 1956년 12월에 중공연변주위 제2서기를 맡았다. 1976년 6월, 그는 중공길림성위 정법지도소조 부조장, 길림성고급인민법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법제건설을 회복하고 건전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 4월,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성고급인민법원의 고문을 자청했다. 1986년 5월 26일, 요흔은 병으로 장춘에서 세상을 떠났다.
71
류건평(1903-1987)
본명은 수장청으로 길림성 매하구 사람이다.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3사 부사장을 맡고 1939년에 제7군 제3사 사장대리 겸 당위 위원을 맡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돈화현보안사령부 사령, 돈화현림시정부 현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에 길동군분구 부사령원, 1948년에는 연변군분구 사령원이 되였다. 1949년 1월, 길림성정부 군사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이 부부장을 맡았다. 1958년 6월,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부임했다. 1987년 12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류건평의 어린시절, 그의 가족은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8살이였던 그는 지주를 위해 말을 방목하고 잡일을 했다. 1919년 봄, 류건평은 채권자 가족을 따라 몽강현(지금의 정우현) 양수툰으로 이사했다. 1935년 8월, 류건평은 흑룡강성 요하현 소남하촌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4퇀 3련에 입대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11월 15일, 항일련군 제7군 제3사 7퇀 부퇀장으로 임명되였고 1938년 12월에는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3사 부사장을 맡아 호림흑취자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9년 3월, 제7군 제3사 사장대리 겸 당위 위원이 되였다. 1940년 11월, 그는 병으로 쏘련에서 치료를 받다가 퇴원 후에는 벨리야스크(伯力雅斯克)항일련군 북부야영에서 훈련에 참가했다.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일명 ‘국제려’)가 설립된 후에는 3영 6련의 상위련장을 맡았다.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성적이 우수한 그는 1945년 4월에 쏘련 5성 메달을 수여받았다.
1945년, 일본침략자들이 투항한 후 류건평은 6명으로 구성된 소분대를 이끌고 돈화현에 진입하여 돈화현 쏘련수비대 부사령을 맡았다. 9월 중순, 돈화현보안사령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이 사령을 맡았다. 얼마 후 돈화현림시정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이 현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 3월, 길남분구 송화강 상류의 도강사령으로 부임했고 4월에는 길동군분구 부사령을 겸임하여 송화강 상류 선박의 징집과 수리를 담당했다. 주력부대가 강을 건넌 후 그는 또 강을 따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8년 4월 8일, 그는 연변군분구 사령원을 담임했다. 1949년 1월, 길림성정부 군사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은 부부장을 맡게 되였다. 인원이 적고 임무가 막중한 상황에서 그는 지방의 청년들을 적극 참군하도록 동원하여 제때에 부대에 력량을 보충했으며 현, 구, 촌 3급 지방의 무장정돈에 힘썼다. 불완전 통계에 따르면 전 성에서 지방 무장간부 총 370여명, 기층 민병간부 총 480여명, 모범자위대원 총 11만여명을 양성하여 길림성군구 력사상 모범사례로 꼽힌다.
1956년 6월 25일, 연변군구가 설립되자 류건평은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1958년 6월에는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부임하여 주덕해 주장을 적극 도와 전 주 인민들을 이끌고 사회주의건설의 제반 사업을 완수했다. 류건평은 길림성정협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위원이며 2급 ‘8.1’훈장, 2급 독립자유훈장, 2급 해방훈장을 받았다. 1987년 12월 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2
조지강(1907-1990)
본명은 조련형이며 조암거로 불리기도 했다. 하북성 부성 사람이며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북경향산자유원에서 공부했고 1927년 3월에 향산자유원 사범반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3월, 연변 화룡현 팔도하자(지금의 룡정시 덕신향)소학교에서 교원, 교장을 담임했고 8월에 중공연변구위 선전위원 겸 팔도하자당지부 서기를 담임했다. 1929년 2월, 중공연변구위 사업을 주관했다. 1930년초, 왕경을 협조해 중공연변특별지부를 세웠다. 1930년말, 중공만주성위에서 당의 지하공작에 참가했다. 새 중국 창건 이후, 우전부 우정총국 부국장, 우전부 당조 성원, 부부장을 력임했고 제5기, 제6기 전국정협 위원을 지냈다.
조지강은 1928년에 북경향산자유원을 졸업한 뒤 당조직의 파견으로 동북지역에서 당의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그는 선후로 중공화룡현위 서기, 중공동만특위 서기, 중공안동현위 서기, 중앙교통국 만주분국 책임자, 중공할빈시 도리구위 서기와 중공만주성위 직속 길동국 위원 겸 중공목릉중심현위 서기 등 직무를 력임했다. 이 기간 조지강은 적극적으로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당의 성질과 취지를 선전하면서 혁명의 불씨를 전파하고 당조직을 공고, 확대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깊이있게 폭로하고 광범한 인민군중들의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으며 항일무장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견지했다. 조지강은 장기간 당내 교통련락사업을 맡았는데 극히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각종 신분으로 자신을 엄호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수많은 곤난을 극복하여 중공만주성위와 중앙, 중앙과 외국 형제당 사이의 원활한 련락을 유지했다. 그는 여러차례 북쪽으로 중쏘 국경선에, 남쪽으로 상해 당중앙에 이르면서 각항 중요한 임무를 원만히 수행했다. 1934년 6월, 그는 목릉현에서 일본 괴뢰경찰에 체포되였으나 3개월간 지혜롭고 견결하게 싸워 그해 9월에 공산당원 신분을 폭로하지 않고 풀려났다.
1934년말부터 1936년말까지 조지강은 당조직의 비준을 받고 하북성 경현으로 돌아가 중공경현현위 위원을 지내며 계속 당의 비밀공작에 종사했다. 1937년 1월부터 10월까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북평 동방인서관에서 사업하며 중공북평시위 시민위원회 위원으로 지내다가 다시 특과로 옮겼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조지강은 당의 파견을 받고 산동의 제성과 일조 일대에 가서 항일구국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당조직을 적극 복구, 발전시켰으며 광범한 인민군중들을 동원하여 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항일무장을 조직하여 후방의 투쟁을 견지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국민당부대 57군에서 전보통역원의 신분으로 비밀공작에 종사했다.
1941년, 조지강은 중공산동분국 당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 후 산동 전시공작위원회(산동성정부의 전신)에서 사업했다. 후에 중공산동분국의 서기 주서 동지는 그를 지명하여 산동 전시우정부문 건설을 계획하게 했다. 1942년 1월, 조지강은 산동성우정국 국장으로 임명되였고 2월 7일에 산동성 전시우정국총국이 설립되면서 총국 국장을 담임했다. 1946년 1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조지강은 선후로 산동교통총국 국장, 산동우정관리국 국장, 화동교통부 부장, 화동우전총국 국장을 력임했다.
1949년 봄, 조지강은 많은 간부를 이끌고 군대를 따라 강을 건너 남하하여 남경, 상해, 합비, 항주 등 지역에서 중화우정 인수사업을 령도했다. 그는 중공중앙에서 반포한 제반 인수정책을 견결히 집행하여 각 지역의 인수사업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도록 함으로써 새 해방구의 우정통신을 재빨리 회복하여 해방전쟁의 승리를 지원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1949년 가을부터 1982년말까지 조지강은 선후로 우전부 우정총국 부국장, 공급국의 국장, 판공청 주임, 부장조리, 부부장 등 직무를 력임했다. 공급국 부부장을 지내던 기간 그는 당사무, 간부, 교육, 출판선전 사업을 책임졌다. 그는 수십개의 신형 우전학교를 건설하고 많은 전문인재를 양성하여 우전사업의 신속한 발전에 조직적인 보장을 제공했다.
69
송진정(1921—1985)
길림성 연길시의 한 수공업자 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송사달, 송지동 등으로 불렸다. 1936년에 중화민족해방선봉대에 가입하여 선전위원, 분대장으로 활약했으며 1937년에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고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연안의 맑스-레닌학원 철학연구실 연구원, 화북련합대학 철학교연실 주임으로 지내다가 항일전쟁 승리 후 동북국 기관지인 《동북일보》의 편집, 중공연길시위 서기, 중공연길현위 서기로 지냈다. 새 중국 창건 이후 선후로 중공길림성위 선전부 부부장, 부장, 성당위 상무위원회 위원,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등을 력임했다. 1979년 3월에는 중공중앙 당학교 교육장, 고문을 맡았다. 12차 당대회 당대표이자 제6기 전국정협 위원이다. 1985년 2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6년, 송진정은 연길시북산소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에 가족과 함께 북평(지금의 북경)으로 가서 북평북방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이 기간 《공산당선언》, 《국가와 혁명》, 《철류》, 《훼멸》 등 책을 읽었다. 1936년 여름, 그는 중화민족해방선봉대에 가입했으며 선봉대의 선전위원 및 분대장으로 활약했다. 1937년 ‘7.7사변’ 후에는 전선봉사대에 참가하여 29군 부상자들을 위문했다. 1937년 8월, 중화민족해방선봉대의 통일적 배치에 따라 북평에서 남경으로 건너간 그는 전 시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모금과 《해방주간》 배포에 적극 참여했으며 청년학생들을 연안으로 가도록 동원했다. 그해 9월, 양백잠, 정일람 등 6명과 함께 연안에 갔다가 10월말에는 항일군정대학 제3기 3대대에 입학했다.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7월에는 연안의 맑스-레닌학원 철학연구실에서 학습했다. 1939년 7월, 당중앙은 화북련합항일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송진정은 이 학교의 철학교원으로 임명되였다. 이어 화북항일련합대학 교육과장, 철학교연실 주임 등 직을 지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송진정은 동북으로 건너가 동북국 기관지인 《동북일보》에서 편집으로 일했다. 1945년말, 송진정은 동북국 조직부의 파견을 받고 국가중점문화재를 구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였다. 당시 장춘시 위만황궁의 장서는 대부분 부의가 고궁에서 가져온 선본서(善本书)였다. 1946년 5월, 송진정은 병사들을 이끌고 송, 원판 등 선본서와 《청실록》, 희귀고화, 외국서적 등을 밤새도록 정리, 포장하여 5월 22일에 중앙길동근거지로 옮겼다. 5월말, 송진정은 중공연길시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이 기간 그는 공작대를 이끌고 직접 해란구에 내려가 군중들의 생활을 살피고 곤난을 료해했으며 빈고농민들의 계급의식을 각성시켰다.
1950년 가을, 송진정은 길림성인민정부 당조 성원, 문화처 처장으로 전근했다가 1952년에 중공길림성위 선전부 부장으로 임명되였다. 간부들을 대상한 정규화 교양에서 그는 철학, 정치경제학, 과학사회주의리론과 당사를 강의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길림성에서는 성문학예술계련합회, 성박물관, 성작가협회, 성가무극원, 성경극원, 성길극단 등이 륙속 설립되였다. 1958년, 그는 성당위의 통일적인 배치하에 북경으로 가서 교육부, 위생부와 협상한 후 각 대학에 사상동원을 하여 길림성에서 재빨리 길림대학, 길림공업대학, 길림의과대학(후에 베쮼의과대학으로 변경), 동북사범대학, 길림농업대학 등을 주체로 하는 로, 농, 의, 사 종합적인 고등교육 체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송진정은 ‘길극(吉剧)’ 창조의 조직자, 령도자이자 구체적인 실천자였으며 ‘길극’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1976년, 송진정은 중공길림성위 선전부 사업을 책임졌다. 1979년 3월에 중공중앙 당학교 교육장, 성당위 상무위원을 담임했고 1983년 10월에는 중공중앙 당학교 고문을 맡았다. 그는 12차 당대회 대표이자 제6기 전국정협 위원이다. 1984년 11월, 병으로 입원한 송진정은 투병기간에도 자신이 책임진 《현대간부 소백과전서》 편심사업을 마무리했다. 1985년 2월 15일, 송진정은 병으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70
요흔(1912-1986)
본명은 춘방으로 흑룡강성 보청현성의 상인가정에서 태여났다.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공북방국의 교통소 소장을 지냈으며 1950년에는 연변전원공서 공안처, 변방처 처장과 변방도문84퇀당위 서기를 력임했다. 1955년 11월, 중공연변지위 부서기로 부임했다. 1956년, 중공연변주위 제2서기를 맡았다. 1976년에는 중공길림성위 정법지도소조 부조장, 길림성고급인민법원 원장을 력임하다 1986년 5월에 병으로 장춘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린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난 요흔은 1921년에 현립소학교에 입학하고 1929년에 봉천사립공익중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그는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했다. 1934년, 북평영어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했고 이 기간 중국공산당 지하당원들의 지도 아래 《레닌전》, 《로신문집》 등 혁명서적들을 읽으면서 정치의식이 빠르게 향상되였다. 1935년 1월, 그는 반동교원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얼마 후 천진으로 파견되여 팽진, 림풍의 령도 아래 당의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1937년, 그는 중공북방국의 교통소 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당조직의 파견으로 연안에서 중공 조직부 2과 간사로 남방 당조직과 련락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939년 2월, 그는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졸업 후 그는 당건설연구실 41반 연구원, 당건설 조교, 교원, 당지부 서기 등 직무를 맡았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요흔은 중앙간부대대를 따라 동북에서 근거지를 개척했다. 그는 선후로 반석현공안국 국장, 길림시공안국 부국장, 길림성공안간부학교 교장을 력임했다.
1950년 10월 이후 요흔은 연변전원공서 공안처, 변방처 처장과 변방도문84퇀당위 서기 등을 력임했다. 1952년에는 미제국주의 국민당 특무 색출작전을 진두지휘해 적의 특무들을 모두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정부로부터 표창과 장려를 받았다. 1953년 11월, 연변규률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검찰서 검찰장으로 지내다가 1955년 11월에 중공연변지위 부서기, 1956년 12월에 중공연변주위 제2서기를 맡았다. 1976년 6월, 그는 중공길림성위 정법지도소조 부조장, 길림성고급인민법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법제건설을 회복하고 건전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 4월,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성고급인민법원의 고문을 자청했다. 1986년 5월 26일, 요흔은 병으로 장춘에서 세상을 떠났다.
71
류건평(1903-1987)
본명은 수장청으로 길림성 매하구 사람이다.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3사 부사장을 맡고 1939년에 제7군 제3사 사장대리 겸 당위 위원을 맡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돈화현보안사령부 사령, 돈화현림시정부 현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에 길동군분구 부사령원, 1948년에는 연변군분구 사령원이 되였다. 1949년 1월, 길림성정부 군사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이 부부장을 맡았다. 1958년 6월,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부임했다. 1987년 12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류건평의 어린시절, 그의 가족은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8살이였던 그는 지주를 위해 말을 방목하고 잡일을 했다. 1919년 봄, 류건평은 채권자 가족을 따라 몽강현(지금의 정우현) 양수툰으로 이사했다. 1935년 8월, 류건평은 흑룡강성 요하현 소남하촌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4퇀 3련에 입대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11월 15일, 항일련군 제7군 제3사 7퇀 부퇀장으로 임명되였고 1938년 12월에는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3사 부사장을 맡아 호림흑취자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9년 3월, 제7군 제3사 사장대리 겸 당위 위원이 되였다. 1940년 11월, 그는 병으로 쏘련에서 치료를 받다가 퇴원 후에는 벨리야스크(伯力雅斯克)항일련군 북부야영에서 훈련에 참가했다.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일명 ‘국제려’)가 설립된 후에는 3영 6련의 상위련장을 맡았다.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성적이 우수한 그는 1945년 4월에 쏘련 5성 메달을 수여받았다.
1945년, 일본침략자들이 투항한 후 류건평은 6명으로 구성된 소분대를 이끌고 돈화현에 진입하여 돈화현 쏘련수비대 부사령을 맡았다. 9월 중순, 돈화현보안사령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이 사령을 맡았다. 얼마 후 돈화현림시정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이 현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 3월, 길남분구 송화강 상류의 도강사령으로 부임했고 4월에는 길동군분구 부사령을 겸임하여 송화강 상류 선박의 징집과 수리를 담당했다. 주력부대가 강을 건넌 후 그는 또 강을 따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8년 4월 8일, 그는 연변군분구 사령원을 담임했다. 1949년 1월, 길림성정부 군사부가 설립되고 류건평은 부부장을 맡게 되였다. 인원이 적고 임무가 막중한 상황에서 그는 지방의 청년들을 적극 참군하도록 동원하여 제때에 부대에 력량을 보충했으며 현, 구, 촌 3급 지방의 무장정돈에 힘썼다. 불완전 통계에 따르면 전 성에서 지방 무장간부 총 370여명, 기층 민병간부 총 480여명, 모범자위대원 총 11만여명을 양성하여 길림성군구 력사상 모범사례로 꼽힌다.
1956년 6월 25일, 연변군구가 설립되자 류건평은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1958년 6월에는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부임하여 주덕해 주장을 적극 도와 전 주 인민들을 이끌고 사회주의건설의 제반 사업을 완수했다. 류건평은 길림성정협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위원이며 2급 ‘8.1’훈장, 2급 독립자유훈장, 2급 해방훈장을 받았다. 1987년 12월 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2
조지강(1907-1990)
본명은 조련형이며 조암거로 불리기도 했다. 하북성 부성 사람이며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북경향산자유원에서 공부했고 1927년 3월에 향산자유원 사범반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3월, 연변 화룡현 팔도하자(지금의 룡정시 덕신향)소학교에서 교원, 교장을 담임했고 8월에 중공연변구위 선전위원 겸 팔도하자당지부 서기를 담임했다. 1929년 2월, 중공연변구위 사업을 주관했다. 1930년초, 왕경을 협조해 중공연변특별지부를 세웠다. 1930년말, 중공만주성위에서 당의 지하공작에 참가했다. 새 중국 창건 이후, 우전부 우정총국 부국장, 우전부 당조 성원, 부부장을 력임했고 제5기, 제6기 전국정협 위원을 지냈다.
조지강은 1928년에 북경향산자유원을 졸업한 뒤 당조직의 파견으로 동북지역에서 당의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그는 선후로 중공화룡현위 서기, 중공동만특위 서기, 중공안동현위 서기, 중앙교통국 만주분국 책임자, 중공할빈시 도리구위 서기와 중공만주성위 직속 길동국 위원 겸 중공목릉중심현위 서기 등 직무를 력임했다. 이 기간 조지강은 적극적으로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당의 성질과 취지를 선전하면서 혁명의 불씨를 전파하고 당조직을 공고, 확대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깊이있게 폭로하고 광범한 인민군중들의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으며 항일무장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견지했다. 조지강은 장기간 당내 교통련락사업을 맡았는데 극히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각종 신분으로 자신을 엄호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수많은 곤난을 극복하여 중공만주성위와 중앙, 중앙과 외국 형제당 사이의 원활한 련락을 유지했다. 그는 여러차례 북쪽으로 중쏘 국경선에, 남쪽으로 상해 당중앙에 이르면서 각항 중요한 임무를 원만히 수행했다. 1934년 6월, 그는 목릉현에서 일본 괴뢰경찰에 체포되였으나 3개월간 지혜롭고 견결하게 싸워 그해 9월에 공산당원 신분을 폭로하지 않고 풀려났다.
1934년말부터 1936년말까지 조지강은 당조직의 비준을 받고 하북성 경현으로 돌아가 중공경현현위 위원을 지내며 계속 당의 비밀공작에 종사했다. 1937년 1월부터 10월까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북평 동방인서관에서 사업하며 중공북평시위 시민위원회 위원으로 지내다가 다시 특과로 옮겼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조지강은 당의 파견을 받고 산동의 제성과 일조 일대에 가서 항일구국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당조직을 적극 복구, 발전시켰으며 광범한 인민군중들을 동원하여 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항일무장을 조직하여 후방의 투쟁을 견지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국민당부대 57군에서 전보통역원의 신분으로 비밀공작에 종사했다.
1941년, 조지강은 중공산동분국 당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 후 산동 전시공작위원회(산동성정부의 전신)에서 사업했다. 후에 중공산동분국의 서기 주서 동지는 그를 지명하여 산동 전시우정부문 건설을 계획하게 했다. 1942년 1월, 조지강은 산동성우정국 국장으로 임명되였고 2월 7일에 산동성 전시우정국총국이 설립되면서 총국 국장을 담임했다. 1946년 1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조지강은 선후로 산동교통총국 국장, 산동우정관리국 국장, 화동교통부 부장, 화동우전총국 국장을 력임했다.
1949년 봄, 조지강은 많은 간부를 이끌고 군대를 따라 강을 건너 남하하여 남경, 상해, 합비, 항주 등 지역에서 중화우정 인수사업을 령도했다. 그는 중공중앙에서 반포한 제반 인수정책을 견결히 집행하여 각 지역의 인수사업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도록 함으로써 새 해방구의 우정통신을 재빨리 회복하여 해방전쟁의 승리를 지원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1949년 가을부터 1982년말까지 조지강은 선후로 우전부 우정총국 부국장, 공급국의 국장, 판공청 주임, 부장조리, 부부장 등 직무를 력임했다. 공급국 부부장을 지내던 기간 그는 당사무, 간부, 교육, 출판선전 사업을 책임졌다. 그는 수십개의 신형 우전학교를 건설하고 많은 전문인재를 양성하여 우전사업의 신속한 발전에 조직적인 보장을 제공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 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오수란 편역
(다음기 계속)
오수란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