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 이음)
82최채(1914—2006)
조선족으로 1914년, 조선 황해도에서 태여나 1945년 8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7년 2월에 길동군분구 독립3퇀 부정치위원 겸 정치처 주임으로 임명되였고 1948년 4월에 연변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며 12월에 중공연변지위 선전부 부장으로 부임했다. 1959년 6월, 길림성정협 제2기 위원회 부주석을 맡았고 1983년 4월에는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2006년, 최채는 병으로 장춘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0년에 최채는 할머니, 어머니, 녀동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시(지금의 단동시)에 갔다가 대련에서 배를 타고 상해에 가서 아버지와 만났다. 1923년부터 1931년 사이에 최채는 상해 인성학교, 혜중중학교에 다녔고 1932년 3월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그 후 일본침략자들의 미친 듯한 수색으로 최채는 상해, 남경, 무한 등 지역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초, 최채는 중경에서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도 아래 ‘조선의용대’에 가입했고 그해 년말과 이듬해초에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태항산근거지로 향했다. 얼마 안되여 최채는 팔로군 129사 선봉극단 예술지도원을 맡았다. 1945년 8월에 최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수분맹 주임을 맡았다. 1946년 2월에 명령을 받고 연안에 간 최채는 중공중앙의 비준으로 할빈의 중공중앙 동북국에 가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관련 절차를 밟았다. 할빈에 도착한 후, 당시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 주덕해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최채는 최종적으로 할빈에 남아 조선의용군 제3지대 교도원을 맡았다.
1947년 2월, 최채는 길동군분구 독립3퇀 부정치위원 겸 정치처 주임으로 임명되였고 그해 12월에 제대하여 길림성인민정부 민정청 편역과 과장으로 있었다. 1948년 4월 1일, 중공연변지위 기관보인 《연변일보》가 창간되고 최채가 연변일보사 사장을 겸임했다. 1948년 11월, 최채는 중공연변지위 선전부 부부장(그해 12월 부장으로 부임)을 맡았고 연변일보사 사장(1948년 4월—1949년 4월),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국장을 겸임했다. 1949년 4월 1일,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연변일보》와 할빈의 《민주일보》, 통화의 《단결일보》가 《동북조선인민보》로 합병되고 중공연변지위 기관보로 되였으며 최채가 사장(1949년 4월—9월)을 겸임했다. 1952년 2월, 최채는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7월, 중공중앙은 연변에서 조선민족자치구를 세울 데 관한 건의를 비준했다.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길림성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제1기 여러 민족, 각계 인민 대표회의가 연길시인민극장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되였음을 정식 선포하고 최채가 부주석으로 당선되여 정법, 민정, 문화교육 등 사업을 주관하기로 했다. 1956년 8월, 최채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주최, 설립하고 주석을 담임했다.
1958년초, 최채는 장춘으로 전근하여 길림성당위 통전부 부부장 겸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임직기간, 그는 장백조선족자치현의 설립과 민족지역의 경제 특히는 문화사업의 발전을 위해 많은 성과적인 사업을 했다. 1959년 6월, 길림성정협 제2기 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가 장춘에서 소집되고 최채가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78년 4월, 길림성혁명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가 정식 회복되고 얼마 후 최채는 다시 성당위 통전부 부부장,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83년 4월, 최채는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겸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위원을 담임했으며 1985년에 리직휴양했다. 2006년 8월 5일, 최채는 장춘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3류창은(1937—2010)
조선족으로 길림성 연길현 의란향 춘흥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6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82년에 연변주농업과학연구소 부소장을 맡았다. 류창은은 전국의 저명한 농민육종학자로서 ‘만보 6호’, ‘만보 11호’, ‘만보 17호’, ‘만보 21호’, ‘만보 22호’, ‘사 29호’ 등 우량벼 품종을 재배하고 광범위하게 보급하여 벼 산량을 3배 늘임으로써 연변주의 벼 증산, 농민수입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그중 ‘만보 21호’는 안도현에서 23년간 집중 판매된 바 있다. 그의 과학연구성과는 길림성과학기술진보 3등상 1개와 길림성중대과학기술성과상 3개, 1964년에 ‘길림성농업전선 10대 기발’의 하나로 선정되였다. 1965년 전국농촌과학실험 선진사업일군, 1978년 전국과학기술전선 선진사업일군, 길림성과학기술전선 선진사업자, 1986년 길림성 특등 로력모범, 연변주 특등 로력모범과 연변주 모범당원으로 선정되였다. 1987년, 1988년에는 전국 우수과학기술사업일군으로 선정되고 전국 ‘5.1’로동메달을 수여받았으며 1989년에는 전국로력모범으로 선정되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류창은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도왔던 터라 농작물에 관심이 많았다. 1954년 9월의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류창은은 며칠 전만 해도 묵직하게 처져있던 황금색 벼이삭들이 일찍 내린 가을서리에 바짝 말라 재빛으로 죽어버린 정경을 목격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길가에서 마을사람들이 탄식하는 소리는 그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요절해버린 ‘원자 2호’ 품종의 논밭에 드문드문 잘 익은 벼가 있는 것이였다. 이 벼들은 우연히 밭에 끼워 심은 ‘북해도개량’ 품종이였다. 이 품종은 ‘원자 2호’에 비해 빨리 여물지만 산량이 낮아 농민들이 심기를 원하지 않았다. 류창은은 빨리 여물고 소출이 높은 벼품종을 배육해낸다면 무상기(无霜期)가 짧은 연변지역에서 얼마나 큰 수확을 거두게 될가 하는 대담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꼭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 벼품종을 개량할 것을 묵묵히 맹세했다.
1956년, 류창은은 고중에 입학했지만 하루빨리 벼품종을 개량해내겠다는 생각에 퇴학하고 고향인 안도현 신흥대대에 돌아가 농업생산에 참가했다. 중학시절에 그는 연길시도서관의 조선말로 된 농업과학기술 서적을 모두 섭렵했고 《유전학》, 《벼재배학》 등 대학교 교과서도 독학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농민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들의 생산경험을 참답게 총화하는 한편 전문서적을 펼쳐보고 리론과 실제를 결부하여 자체의 실험계획을 세우고 밤낮이 따로 없이 부지런히 실험했다. 류창은은 ‘장최아(长催芽)’라는 새로운 육모방법을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이런 육모방법은 모가 빨리 잘 자라게 하여 모내기를 10일 앞당길 수 있었고 헥타르당 벼생산량은 전보다 2배 증가하여 6000킬로그람가량 되였다. 1960년에 이 방법은 현지에서 대면적으로 보급되였다.
1976년, 류창은은 연변주농업과학연구소에 전근하여 근무했으며 1982년에 부소장으로 임명되였다. 임직기간에 그는 여전히 안도, 돈화, 훈춘 등 외진 고한산간지역을 다니며 현지 기후에 맞는 새로운 벼품종과 그에 따른 재배기술을 꾸준히 탐구했다. 류창은과 동료들은 ‘고한산간지역 튼튼 벼모 직파재배기술’을 연구, 보급했는데 54%의 로력을 절약하고 로동원가를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제때에 풍작을 거두어 경제효익이 배로 증가되였다. 또한 현지 군중의 벼농사 적극성을 높이고 돈화 저지대에서 연변지역 최대 면적의 벼구역을 개발함으로써 돈화의 수전면적을 원래의 4000헥타르에서 1만 6000헥타르로 늘였고 년 총수확고는 평균 1만톤에서 6만여톤으로 제고되였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현지 농민들은 새로운 벼구역을 개발하여 4600만원의 수입을 증가했다.
1991년에 퇴직한 후에도 류창은은 그가 열렬히 사랑하는 사업을 떠나지 않고 계속 ‘3농’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며 농촌에서 기술 강습과 지도 사업을 전개하며 연변주 농업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2010년 2월 27일, 류창은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4리옥금(1922—2011)
녀, 조선족, 길림성 연길현 사람이다. 1946년, 리옥금은 연길시 의란진 흥안촌 농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였다. 그녀의 지지와 동원하에 그녀의 남편과 두 시동생이 련이어 참군했다. 1947년, 남편은 불행히 소과툰 마안산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녀는 비통을 참으며 낮에는 녀성들을 인솔해 밭을 갈고 밤에는 시부모에게 사상공작을 하면서 막내시동생까지 전선으로 보냈다. 그녀의 인솔하에 많은 청년들이 참군하여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지주, 반역자를 청산하는 투쟁과 토지개혁에 적극 참가했으며 호조조를 조직하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전선을 지원했다. 1947년 12월 11일, 리옥금은 연길시 제1차 로력모범대회에서 1등 농업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다. 1948년 2월, 리옥금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후 현과 성의 로력모범과 렬사군인가족모범으로 선정되였다. 1949년 3월에 동북의 부녀대표로 제1차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석했으며 전국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다. 1950년에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했고 1961년에 전국소수민족참관단의 성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참관, 학습했다. 그녀는 선후로 모주석과 기타 중앙 지도자동지의 접견을 7차례 받았다.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여난 리옥금은 여덟살 적부터 지주 집에서 일을 하며 온갖 고생을 치렀다. 15세 되던 해에 지주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사의 큰오빠 집에 찾아갔다가 조양천 태동촌의 림지룡과 결혼했다.
새 생활을 얻은 리옥금은 남편을 따라 지금의 연길시 의란진 흥안촌으로 이주했으며 해방 후 정치투쟁과 군중운동 속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인민정부를 뒤엎으려 망상한 토비와 국민당반동파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소멸하기 위하여 남편 림지룡은 선뜻 참군하여 연변경비 1퇀에 가입했다. 림지룡을 배웅할 때 리옥금은 남편에게 집걱정은 말고 오로지 적을 무찔러 나라에 보답할 생각만 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남편이 참군하자 아홉 식솔의 생활은 리옥금 한 사람의 어깨에 떨어졌다. 살림을 거들어주는 둘째시동생도 군대에 가고 싶었지만 년로한 부모와 형수의 살림살이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리옥금은 “자기 집만 바라보면 혁명을 할 수 없습니다.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고 얼른 부대로 가서 총칼을 들고 반동파를 무찌르세요.”라고 했다.
1946년 봄, 경작과 파종기가 다가왔지만 마을 청년들이 모두 참군하여 전체 마을에 밭을 갈 만한 건장한 로력이 하나도 없었다. 리옥금은 10여가구의 렬사군인가족을 도와 호조조를 구성했다.
리옥금은 밭갈기, 모내기 뿐만 아니라 과거 남자들만 할 수 있었던 수레 끌기, 수레 싣기 등 로동을 했는데 그녀의 영향과 선도하에 많은 녀성들도 농사일을 배웠다. 1947년 7월 16일, 그녀의 남편 림지룡은 마안산 추격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녀는 비통과 분노를 참으며 시부모를 설득하여 막내시동생도 군대에 입대하도록 했다. 리옥금은 비통을 힘으로 전환하여 호조조 녀성들을 이끌고 정부가 호소한 전선지원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량식 대풍작을 거두어 연길현에서 가장 먼저 공량상납 임무를 완수했다. 그해 11월, 리옥금은 생산모범, 전선지원모범, 렬군속모범, 현, 주, 성급 특등 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다. 1948년, 리옥금의 호조조는 연변지역의 모범호조조로 되였고 그녀는 연변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 전국렬군속모범으로 되였다.
1949년 3월, 리옥금은 북경에 가서 제1차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부녀대표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모택동 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리옥금의 남편과 세명의 시동생이 모두 전선으로 나갔고 남편이 전선에서 희생되였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모택동 주석은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여야 합니다.”면서 리옥금의 갈라터진 두 손을 잡고 “당신은 조선족의 영웅입니다.”고 말했다.
조선전쟁이 폭발한 후 리옥금은 당중앙의 호소에 부응하여 전선지원 활동에 적극 참가했고 오빠들이 항미원조에 참가하는 것을 지지했다. 세 시동생중 두명이 조선전장에서 전사했다. 1978년 봄, 리옥금은 길림성부녀사회주의건설열성자로 선정되였고 9월, 제4차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전국 3.8붉은기수 칭호를 수여받았다.
82최채(1914—2006)
조선족으로 1914년, 조선 황해도에서 태여나 1945년 8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7년 2월에 길동군분구 독립3퇀 부정치위원 겸 정치처 주임으로 임명되였고 1948년 4월에 연변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며 12월에 중공연변지위 선전부 부장으로 부임했다. 1959년 6월, 길림성정협 제2기 위원회 부주석을 맡았고 1983년 4월에는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2006년, 최채는 병으로 장춘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0년에 최채는 할머니, 어머니, 녀동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시(지금의 단동시)에 갔다가 대련에서 배를 타고 상해에 가서 아버지와 만났다. 1923년부터 1931년 사이에 최채는 상해 인성학교, 혜중중학교에 다녔고 1932년 3월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그 후 일본침략자들의 미친 듯한 수색으로 최채는 상해, 남경, 무한 등 지역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초, 최채는 중경에서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도 아래 ‘조선의용대’에 가입했고 그해 년말과 이듬해초에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태항산근거지로 향했다. 얼마 안되여 최채는 팔로군 129사 선봉극단 예술지도원을 맡았다. 1945년 8월에 최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수분맹 주임을 맡았다. 1946년 2월에 명령을 받고 연안에 간 최채는 중공중앙의 비준으로 할빈의 중공중앙 동북국에 가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관련 절차를 밟았다. 할빈에 도착한 후, 당시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 주덕해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최채는 최종적으로 할빈에 남아 조선의용군 제3지대 교도원을 맡았다.
1947년 2월, 최채는 길동군분구 독립3퇀 부정치위원 겸 정치처 주임으로 임명되였고 그해 12월에 제대하여 길림성인민정부 민정청 편역과 과장으로 있었다. 1948년 4월 1일, 중공연변지위 기관보인 《연변일보》가 창간되고 최채가 연변일보사 사장을 겸임했다. 1948년 11월, 최채는 중공연변지위 선전부 부부장(그해 12월 부장으로 부임)을 맡았고 연변일보사 사장(1948년 4월—1949년 4월),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국장을 겸임했다. 1949년 4월 1일,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연변일보》와 할빈의 《민주일보》, 통화의 《단결일보》가 《동북조선인민보》로 합병되고 중공연변지위 기관보로 되였으며 최채가 사장(1949년 4월—9월)을 겸임했다. 1952년 2월, 최채는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7월, 중공중앙은 연변에서 조선민족자치구를 세울 데 관한 건의를 비준했다.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길림성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제1기 여러 민족, 각계 인민 대표회의가 연길시인민극장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되였음을 정식 선포하고 최채가 부주석으로 당선되여 정법, 민정, 문화교육 등 사업을 주관하기로 했다. 1956년 8월, 최채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주최, 설립하고 주석을 담임했다.
1958년초, 최채는 장춘으로 전근하여 길림성당위 통전부 부부장 겸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임직기간, 그는 장백조선족자치현의 설립과 민족지역의 경제 특히는 문화사업의 발전을 위해 많은 성과적인 사업을 했다. 1959년 6월, 길림성정협 제2기 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가 장춘에서 소집되고 최채가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78년 4월, 길림성혁명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가 정식 회복되고 얼마 후 최채는 다시 성당위 통전부 부부장,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83년 4월, 최채는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겸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위원을 담임했으며 1985년에 리직휴양했다. 2006년 8월 5일, 최채는 장춘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3류창은(1937—2010)
조선족으로 길림성 연길현 의란향 춘흥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6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82년에 연변주농업과학연구소 부소장을 맡았다. 류창은은 전국의 저명한 농민육종학자로서 ‘만보 6호’, ‘만보 11호’, ‘만보 17호’, ‘만보 21호’, ‘만보 22호’, ‘사 29호’ 등 우량벼 품종을 재배하고 광범위하게 보급하여 벼 산량을 3배 늘임으로써 연변주의 벼 증산, 농민수입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그중 ‘만보 21호’는 안도현에서 23년간 집중 판매된 바 있다. 그의 과학연구성과는 길림성과학기술진보 3등상 1개와 길림성중대과학기술성과상 3개, 1964년에 ‘길림성농업전선 10대 기발’의 하나로 선정되였다. 1965년 전국농촌과학실험 선진사업일군, 1978년 전국과학기술전선 선진사업일군, 길림성과학기술전선 선진사업자, 1986년 길림성 특등 로력모범, 연변주 특등 로력모범과 연변주 모범당원으로 선정되였다. 1987년, 1988년에는 전국 우수과학기술사업일군으로 선정되고 전국 ‘5.1’로동메달을 수여받았으며 1989년에는 전국로력모범으로 선정되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류창은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도왔던 터라 농작물에 관심이 많았다. 1954년 9월의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류창은은 며칠 전만 해도 묵직하게 처져있던 황금색 벼이삭들이 일찍 내린 가을서리에 바짝 말라 재빛으로 죽어버린 정경을 목격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길가에서 마을사람들이 탄식하는 소리는 그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요절해버린 ‘원자 2호’ 품종의 논밭에 드문드문 잘 익은 벼가 있는 것이였다. 이 벼들은 우연히 밭에 끼워 심은 ‘북해도개량’ 품종이였다. 이 품종은 ‘원자 2호’에 비해 빨리 여물지만 산량이 낮아 농민들이 심기를 원하지 않았다. 류창은은 빨리 여물고 소출이 높은 벼품종을 배육해낸다면 무상기(无霜期)가 짧은 연변지역에서 얼마나 큰 수확을 거두게 될가 하는 대담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꼭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 벼품종을 개량할 것을 묵묵히 맹세했다.
1956년, 류창은은 고중에 입학했지만 하루빨리 벼품종을 개량해내겠다는 생각에 퇴학하고 고향인 안도현 신흥대대에 돌아가 농업생산에 참가했다. 중학시절에 그는 연길시도서관의 조선말로 된 농업과학기술 서적을 모두 섭렵했고 《유전학》, 《벼재배학》 등 대학교 교과서도 독학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농민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그들의 생산경험을 참답게 총화하는 한편 전문서적을 펼쳐보고 리론과 실제를 결부하여 자체의 실험계획을 세우고 밤낮이 따로 없이 부지런히 실험했다. 류창은은 ‘장최아(长催芽)’라는 새로운 육모방법을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이런 육모방법은 모가 빨리 잘 자라게 하여 모내기를 10일 앞당길 수 있었고 헥타르당 벼생산량은 전보다 2배 증가하여 6000킬로그람가량 되였다. 1960년에 이 방법은 현지에서 대면적으로 보급되였다.
1976년, 류창은은 연변주농업과학연구소에 전근하여 근무했으며 1982년에 부소장으로 임명되였다. 임직기간에 그는 여전히 안도, 돈화, 훈춘 등 외진 고한산간지역을 다니며 현지 기후에 맞는 새로운 벼품종과 그에 따른 재배기술을 꾸준히 탐구했다. 류창은과 동료들은 ‘고한산간지역 튼튼 벼모 직파재배기술’을 연구, 보급했는데 54%의 로력을 절약하고 로동원가를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제때에 풍작을 거두어 경제효익이 배로 증가되였다. 또한 현지 군중의 벼농사 적극성을 높이고 돈화 저지대에서 연변지역 최대 면적의 벼구역을 개발함으로써 돈화의 수전면적을 원래의 4000헥타르에서 1만 6000헥타르로 늘였고 년 총수확고는 평균 1만톤에서 6만여톤으로 제고되였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현지 농민들은 새로운 벼구역을 개발하여 4600만원의 수입을 증가했다.
1991년에 퇴직한 후에도 류창은은 그가 열렬히 사랑하는 사업을 떠나지 않고 계속 ‘3농’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며 농촌에서 기술 강습과 지도 사업을 전개하며 연변주 농업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2010년 2월 27일, 류창은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4리옥금(1922—2011)
녀, 조선족, 길림성 연길현 사람이다. 1946년, 리옥금은 연길시 의란진 흥안촌 농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였다. 그녀의 지지와 동원하에 그녀의 남편과 두 시동생이 련이어 참군했다. 1947년, 남편은 불행히 소과툰 마안산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녀는 비통을 참으며 낮에는 녀성들을 인솔해 밭을 갈고 밤에는 시부모에게 사상공작을 하면서 막내시동생까지 전선으로 보냈다. 그녀의 인솔하에 많은 청년들이 참군하여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지주, 반역자를 청산하는 투쟁과 토지개혁에 적극 참가했으며 호조조를 조직하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전선을 지원했다. 1947년 12월 11일, 리옥금은 연길시 제1차 로력모범대회에서 1등 농업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다. 1948년 2월, 리옥금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후 현과 성의 로력모범과 렬사군인가족모범으로 선정되였다. 1949년 3월에 동북의 부녀대표로 제1차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석했으며 전국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다. 1950년에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했고 1961년에 전국소수민족참관단의 성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참관, 학습했다. 그녀는 선후로 모주석과 기타 중앙 지도자동지의 접견을 7차례 받았다.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여난 리옥금은 여덟살 적부터 지주 집에서 일을 하며 온갖 고생을 치렀다. 15세 되던 해에 지주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사의 큰오빠 집에 찾아갔다가 조양천 태동촌의 림지룡과 결혼했다.
새 생활을 얻은 리옥금은 남편을 따라 지금의 연길시 의란진 흥안촌으로 이주했으며 해방 후 정치투쟁과 군중운동 속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인민정부를 뒤엎으려 망상한 토비와 국민당반동파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소멸하기 위하여 남편 림지룡은 선뜻 참군하여 연변경비 1퇀에 가입했다. 림지룡을 배웅할 때 리옥금은 남편에게 집걱정은 말고 오로지 적을 무찔러 나라에 보답할 생각만 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남편이 참군하자 아홉 식솔의 생활은 리옥금 한 사람의 어깨에 떨어졌다. 살림을 거들어주는 둘째시동생도 군대에 가고 싶었지만 년로한 부모와 형수의 살림살이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리옥금은 “자기 집만 바라보면 혁명을 할 수 없습니다.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고 얼른 부대로 가서 총칼을 들고 반동파를 무찌르세요.”라고 했다.
1946년 봄, 경작과 파종기가 다가왔지만 마을 청년들이 모두 참군하여 전체 마을에 밭을 갈 만한 건장한 로력이 하나도 없었다. 리옥금은 10여가구의 렬사군인가족을 도와 호조조를 구성했다.
리옥금은 밭갈기, 모내기 뿐만 아니라 과거 남자들만 할 수 있었던 수레 끌기, 수레 싣기 등 로동을 했는데 그녀의 영향과 선도하에 많은 녀성들도 농사일을 배웠다. 1947년 7월 16일, 그녀의 남편 림지룡은 마안산 추격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녀는 비통과 분노를 참으며 시부모를 설득하여 막내시동생도 군대에 입대하도록 했다. 리옥금은 비통을 힘으로 전환하여 호조조 녀성들을 이끌고 정부가 호소한 전선지원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량식 대풍작을 거두어 연길현에서 가장 먼저 공량상납 임무를 완수했다. 그해 11월, 리옥금은 생산모범, 전선지원모범, 렬군속모범, 현, 주, 성급 특등 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다. 1948년, 리옥금의 호조조는 연변지역의 모범호조조로 되였고 그녀는 연변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 전국렬군속모범으로 되였다.
1949년 3월, 리옥금은 북경에 가서 제1차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부녀대표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모택동 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리옥금의 남편과 세명의 시동생이 모두 전선으로 나갔고 남편이 전선에서 희생되였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모택동 주석은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여야 합니다.”면서 리옥금의 갈라터진 두 손을 잡고 “당신은 조선족의 영웅입니다.”고 말했다.
조선전쟁이 폭발한 후 리옥금은 당중앙의 호소에 부응하여 전선지원 활동에 적극 참가했고 오빠들이 항미원조에 참가하는 것을 지지했다. 세 시동생중 두명이 조선전장에서 전사했다. 1978년 봄, 리옥금은 길림성부녀사회주의건설열성자로 선정되였고 9월, 제4차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전국 3.8붉은기수 칭호를 수여받았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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