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자는 연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어머니’들은 사심없는 참사랑으로 이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가고 있다.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저였기에 역지사지의 감수를 누구보다 더 잘 리해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회장 김화(76세)의 페부지언이다.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바랄 만도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선행사업의 선두에 나섰다. 김화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주변 친구 그리고 가까운 지인 30명과 서로 손잡고 2002년, 사단법인 연변애심어머니협회를 설립하고 베풂과 나눔을 실천해나갔다.
“1%의 사랑이 100%의 희망을 안아온다”는 김화 회장의 믿음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였다. 30여명 회원들의 주머니돈으로 차곡차곡 모아진 기금은 한명 또 한명의 아이들과 빈곤가정에 사랑의 단비가 되여주었고 그동안 협회는 30명의 회원으로부터 1000여명의 회원과 8개 지회를 둔 방대한 대오로, 사회의 긍정을 받는 협회로 성장했다.
지난 2월 20일, 최순희(62세) 회장과 협회의 부회장, ‘꿈터’ 원장을 겸했던 한수영(61세)을 만나 공익단체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힘차게 달려온 연변애심어머니협회의 따뜻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20여년 동안 초대회장 김화, 제2대 회장 방선화(68세)와 제3대 회장 최순희가 애심 계주를 이어가면서 연변애심어머니협회를 이끌고 ‘위대한 어머니 사랑으로 세상을 밝혀가는 등불이 되여 사회복지와 문화진흥에 기여한다’는 취지하에 실제행동으로 주변을 감동시켰다. 조학사업, 빈곤장애인부축 사업, 꿈터 운영, 조학생 희망캠프, 애심조력기지 건설 등 효과적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한편 당지부를 설립해 당원들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고 어머니교양대학에서 강습을 통해 회원들의 삶이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도록 했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서는 빈곤가정 학생 1600여명, 빈곤장애인 500여명, 그외에도 1000여명에 달하는 불우이웃을 도왔는데 총 금액은 500여만원에 달한다. 애심인사들의 마음과 기대는 이들에게 삶의 용기를 갖게 했으며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룡정시에서 거주하는 골결핵환자 함모는 협회에서 극진하게 보살피고 치료를 도운 덕분에 완쾌되여 새로운 삶에 뛰여들었다. 화룡시에서 거주하는 빈곤녀성 박모는 협회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열고 생활의 용기를 얻었다. 연변성주청소년체육구락부의 체육건아들은 후더운 사랑의 성금과 힘찬 응원으로 민족전통체육종목을 전승해가고 있다…
협회는 2011년부터 2021년까지 고아, 결손가정자녀 등 보호가 필요한 소년과 소녀들을 보듬어안고 청소년 ‘꿈터’라는 작은 가정을 이루었는데 아이들의 새로운 가족이 되여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인 사랑을 주었다.
한수영은 놀랍게도 21명의 ‘자식’을 키운 ‘어머니’였다. 2008년, 30년 만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네이웃이였던 김화 회장의 소개로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 성큼 발을 들여놓은 그녀는 협회의 활동이라면 늘 적극 나섰다. 2011년말, 한수영은 김화 회장으로부터 청소년 ‘꿈터’를 잠시만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바로 승낙하게 되였다. 그렇게 ‘잠시’로 시작했다가 장장 10년의 세월 동안 아이들의 ‘원장엄마’로 살아온 그녀, 적당한 후임을 찾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데려온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정이 들 대로 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몰라라 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이들마다 성별에 따른 생리성장에 신경을 써주고 영양을 따져가며 밥상을 차리는 건 물론,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의 예민한 정서와 반항심리를 잘 보듬어주기 위해 밤을 패가면서 심리학을 깊이 파고들었다. 사회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일부 단체들의 자기 홍보 차원의 위문이거나 아이들의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는 위문은 견결히 사절했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들이 불우한 가정에서 태여났다는 리유로 주눅이 들가 항상 로심초사했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었다.
“까무잡잡하던 우리 애들이 구김살 없이 바르게 잘 자랐고 하나둘 어엿한 대학생으로, 훤칠한 청년으로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키워준 은혜를 언제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애들은 저희들 식의 보답도 잊지 않고 있어요.” 한수영의 감격에 겨운 말이다. 21명의 아이들은 그녀의 사랑과 정성을 먹고 바르게 성장하여 아름다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2022년 6월, 공직에서 퇴직한 최순희 회장은 협회 설립 20주년이 되던 해부터 협회를 이끌어가면서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나눔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다. “쌍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도 베풀 줄 아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생활 여건에서도 절약해 나눔을 실천하는 분도 있으며 20여년간 꾸준히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는 로회원들도 계십니다. ‘어머니’들의 사랑을 받던 아이들은 받은 사랑을 계주하여 ‘애심어머니’로 되여 더욱 많은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습니다.”
훈춘시의 손일림(32세)은 연변애심어머니협회의 후원을 받던 수많은 학생중 한명이였다. 어렸을 적 부모가 리혼한 후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하반신이 마비되자 두 부자는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2008년부터 연변애심어머니협회 훈춘지회에서는 후원을 시작해 손일림이 대학시절까지 학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손일림은 ‘애심어머니’들이 일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에 나타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며 감격해하고 있다.
최순희 회장의 소개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 고향 훈춘으로 돌아와 가두의 사업일군으로 된 손일림은 ‘3시 반 수업교실’을 열고 관할구역 빈곤가정 학생, 류재아동, 장애아동들에게 학습지도와 심리지도를 해주며 어려운 이들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여주었다. 직접 겪었던 아픔이 있었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잘 리해할 수 있었고 그동안 받아온 ‘어머니’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아이들을 진정 다 해 보듬어줄 수 있었다. 협회 회원 거개가 녀성이였기에 활동을 조직할 때마다 소수의 남성으로서 손일림은 ‘일군’을 자처해 쌀가마니를 짊어졌으며 운전수가 되기도 하고 궂은일에는 가장 먼저 앞장서군 했다.
“협회의 20여년 발자취를 돌아보면 더 많은 부축자금을 쟁취하기 위해 불철주야 큰 도시를 오가며 기울여온 로회원들의 로고와 애심인사들의 사랑의 후원에 감개가 무량하고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기자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최순희 회장은 더 많은 이들이 애심행사에 동참하도록 폭넓은 대외교류로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향후 타산을 밝혔다.
고아들의 엄마로, 독거로인들의 며느리로, 장애인들의 누나, 언니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는 ‘애심어머니’들, 사랑과 나눔이라는 ‘화장품’을 매일 바르면서 삶의 풍요로움을 깨달아간다. 작은 이슬이 모여서 바다가 되듯이 작은 정성이 모여서 큰 사랑을 만든다. ‘애심어머니’들은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여 어두운 얼굴에는 웃음이 되고 그늘진 마음에는 해살이 되여 포근하고 따사로운 어머니 손길로 꽃이 피는 새봄을 불러오고 있다.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저였기에 역지사지의 감수를 누구보다 더 잘 리해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회장 김화(76세)의 페부지언이다.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바랄 만도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선행사업의 선두에 나섰다. 김화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주변 친구 그리고 가까운 지인 30명과 서로 손잡고 2002년, 사단법인 연변애심어머니협회를 설립하고 베풂과 나눔을 실천해나갔다.
“1%의 사랑이 100%의 희망을 안아온다”는 김화 회장의 믿음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였다. 30여명 회원들의 주머니돈으로 차곡차곡 모아진 기금은 한명 또 한명의 아이들과 빈곤가정에 사랑의 단비가 되여주었고 그동안 협회는 30명의 회원으로부터 1000여명의 회원과 8개 지회를 둔 방대한 대오로, 사회의 긍정을 받는 협회로 성장했다.
지난 2월 20일, 최순희(62세) 회장과 협회의 부회장, ‘꿈터’ 원장을 겸했던 한수영(61세)을 만나 공익단체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힘차게 달려온 연변애심어머니협회의 따뜻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20여년 동안 초대회장 김화, 제2대 회장 방선화(68세)와 제3대 회장 최순희가 애심 계주를 이어가면서 연변애심어머니협회를 이끌고 ‘위대한 어머니 사랑으로 세상을 밝혀가는 등불이 되여 사회복지와 문화진흥에 기여한다’는 취지하에 실제행동으로 주변을 감동시켰다. 조학사업, 빈곤장애인부축 사업, 꿈터 운영, 조학생 희망캠프, 애심조력기지 건설 등 효과적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한편 당지부를 설립해 당원들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고 어머니교양대학에서 강습을 통해 회원들의 삶이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도록 했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서는 빈곤가정 학생 1600여명, 빈곤장애인 500여명, 그외에도 1000여명에 달하는 불우이웃을 도왔는데 총 금액은 500여만원에 달한다. 애심인사들의 마음과 기대는 이들에게 삶의 용기를 갖게 했으며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룡정시에서 거주하는 골결핵환자 함모는 협회에서 극진하게 보살피고 치료를 도운 덕분에 완쾌되여 새로운 삶에 뛰여들었다. 화룡시에서 거주하는 빈곤녀성 박모는 협회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열고 생활의 용기를 얻었다. 연변성주청소년체육구락부의 체육건아들은 후더운 사랑의 성금과 힘찬 응원으로 민족전통체육종목을 전승해가고 있다…
협회는 2011년부터 2021년까지 고아, 결손가정자녀 등 보호가 필요한 소년과 소녀들을 보듬어안고 청소년 ‘꿈터’라는 작은 가정을 이루었는데 아이들의 새로운 가족이 되여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인 사랑을 주었다.
한수영은 놀랍게도 21명의 ‘자식’을 키운 ‘어머니’였다. 2008년, 30년 만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네이웃이였던 김화 회장의 소개로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 성큼 발을 들여놓은 그녀는 협회의 활동이라면 늘 적극 나섰다. 2011년말, 한수영은 김화 회장으로부터 청소년 ‘꿈터’를 잠시만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바로 승낙하게 되였다. 그렇게 ‘잠시’로 시작했다가 장장 10년의 세월 동안 아이들의 ‘원장엄마’로 살아온 그녀, 적당한 후임을 찾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데려온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정이 들 대로 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몰라라 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이들마다 성별에 따른 생리성장에 신경을 써주고 영양을 따져가며 밥상을 차리는 건 물론,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의 예민한 정서와 반항심리를 잘 보듬어주기 위해 밤을 패가면서 심리학을 깊이 파고들었다. 사회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일부 단체들의 자기 홍보 차원의 위문이거나 아이들의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는 위문은 견결히 사절했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들이 불우한 가정에서 태여났다는 리유로 주눅이 들가 항상 로심초사했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었다.
“까무잡잡하던 우리 애들이 구김살 없이 바르게 잘 자랐고 하나둘 어엿한 대학생으로, 훤칠한 청년으로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키워준 은혜를 언제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애들은 저희들 식의 보답도 잊지 않고 있어요.” 한수영의 감격에 겨운 말이다. 21명의 아이들은 그녀의 사랑과 정성을 먹고 바르게 성장하여 아름다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2022년 6월, 공직에서 퇴직한 최순희 회장은 협회 설립 20주년이 되던 해부터 협회를 이끌어가면서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나눔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다. “쌍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도 베풀 줄 아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생활 여건에서도 절약해 나눔을 실천하는 분도 있으며 20여년간 꾸준히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는 로회원들도 계십니다. ‘어머니’들의 사랑을 받던 아이들은 받은 사랑을 계주하여 ‘애심어머니’로 되여 더욱 많은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습니다.”
훈춘시의 손일림(32세)은 연변애심어머니협회의 후원을 받던 수많은 학생중 한명이였다. 어렸을 적 부모가 리혼한 후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하반신이 마비되자 두 부자는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2008년부터 연변애심어머니협회 훈춘지회에서는 후원을 시작해 손일림이 대학시절까지 학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손일림은 ‘애심어머니’들이 일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에 나타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며 감격해하고 있다.
최순희 회장의 소개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 고향 훈춘으로 돌아와 가두의 사업일군으로 된 손일림은 ‘3시 반 수업교실’을 열고 관할구역 빈곤가정 학생, 류재아동, 장애아동들에게 학습지도와 심리지도를 해주며 어려운 이들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여주었다. 직접 겪었던 아픔이 있었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잘 리해할 수 있었고 그동안 받아온 ‘어머니’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아이들을 진정 다 해 보듬어줄 수 있었다. 협회 회원 거개가 녀성이였기에 활동을 조직할 때마다 소수의 남성으로서 손일림은 ‘일군’을 자처해 쌀가마니를 짊어졌으며 운전수가 되기도 하고 궂은일에는 가장 먼저 앞장서군 했다.
“협회의 20여년 발자취를 돌아보면 더 많은 부축자금을 쟁취하기 위해 불철주야 큰 도시를 오가며 기울여온 로회원들의 로고와 애심인사들의 사랑의 후원에 감개가 무량하고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기자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최순희 회장은 더 많은 이들이 애심행사에 동참하도록 폭넓은 대외교류로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향후 타산을 밝혔다.
고아들의 엄마로, 독거로인들의 며느리로, 장애인들의 누나, 언니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는 ‘애심어머니’들, 사랑과 나눔이라는 ‘화장품’을 매일 바르면서 삶의 풍요로움을 깨달아간다. 작은 이슬이 모여서 바다가 되듯이 작은 정성이 모여서 큰 사랑을 만든다. ‘애심어머니’들은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여 어두운 얼굴에는 웃음이 되고 그늘진 마음에는 해살이 되여 포근하고 따사로운 어머니 손길로 꽃이 피는 새봄을 불러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