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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3-12-14 10:48:16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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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민(1913—2012)
료녕성 흑산현 대호산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5년, 장택민은 훈춘 대황구 괴뢰군을 따라 봉기를 일으키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에 가입했다. 1936년 봄, 장택민은 쏘련에 파견되여 학습하다가 1937년에 귀국하여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 4대대 제1대 1구대 대장을 맡았다. 1938년 2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무한주재 팔로군판사처 교통반 반장으로 있다가 1939년 2월, 모택동 보위 참모로 근무했다. 1942년 1월, 중경판사처에 전근되여 주은래의 부관으로 있었으며 중경담판 당시 모택동의 부관을 맡았다. 항일전쟁 승리 후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동북으로 돌아가 장춘해방전투, 료심전역, 평진전역에 참가했고 중국인민해방군 첫 땅크부대 건설에 참여했다. 항미원조 시기에는 지원군 운수부 부부장을 맡았고 후에는 심양군구 후근운수부 부장, 생산부 부장으로 있었다. 1978년 11월에 총후근부 차량선박부 부부장을 맡았고 1988년 1월에 리직휴양했다.
 
훈춘 대황구당사교양기지에는 한 괴뢰군봉기유적지가 있다. 1935년 3월 21일, 괴뢰군 제26려 35퇀 1영 1련의 장병들이 이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항일대오에 가입했다. 이 봉기대오에서 우리 군의 전설적인 고급장령이 나왔는데 그가 바로 모택동 주석의 보위 참모이자 주은래 총리의 수행부관이였던 장택민이다.
장택민은 1913년 2월 27일, 료녕성 흑산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18세에 자기 집의 말을 타고 항일의 길에 나섰고 1931년 9월, 항일의용군에 참가했다. 1935년, 장태민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의 길을 정확히 걷게 되였다.
장택민은 용감무쌍하게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포화가 하늘을 찌를 듯한 간고한 투쟁 속에서도 추위와 굶주림, 죽음의 시련 속에서도 혁명을 끝까지 견지하려는 의지가 동요되지 않았다. 한번은 장택민 소속 부대가 심산 속에서 적들의 ‘포위토벌’을 당했다. 전사들은 3개월 남짓이 솜옷도 없고 식량, 소금도 없이 깊은 밀림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눈으로 허기를 달래며 갖은 방법으로 투쟁을 견지했다.
1935년 5월, 장택민이 소속된 제4퇀은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으로 가던 도중 훈춘 륙도구 부근의 도금장을 지나고 있었다. 도금장은 일본상인이 1934년에 개설한 것으로 수천명의 중국로동자들을 고용하여 대량의 황금을 략탈했다. 4퇀은 식량을 가득 실은 양행트럭 13대가 이튿날 새벽에 오도구로부터 동녕으로 가며 륙도구는 반드시 거쳐가는 길목이라는 정보를 얻고 이곳에서 트럭을 랍치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새벽 6시경, 적들이 매복권 안에 들어오자 전사들이 맹호처럼 산에서 내려와 공격했다. 놀란 적들이 차를 버리고 도망가자 전사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트럭을 몰고 도금장에 가서 로획한 물품들을 땅에 매장했다. 장택민은 명령을 받고 두 조선족전사를 이끌고 륙도구 어구 산꼭대기로 달려가 적들을 감시, 저지하여 로획물자를 매장하는 데 시간을 벌었다.
이튿날 새벽, 장택민은 강가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모제르총을 들고 사방을 뒤지는 사람을 보았다. 장택민은 뒤를 바싹 쫓다가 결국 적의 주둔지까지 따라갔다. 삽시에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났고 밀집된 총알이 그의 귀 옆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스쳐갔다. 장택민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뛰면서 한쪽으로 반격했다. 점심무렵이 되여서야 그를 찾아나선 왕윤성 정치위원을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왕윤성은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택민이, 정말 훌륭한 일을 해냈소. 도금장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소. 로획물자도 잘 감추었고 또 많은 적을 섬멸하였소.”
1935년 12월 중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은 대황구 고개 이남의 밀림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장택민을 쏘련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파견하여 기계와 군사를 학습시키기로 결정했다. 장택민은 졸업하여 연안으로 돌아온 후 1939년 2월부터 모택동 주석의 보위 참모로 있었다. 1942년 1월에는 중경판사처로 전근되여 주은래 부관으로 일했다. 해방전쟁 기간에 해방군 첫 땅크부대 건설에 참여하고 1948년 4월에 동북민주련군 후근부 자동차3퇀에서 퇀장을 맡고 료심전역, 평진전역에 참가했다. 1949년 3월, 그는 명령에 따라 자동차 100대를 이끌고 모택동과 중앙 책임자들을 북경으로 모시러 서백파에 갔다. 새 중국 창건 이후 자동차퇀을 이끌고 항미원조에 참가했고 선후하여 심양군구 후근부 차량선박부 부부장, 생산부 부장으로 있었다. 1978년 11월, 장택민은 총후근부에 전근되여 차량선박부 부부장을 맡았다. 1988년, 장택민은 리직휴양했고 2012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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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량(1919—2013)
산서성 순화현 사람이다. 1936년 10월, 하룡이 이끄는 홍2방면군에 참가했으며 장정 도중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팔로군 120사 359려 기관총련 련장으로 부임했고 1941년, 연안을 보위하는 과정에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1945년 항일전쟁 승리 후 359려를 따라 동북에 진입, 해방전쟁에서 사평보위전과 할빈해방전투에 참가했다. 1955년, 전술량은 길림시에서 훈춘현으로 전근하여 훈춘현 첫 삼림경찰대를 세웠고 후에 훈춘현림업국 국장을 력임했다. 그는 군중들을 동원하여 식수조림을 하면서 훈춘의 모래바람 기후를 바꾸었고 중쏘변경지대의 림구 통제를 강화하여 국경간 화재의 범람을 막았다. 1973년 퇴직 후에도 기관, 학교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진행했다.
 
1936년 10월 7일, 전술량은 장정 도중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에는 하룡, 왕진이 이끄는 팔로군 120사 359려 기관총련 련장을 담당하여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진서북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데 참가했고 오대산에서 팔로군총부를 보위하기 위하여 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1941년, 모주석은 359려의 용감하고 완강한 작전정신에 매우 흡족해하며 전술량이 소속된 359려 717퇀 전체 장병들을 친절하게 접견했다. 1942년, 359려는 ‘변구 대생산의 기치’로 불리웠다. 모주석은 친히 제사를 써서 359려는 ‘경제발전의 선봉’이라고 칭찬했다. 전술량은 대생산운동에서 간난신고를 이겨내고 여러 면에서 솔선역할을 보여 359려 ‘로력모범’으로 선정되였다.
1945년 항일전쟁 승리 후, 전술량은 359려를 따라 동북으로 진입했으며 해방전쟁에서 사평보위전과 할빈해방전투에 참가했다. 1947년 1월, 그는 동북민주련군 독립1사 기관총련 련장을 담당하고 삼하강남 사보림강 작전에 참가했다. 1947년 5월부터 11월까지 전술량 소속부대는 여름공세와 가을공세를 개시했는데 길림 이동의 천강, 강밀봉, 해룡 등 지역을 점령하고 회덕, 동풍, 매하구 등 지역을 점령하여 남북만 해방구에 대한 국민당의 분할봉쇄를 파괴했다. 1948년, 전술량은 료심전역중 유명한 흑산저격전에 참가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차례의 전투를 이겨냈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전술량은 영광스럽게 전역하여 길림성삼림경찰대대 지도원 겸 공회 주석으로 배치되여 다년간 장백산 험산준령을 순시했다. 1953년, 길림성정부는 동부의 중쏘변경지대의 림구 통제를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전술량을 훈춘으로 보내 삼림경찰대를 세우도록 했다.
1955년 10월, 전술량은 안해와 갓 태여난 아들을 데리고 길림시에서 훈춘현으로 전근했다. 그는 자리를 잡은 후 길림성과 흑룡강성, 쏘련의 경계에 있는 훈춘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춘화삼림경찰대로 가서 곧바로 취임했다. 그는 훈춘 동부의 원시림과 중쏘변경지대의 호림방화 임무를 맡았다. 1958년, 전술량은 훈춘현 림업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5년 후, 훈춘현림업국이 설립되고 전술량이 초대 국장으로 임명됐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그가 국장으로 재임해있는 동안, 전 현의 국영림지조림 면적은 3691헥타르로 이전 5년 합계의 2.13배에 달했고 사방에 심은 나무는 174만그루로 이전 5년 합계의 2.3배에 달했다.
1973년, 리직휴양 이후에도 전술량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투신하여 각 학교, 기관사업단위와 당정기관, 련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펼쳤다. 2011년, 리직휴양 38년이 되던 해에 그는 연변주림업관리국당위로부터 우수공산당원 칭호를 수여받았다. 2013년 8월 3일, 로홍군 전술량은 100세를 일기로 자신의 휘황하고 평범치 않은 삶을 마쳤다. 조직에 페를 끼치지 말고 조직에 요구를 제기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전술량의 골회는 장백산맥 훈춘 대룡령 경산릉원에 안장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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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천(1939—2016)
흑룡강성 연수현 사람이다. 저명한 작가, 영화문학가이며 필명으로는 기연화, 기화, 엄동화 등이 있으며 새시기 길림성 문예계의 선두자이다. 일찍 장춘영화제작소 당위 상무위원, 부소장, 길림성작가협회 전문작가, 주석, 길림성문학예술계련합회 주석, 당조 성원 등 직무를 력임했다.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 전체위원회 위원, 중국작가협회 주석단 위원, 명예위원, 길림성 제8기 정협위원, 길림성 제7기, 제8기, 제9기 당대표, 중국공산당 16차, 17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성당위 결책자문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길림성로력모범, 성우수관리전문가, 성고급전문가, 성영재메달을 수여받았다. 국무원 특별보조 대우를 받으며 중국영화 100년 경축활동에서 국가인사부로부터 ‘우수한 영화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중공중앙 조직부에서 직접 련계하여 관리하는 전문가로 선정되였다.
 
1939년 11월 13일, 장소천은 흑룡강성 연수현에서 태여났다. 장소천은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했으며 1957년, 동북사범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했다.
1961년 8월, 장소천은 돈화현제1중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고 력사과목을 가르쳤다. 수업외의 짬짬이 시간에도 그는 창작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문교원 리수전과 함께 문학예술을 연구하고 글을 토론했다.
소산취촌을 소재로 한 장소천의 첫 장편소설 《안명호반》이 창작되고 일대 전설이 시작되였다. 소설 《안명호반》에서 장소천은 포만된 필치로 열정적인 지식청년들의 생활을 보여주었고 소박한 언어로 수려한 산천과 순박한 풍토인정을 묘사했다. 이 책은 1973년 5월에 출판, 발행된 후 독자들 속에서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여러번 재판하여 도합 200여만부를 인쇄했다. 또한 소설을 각색한 가극, 연극, 평극, 방송소설도 륙속 발표되면서 그해의 문예무대에서 특별한 풍경선을 이루었다. 2004년, 소산취촌이 속해있는 향은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안명호진으로 개명되였고 여기에는 국가급 자연보호구 안명호습지가 세워졌으며 장백산—경박호 관광로선의 가장 좋은 환승지로 되였다. 이는 장소천이 현지에 남겨준 가장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1974년, 장춘영화제작소가 《안명호반》을 영화로 제작하기로 했다. 소설의 작가인 장소천은 장춘영화제작소에 초청되여 극본개편 작업을 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길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1975년 11월, 그는 정식으로 장춘영화제작소에 전근되여 총편집실 편집, 극작가가 되였고 같은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영화제작소에 들어간 후 장소천은 영화극본 창작에 몰두했다. 그는 선후로 《준엄한 려정》, 《황하 강변》, 《춘면불각효》, 《나무집》, 《사람들과 떨어진 곳》, 《제13호 지구》 등 영화극본을 창작했다.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장편소설 6편, 중편소설 33편, 단편소설 32편을 발표했다. 1985년 5월에는 장춘영화제작소 당위 상무위원, 부소장으로 임명되여 극본창작을 주관하였고 작가협회 길림분회 부주석을 겸임했다.
1989년, 장소천 등 몇몇 작가들이 창작한 새 중국 창건 40돐 헌례영화 《개국대전》은 제10회 중국영화 금계상 최우수예술영화상, 제13회 대중영화 백화상 최우수예술영화상 등을 수상했고 1989년―1990년 중국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부 우수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장소천 등도 이 극본으로 금계상 최우수 극본, 영화소백화상 우수극본상 등 수상영예를 안았다.
1990년 2월, 장소천은 길림성작가협회 전문작가, 부주석을 맡았다. 1992년, 혁명령수인물에 초점을 맞춘 장소천의 또 다른 영화 《중경담판》이 상영되였다. 이 영화는 제17회 대중영화 백화상 최우수영화, 1993년 ‘당대 영화’ 국산 10대 우수영화 1등상 등을 수상했다.
1997년 11월에 그는 길림성작가협회 주석으로 추대되였고 2001년에는 길림성문학예술계련합회 주석으로 되였다. 이 기간 그는 《대만 첫 순무 류명전》, 《척계광》, 《영락대제》 등 많은 력사소재의 작품을 창작했다. 《태평천국》은 새 중국 창건 50돐을 맞으며 중국작가협회로부터 국내외에 추천한 100개 문학가작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2010년 9월, 퇴직한 장소천은 여전히 창작에 몰두하여 장편소설 《항미원조》 등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로예술가의 창작활력을 보여주었다.
2016년 2월 23일, 장소천은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오수란 편역
작가:장홍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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