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과 ‘평생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라 했다. 하지만 행운스럽게도 좋아하는 일을 평생직업으로 삼게 된 나는 오늘도 성장통을 겪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2004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 나는 보도사업에 종사하게 되였고 그때로부터 19년 동안 취재대상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기자라는 일터에서 연변이야기를 널리 전하며 보람있게 일해왔다.
연변의 이야기 듣고 전해
“내가 죽거든 연기로 타오르게 나를 태워주오. 아들이 싸웠던 곳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소.” 2019년 10월,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던 정동춘 렬사의 유가족 오채봉 로인으로부터 렬사어머님의 유언을 전해듣고 함께 울었다.
“드디여 재착공했습니다. 시름을 놓았습니다.” 2022년 4월, 코로나 형세가 안정된 후 오래동안 중단되였던 훈춘시의 중대대상이 재착공되였고 드디여 일할 수 있고 수입이 생기게 되였다면서 입꼬리가 올라간 로동자 왕곤과 동료들의 말을 듣고 함께 웃었다.
“정부의 지지가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더욱 신심이 있습니다.” 2023년 3월, ‘새 출발 새 국면—경제발전에 총력’ 주제 취재로 도문시에서 만난 연변굉윤복장유한회사 장굉매 부총경리의 말에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수많은 취재대상의 한마디 한마디 말이 바로 연변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어려울 때일수록 군중들과 함께
나는 선후로 연길시텔레비죤방송국, 연변일보사의 일선 기자로 사업하면서 늘 초심을 잊지 않고 군중 속에 심입하여 군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왔다.
2017년 7월 20일, 련일 폭우로 왕청지역에 홍수가 발생, 단위에서 발급한 응급가방을 메고 급히 왕청으로 떠났다. 집 벽이 키높이까지 물에 잠기거나 벽면이 통채로 허물어져내리고 농작물이 전부 물에 잠기는 피해 앞에서 왕청인민들은 마음을 합쳐 홍수에 대처해나섰다. 현, 진, 촌의 책임자들이 앞장섰고 자원봉사자들도 참여하면서 왕청인민들은 상하가 합심하여 재해복구에 총동원되였다. 무릎까지 물이 찬 농가 마당에 들어갔다가 바지가랭이까지 전부 젖고 발에 염증이 생겨 며칠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페염이 걸렸음에도 병원에서 뛰쳐나와 홍수방지에 앞장서던 촌서기, 키가 넘을 정도로 잠겼던 물이 빠지자 가장 먼저 장롱에서 아들의 대학졸업증을 꺼내여 조심스럽게 해빛에 말리우던 촌민, 개인발전기를 가지고 자기 집보다 피해가 큰 독거로인의 집에 먼저 찾아가 물을 빼내던 촌민… 자연재해의 무서움, 그리고 단결이란 무엇인가를 여느때보다도 강렬하게 느꼈던 순간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2020년 1월 29일, 음력 초닷새, 그날은 나의 38살 생일이였다. 해마다 음력설련휴기간에 취재를 해왔지만 그날따라 취재가 2건 잡혔다. 코로나 사태가 갓 발생한 초반 시기인지라 뉴스에서만 접하던 바이러스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기분으로 마스크에 장갑을 착용하고 온갖 신경을 곤두세운 채 취재를 하고 집에 돌아와 소독수를 엄청 뿌려대고 손을 껍질 벗겨질 정도로 박박 씻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늘 군중과 함께 하고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기자의 사명감이 아니던가.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농촌, 사회구역, 공장 등 곳곳에 기자로서의 의미 있는 발자국을 찍었고 군중의 목소리가 울리는 곳엔 늘 선참으로 달려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를 쥐여짜면서 써놓은 3000자 원고를 제대로 저장하지 못해 허망 날린 적도 있고 겨울철 외지에 취재 갔다가 추운 날씨로 인해 카메라 배터리가 부족하여 카메라를 들고 촬영버튼을 누르지 못한 적도 있다. 빈곤가정을 취재 갔다가 아픈 아이를 보고 모금활동을 조직한 적도 있었다. 그 일을 잊었을 무렵 아이 아버지한테서 련락이 와 딸애가 이미 곁을 떠났다면서, 딸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치료를 받아볼 수 있게 하여 유감이 없다면서 감사기를 보내온 적이 있다. 외지에 갔다가 가득 적어놓은 취재수첩을 두고 와 부랴부랴 뻐스편에 부탁하여 전달받은 적도 있으며 카메라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빛 과다로출로 머리속 기대했던 사진을 쓰지 못하게 된 적도 있다. 19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웃지 못할 뜻밖의 상황들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금도 기자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다.
기록하는 자로서의, 두 발로 뛰고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사고하고 필로 써내는 과정에 물론 창작의 고통도 만만치 않지만 원고의 마지막 글자, 마지막 점을 찍고 ‘Enter(回车)’버튼을 탁 내리치는 그 순간의 짜릿함, 신문에 실린 글과 사진이 마음에 들 때의 성취감, “오늘 기사가 참 좋아요, 잘 보고 있어요.”라는 주변 지인들의 문자메시지에 느끼는 뿌듯함… 이것이 바로 일하는 맛 아니던가.
당보의 기자로서 기자의 사명감으로 마음을 다해, 정을 다해 연변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며 사상이 있고 온도가 있고 품질이 있으며 진흙과 이슬이 맺힌 신문작품을 더 많이 써내는 합격된 보도일군이 되여 연변의 고품질 발전에 미약한 힘을 이바지하련다.
2004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 나는 보도사업에 종사하게 되였고 그때로부터 19년 동안 취재대상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기자라는 일터에서 연변이야기를 널리 전하며 보람있게 일해왔다.
연변의 이야기 듣고 전해
“내가 죽거든 연기로 타오르게 나를 태워주오. 아들이 싸웠던 곳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소.” 2019년 10월,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던 정동춘 렬사의 유가족 오채봉 로인으로부터 렬사어머님의 유언을 전해듣고 함께 울었다.
“드디여 재착공했습니다. 시름을 놓았습니다.” 2022년 4월, 코로나 형세가 안정된 후 오래동안 중단되였던 훈춘시의 중대대상이 재착공되였고 드디여 일할 수 있고 수입이 생기게 되였다면서 입꼬리가 올라간 로동자 왕곤과 동료들의 말을 듣고 함께 웃었다.
“정부의 지지가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더욱 신심이 있습니다.” 2023년 3월, ‘새 출발 새 국면—경제발전에 총력’ 주제 취재로 도문시에서 만난 연변굉윤복장유한회사 장굉매 부총경리의 말에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수많은 취재대상의 한마디 한마디 말이 바로 연변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어려울 때일수록 군중들과 함께
나는 선후로 연길시텔레비죤방송국, 연변일보사의 일선 기자로 사업하면서 늘 초심을 잊지 않고 군중 속에 심입하여 군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왔다.
2017년 7월 20일, 련일 폭우로 왕청지역에 홍수가 발생, 단위에서 발급한 응급가방을 메고 급히 왕청으로 떠났다. 집 벽이 키높이까지 물에 잠기거나 벽면이 통채로 허물어져내리고 농작물이 전부 물에 잠기는 피해 앞에서 왕청인민들은 마음을 합쳐 홍수에 대처해나섰다. 현, 진, 촌의 책임자들이 앞장섰고 자원봉사자들도 참여하면서 왕청인민들은 상하가 합심하여 재해복구에 총동원되였다. 무릎까지 물이 찬 농가 마당에 들어갔다가 바지가랭이까지 전부 젖고 발에 염증이 생겨 며칠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페염이 걸렸음에도 병원에서 뛰쳐나와 홍수방지에 앞장서던 촌서기, 키가 넘을 정도로 잠겼던 물이 빠지자 가장 먼저 장롱에서 아들의 대학졸업증을 꺼내여 조심스럽게 해빛에 말리우던 촌민, 개인발전기를 가지고 자기 집보다 피해가 큰 독거로인의 집에 먼저 찾아가 물을 빼내던 촌민… 자연재해의 무서움, 그리고 단결이란 무엇인가를 여느때보다도 강렬하게 느꼈던 순간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2020년 1월 29일, 음력 초닷새, 그날은 나의 38살 생일이였다. 해마다 음력설련휴기간에 취재를 해왔지만 그날따라 취재가 2건 잡혔다. 코로나 사태가 갓 발생한 초반 시기인지라 뉴스에서만 접하던 바이러스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기분으로 마스크에 장갑을 착용하고 온갖 신경을 곤두세운 채 취재를 하고 집에 돌아와 소독수를 엄청 뿌려대고 손을 껍질 벗겨질 정도로 박박 씻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늘 군중과 함께 하고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기자의 사명감이 아니던가.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농촌, 사회구역, 공장 등 곳곳에 기자로서의 의미 있는 발자국을 찍었고 군중의 목소리가 울리는 곳엔 늘 선참으로 달려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를 쥐여짜면서 써놓은 3000자 원고를 제대로 저장하지 못해 허망 날린 적도 있고 겨울철 외지에 취재 갔다가 추운 날씨로 인해 카메라 배터리가 부족하여 카메라를 들고 촬영버튼을 누르지 못한 적도 있다. 빈곤가정을 취재 갔다가 아픈 아이를 보고 모금활동을 조직한 적도 있었다. 그 일을 잊었을 무렵 아이 아버지한테서 련락이 와 딸애가 이미 곁을 떠났다면서, 딸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치료를 받아볼 수 있게 하여 유감이 없다면서 감사기를 보내온 적이 있다. 외지에 갔다가 가득 적어놓은 취재수첩을 두고 와 부랴부랴 뻐스편에 부탁하여 전달받은 적도 있으며 카메라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빛 과다로출로 머리속 기대했던 사진을 쓰지 못하게 된 적도 있다. 19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웃지 못할 뜻밖의 상황들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금도 기자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다.
기록하는 자로서의, 두 발로 뛰고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사고하고 필로 써내는 과정에 물론 창작의 고통도 만만치 않지만 원고의 마지막 글자, 마지막 점을 찍고 ‘Enter(回车)’버튼을 탁 내리치는 그 순간의 짜릿함, 신문에 실린 글과 사진이 마음에 들 때의 성취감, “오늘 기사가 참 좋아요, 잘 보고 있어요.”라는 주변 지인들의 문자메시지에 느끼는 뿌듯함… 이것이 바로 일하는 맛 아니던가.
당보의 기자로서 기자의 사명감으로 마음을 다해, 정을 다해 연변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며 사상이 있고 온도가 있고 품질이 있으며 진흙과 이슬이 맺힌 신문작품을 더 많이 써내는 합격된 보도일군이 되여 연변의 고품질 발전에 미약한 힘을 이바지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