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나 온기가 없던 곳, 외국은 말 그대로 집이 아니였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 나의 고향 연변이, 어머니가 계시는 집이…
“이젠 고향에 남겠습니다. 어디를 가보아도 조국과 고향이 제일입니다.”
2009년 6월, 4년간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오매불망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 나는 이렇게 부모님께 다짐하였다.
‘농촌아’로부터 기자로 되기까지
길림성 화룡시 투도진 룡문향 룡문촌의 평범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나는 말 그대로 ‘농촌아’였다. 나는 나물을 뜯고 개구리알을 건지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기도 하면서 항상 까무잡잡한 얼굴로 신나서 뛰여다녔다. 가난한 집 살림에서도 부모님은 나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셨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은 모두 투도진에 있는 중학교에 갔지만 우리 부모님은 갖은 방법을 대여 나를 화룡시에 있는 중점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나는 시내에 계시는 고모네 집에서 신세를 지며 열심히 공부를 했고 후에는 사범대학 본과를 졸업하고 룡정중학교에 정치교원으로 취직하게 되였다. 부모님은 안일한 ‘철밥통’의 좋은 직장을 다니는 나에 대하여 무척 만족하였지만 작디작은 농촌에서 태여난 나는 세상구경에 목이 말라있었다. 투도진 룡문향에서 살았고 화룡시에서도 공부를 했고 통화시에서 대학을 다닌 나는 외국은 또 어떤 곳일가 라는 궁금증을 안고 류학을 떠나게 되였다.
화려하나 그곳은 차가웠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4년간 조국의 품이 얼마나 따스하고 고향이 얼마나 정다우며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는 나의 집이 얼마나 따스한 곳인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몸살을 앓으면서 마음속으로 한층 성장한 나는 졸업하자마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사업단위 모집시험을 통해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 채용된 나는 이때로부터 조국의 꽃봉오리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중국조선족소년보사 편집기자로 나의 청춘과 열정을 깡그리 쏟아붓기 시작했다.
기자로 성장하던 나날들
신문방송학과나 문자편집과는 다른 분야인 학교교육을 전공한 나로서 글 쓰는 일을 하는 기자라는 직업은 높은 벽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소년보의 선배기자들은 나에게 아낌없는 배움을 주셨고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성장해나갔다. 글 쓰는 능력을 제고하느라 많은 책을 읽고 쓰다 보니 시, 동화, 동시, 수기 등 글들을 여러 문학지에 발표하기도 했고 동화집도 여러권 출판하였다. 취재한 기사와 편집한 판면들이 굵직굵직한 상을 받으면서 업무실력이 차곡차곡 제고되던 동안 나는 차츰 어린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헌신정신으로 사업에 몰두하는 당원기자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모습들이 나의 가슴을 울렸다. 이 뿐이 아니였다. 교육일선에서 초불처럼 자신을 불태우면서 조국의 꽃봉오리들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는 인민교원들의 희생정신은 나를 더욱 분발케 하였다. 가장 힘들고 가장 어려운 곳에는 항상 당원 동료나 당원 인민교원들이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당을 향해 있었고 나는 차츰 당조직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2016년 5월, 나는 영광스럽게 오매불망 그리던 위대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인생에서 가장 큰 성장을 가져오게 되였다. 번영부강하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어엿한 당원으로 성장한 자신이 가장 뿌듯했던 나날들이였다. 아침 출근시에도 거울을 보면서 “나는 중국공산당원이다. 오늘도 한명의 당원답게 살아가자.”고 매일매일 다짐하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사업에 최선을 다하였다. 전염병 예방, 통제 기간에도 나는 공산당원의 신분을 항상 아로새기며 1선에서 자원봉사를 하였다. 나는 2019년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우수공산당원으로 선정되였다. 내 자신에 대한 긍정보다는 소년보 당조직의 가르침하에 성장해온 한 당원기자에 대한 긍정이였다.
기자의 눈으로 성세의 중화를 보다
2018년부터 우리 소년보사에서는 민족단결진보 대형 기획시리즈인 ‘56개 민족, 56개 꽃봉오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나는 영광스럽게 기획취재팀의 일원으로 내몽골, 운남, 사천, 서장 등지의 19개 소수민족학교의 취재에 참여하게 되였다.
눈처럼 희디흰 하다로 우리를 반겨주던 장족아이들, 두 팔을 동그랗게 벌려 머리 우에 하트모양을 그리며 “안녕하세요.”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던 하니족아이들, 엄마한테서 배운 노래로 우리를 맞아주던 따이족아이들, 아직도 눈에 선히 떠오른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전까지도 깊은 산속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원시적인 농경생활을 이어왔던 로바족, 해방 후 당의 령도하에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온 로바족아이들은 서장자치구 농목민자녀 ‘세가지 정책’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입고 쓰는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받고 있었으며 학교 교실마다 다매체시대에 알맞게 컴퓨터며 텔레비죤들이 구전하게 갖추어져있었다. 앞으로 커서 의사가 되겠다는 로바족 달와찰서 학생,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몽골족 아라텅줘란 학생,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라후족 장정결 학생, 녀경찰이 되고 싶다는 이족 마해라영 학생, 상해복단대학에 가고 싶다는 지노족 택림 학생…
나는 기자라는 눈으로 직접 오늘날 우리 나라 여러 소수민족지역 학생들의 진솔한 생활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였다. 30년 전, 친척집이 있어야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나의 어린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학교는 당의 좋은 정책하에 현대화 교육설비가 구전했고 교수대오가 탄탄했으며 기숙사도 좋아서 조국의 꽃봉오리들은 작은 지방에서도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즐겁게 공부하며 자신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나가고 있었다. 교육강국으로 나아가는 조국의 모습을 기록하고 감탄하면서 나는 한명의 아이들이라도 더 많이 보고 한명의 아이들의 꿈이라도 더 적으려고 뛰고 또 뛰였다. 우리는 중화민족이며 우리 모두가 중화의 아들딸이라는 긍지감과 자부심으로 넘쳐나던 날들,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갑절 무겁게 느껴지던 날들, 한명의 당원으로 기자로 성장하는 날들이였다.
《좌전(左传)》에 “최상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며 그 다음이 말을 남기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료해하고 꿈을 키워주고 덕을 심어주는 일, 이 얼마나 고상한 일인가? 교육강국으로 나아가는 길에 청소년교양지의 한명의 편집기자로서 나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짐하고 아이들에게 다짐하고 조국에 다짐해본다. 성세의 중화 속에서 한점의 불꽃이 되여 평생을 다 바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