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 나는 평범한 로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여났다. 아버지는 우체국 배달원이였고 어머니는 공장의 림시로동자였다. 연변일보의 통신원으로도 활약하셨던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항일련군의 이야기며 공산당원 류호란의 이야기며 소년영웅 위라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나의 작은 가슴에 붉은 씨앗을 심어주셨다.
1981년, 소학교에 입학하고 소선대에 가입하던 날 보도원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붉은 넥타이는 선렬들의 붉은 피로 물든 소선대 기발의 한부분입니다.” 그날 앞가슴에서 팔락이는 붉은 넥타이를 보면서 장차 나라와 인민에게 유용한 사람으로 되겠다고 굳건히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선진청년조직인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는 것이였다. 나는 단지부에 입단지원서를 선참으로 바쳤다. 학습에 더 노력했고 아침 일찍 등교해 학급의 청소를 도맡아했으며 학급의 흑판보를 꾸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사상회보도 정기적으로 참답게 써서 바쳤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나는 끝내 오매불망 바라던 공청단휘장을 앞가슴에 정중히 달게 되였다.
가정형편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학꿈을 접고 우연한 기회에 교원초빙시험을 보았는데 합격되여 나는 도문시 월청향 걸만소학교에 배치되였다. 학교의 로공산당원인 최호남 교장을 비롯한 당원선생님들의 초심을 잊지 않고 한평생 농촌교육 사업에 몰두하는 정신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이라는 이 대가정의 일원으로 되여 농촌 교육사업에 나의 청춘과 열정을 이바지하려고 결심하며 나는 당지부에 입당신청서를 정중히 바쳤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패촌의 친척집에서 묵으며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학교당소조에서는 나에게 학생기숙사 옆의 빈방을 내여주어 자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또한 나에게 학교창고 보관원이라는 책임도 맡겼다. 창고에는 낡은 책걸상이 잔뜩 쌓여있었고 겨울에 난방용으로 구입한 석탄이 작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낡은 책걸상부터 정리해 한곳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석탄도 한곳에 깨끗하게 정돈해놓았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학교를 위해 자그마한 공헌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니 아주 기뻤다.
농촌학교라 자퇴생이 생기는 것은 피면하기 어려웠다. 한번은 내가 맡은 학급의 한 녀학생이 며칠 동안 학교에 오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집으로 찾아가서 그 녀학생을 설복해 학교로 다시 오게 했다. 그런데 이튿날 그 녀학생의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깎았다면서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그때 내 앞을 막아서면서 그 학부모를 제지시키고 <의무교육법>으로 설득해 학부모가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뉘우치게 한 분들도 학교당소조 성원들이였다. 어린 나이에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성인고등학교시험에 참가하라고 등을 밀어주신 분들도 당소조 성원들이였다. 나는 그들을 본보기로 교수에 몰두했고 학생들을 위한 사업에 전부의 심혈을 기울였으며 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에 걸려 결석한 학생의 집에 찾아가 보충수업을 하느라고 캄캄한 밤에 산길을 넘나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겨울이면 아침밥도 거르고 교무실 난로와 학급의 난로를 피웠고 봄부터 가을까지 학교실험전의 농사에도 발 벗고 나섰으며 생활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신도 사주고 학용품도 사줬다.
1996년,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극심한 비통을 억누르고 장례식을 치른 이튿날 눈물을 머금고 교단에 올랐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으며 학생들은 전보다 더 따라주었다. 그해 나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으로 되였다.
1998년, 사업의 수요로 월청중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나에게 단지부 조직위원 직무를 맡겼다. ‘5.4청년절 문예활동’, ‘12.9청년운동 기념일활동’에서 나는 단지부 서기와 손잡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청년단활동을 전개했다. 과목담임 사업을 하면서 나는 컴퓨터 조작기술을 자습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컴퓨터를 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기까지 하얗게 새운 밤이 얼마였으며 흘렸던 땀이 얼마인지 모른다. 학급담임 사업과 교육과학연구실 주임 및 학교의 전기화 교육 책임자 직을 맡아하면서 밤도 지샜고 휴식일도 반납했다. 동시에 나는 학급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집이 학교와 멀리 떨어져서 통학하기 어려운 학생을 집에 데려다 무상으로 돌봐주었고 학생들의 심리를 제때에 료해하고 정감교육을 위주로 개별담화를 진행했으며 경상적으로 가정방문을 진행해 자퇴생이 없는 학급으로 평의되였다. 나는 항상 당원의 초심을 잊지 않고 인민을 위한 사업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신성한 사명으로 간주했다. 당지부와 학교지도부,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나의 성적을 긍정해주었고 많은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해마다 시우수교원으로 평의되였고 시우수담임교원이라는 영예도 따냈다.
2003년, 당지부에서는 토론을 거쳐 나에게 당지부 부서기 직무를 맡겼다. 진붉은 당기 앞에서 선서할 때의 심장이 고동치던 감동이 또다시 가슴을 들먹였다. 나는 우선 당지부활동을 규범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3개 회의 1개 수업’제도를 잘 시행하기 위해 달마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지부활동을 전개해 당성교양을 강화했고 당지부의 매개 당원들로 하여금 리상신념을 굳건히 하도록 이끌었다. 당학습열성자 교양에도 힘써 여러명의 새로운 당원을 발전시켜 당조직의 력량을 강대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탰다. 또한 공산당원의 선봉모범역할을 발양해 모든 면에서 앞장섰다. 무상헌혈, 의무로동에 선두적으로 참가했고 교육과학연구에도 심혈을 몰부었다. ‘전국 11.5 교육기술연구중점과제’에 참여해 과제임무를 원만히 수행했으며 길림성교육청 ‘12.5사회과학연구과제’에 참여해 우수성과상을 수여받았다. 주급 론문도 여러편 발표했고 도문시 골간교원의 영예도 따냈다.
2010년 8월, 나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석현2중에서 근무하게 되였고 2019년 도문시제5중학교로 전근했다.
도문시제5중학교에 전근한 후 나는 당지부의 일원으로서 학교와 당조직을 위한 사업에 계속 헌신할 각오를 다졌다. 새로운 일터에서 나는 여전히 군중들의 어려움을 있는 힘껏 해결해주었고 맡은바 교수사업도 차근차근 잘해나갔다. 당지부의 여러가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학습필기도 참답게 완성해 나의 당원학습필기는 여러차례나 우수학습필기로 평의되였으며 ‘시우수당원’으로 선정되여 표창도 받았다. 당지부의 관심과 배려 하에 나는 점차 성장하고 성숙되며 영글어가고 있다. 교수면에서도 큰 성과를 따냈다. 성급, 주급 수업임무를 잘 완성해 표창을 받았고 ‘시우수교원’, ‘주골간교원’의 영예도 받아안게 되였다. 비록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지만 나는 지금도 학급담임교원으로 맹활약하면서 당의 교육사업에 빛과 열을 바치고 있다.
그렇다, 진붉은 당기는 전진의 기치이다. 나는 시종 당원의 책임을 아로새기고 초심을 잊지 않으며 진붉은 당기와 함께 영원히 새시대 교육사업의 한길에서 달리련다.
1981년, 소학교에 입학하고 소선대에 가입하던 날 보도원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붉은 넥타이는 선렬들의 붉은 피로 물든 소선대 기발의 한부분입니다.” 그날 앞가슴에서 팔락이는 붉은 넥타이를 보면서 장차 나라와 인민에게 유용한 사람으로 되겠다고 굳건히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선진청년조직인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는 것이였다. 나는 단지부에 입단지원서를 선참으로 바쳤다. 학습에 더 노력했고 아침 일찍 등교해 학급의 청소를 도맡아했으며 학급의 흑판보를 꾸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사상회보도 정기적으로 참답게 써서 바쳤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나는 끝내 오매불망 바라던 공청단휘장을 앞가슴에 정중히 달게 되였다.
가정형편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학꿈을 접고 우연한 기회에 교원초빙시험을 보았는데 합격되여 나는 도문시 월청향 걸만소학교에 배치되였다. 학교의 로공산당원인 최호남 교장을 비롯한 당원선생님들의 초심을 잊지 않고 한평생 농촌교육 사업에 몰두하는 정신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이라는 이 대가정의 일원으로 되여 농촌 교육사업에 나의 청춘과 열정을 이바지하려고 결심하며 나는 당지부에 입당신청서를 정중히 바쳤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패촌의 친척집에서 묵으며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학교당소조에서는 나에게 학생기숙사 옆의 빈방을 내여주어 자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또한 나에게 학교창고 보관원이라는 책임도 맡겼다. 창고에는 낡은 책걸상이 잔뜩 쌓여있었고 겨울에 난방용으로 구입한 석탄이 작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낡은 책걸상부터 정리해 한곳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석탄도 한곳에 깨끗하게 정돈해놓았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학교를 위해 자그마한 공헌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니 아주 기뻤다.
농촌학교라 자퇴생이 생기는 것은 피면하기 어려웠다. 한번은 내가 맡은 학급의 한 녀학생이 며칠 동안 학교에 오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집으로 찾아가서 그 녀학생을 설복해 학교로 다시 오게 했다. 그런데 이튿날 그 녀학생의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깎았다면서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그때 내 앞을 막아서면서 그 학부모를 제지시키고 <의무교육법>으로 설득해 학부모가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뉘우치게 한 분들도 학교당소조 성원들이였다. 어린 나이에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성인고등학교시험에 참가하라고 등을 밀어주신 분들도 당소조 성원들이였다. 나는 그들을 본보기로 교수에 몰두했고 학생들을 위한 사업에 전부의 심혈을 기울였으며 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에 걸려 결석한 학생의 집에 찾아가 보충수업을 하느라고 캄캄한 밤에 산길을 넘나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겨울이면 아침밥도 거르고 교무실 난로와 학급의 난로를 피웠고 봄부터 가을까지 학교실험전의 농사에도 발 벗고 나섰으며 생활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신도 사주고 학용품도 사줬다.
1996년,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극심한 비통을 억누르고 장례식을 치른 이튿날 눈물을 머금고 교단에 올랐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으며 학생들은 전보다 더 따라주었다. 그해 나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으로 되였다.
1998년, 사업의 수요로 월청중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나에게 단지부 조직위원 직무를 맡겼다. ‘5.4청년절 문예활동’, ‘12.9청년운동 기념일활동’에서 나는 단지부 서기와 손잡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청년단활동을 전개했다. 과목담임 사업을 하면서 나는 컴퓨터 조작기술을 자습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컴퓨터를 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기까지 하얗게 새운 밤이 얼마였으며 흘렸던 땀이 얼마인지 모른다. 학급담임 사업과 교육과학연구실 주임 및 학교의 전기화 교육 책임자 직을 맡아하면서 밤도 지샜고 휴식일도 반납했다. 동시에 나는 학급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집이 학교와 멀리 떨어져서 통학하기 어려운 학생을 집에 데려다 무상으로 돌봐주었고 학생들의 심리를 제때에 료해하고 정감교육을 위주로 개별담화를 진행했으며 경상적으로 가정방문을 진행해 자퇴생이 없는 학급으로 평의되였다. 나는 항상 당원의 초심을 잊지 않고 인민을 위한 사업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신성한 사명으로 간주했다. 당지부와 학교지도부,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나의 성적을 긍정해주었고 많은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해마다 시우수교원으로 평의되였고 시우수담임교원이라는 영예도 따냈다.
2003년, 당지부에서는 토론을 거쳐 나에게 당지부 부서기 직무를 맡겼다. 진붉은 당기 앞에서 선서할 때의 심장이 고동치던 감동이 또다시 가슴을 들먹였다. 나는 우선 당지부활동을 규범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3개 회의 1개 수업’제도를 잘 시행하기 위해 달마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지부활동을 전개해 당성교양을 강화했고 당지부의 매개 당원들로 하여금 리상신념을 굳건히 하도록 이끌었다. 당학습열성자 교양에도 힘써 여러명의 새로운 당원을 발전시켜 당조직의 력량을 강대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탰다. 또한 공산당원의 선봉모범역할을 발양해 모든 면에서 앞장섰다. 무상헌혈, 의무로동에 선두적으로 참가했고 교육과학연구에도 심혈을 몰부었다. ‘전국 11.5 교육기술연구중점과제’에 참여해 과제임무를 원만히 수행했으며 길림성교육청 ‘12.5사회과학연구과제’에 참여해 우수성과상을 수여받았다. 주급 론문도 여러편 발표했고 도문시 골간교원의 영예도 따냈다.
2010년 8월, 나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석현2중에서 근무하게 되였고 2019년 도문시제5중학교로 전근했다.
도문시제5중학교에 전근한 후 나는 당지부의 일원으로서 학교와 당조직을 위한 사업에 계속 헌신할 각오를 다졌다. 새로운 일터에서 나는 여전히 군중들의 어려움을 있는 힘껏 해결해주었고 맡은바 교수사업도 차근차근 잘해나갔다. 당지부의 여러가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학습필기도 참답게 완성해 나의 당원학습필기는 여러차례나 우수학습필기로 평의되였으며 ‘시우수당원’으로 선정되여 표창도 받았다. 당지부의 관심과 배려 하에 나는 점차 성장하고 성숙되며 영글어가고 있다. 교수면에서도 큰 성과를 따냈다. 성급, 주급 수업임무를 잘 완성해 표창을 받았고 ‘시우수교원’, ‘주골간교원’의 영예도 받아안게 되였다. 비록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지만 나는 지금도 학급담임교원으로 맹활약하면서 당의 교육사업에 빛과 열을 바치고 있다.
그렇다, 진붉은 당기는 전진의 기치이다. 나는 시종 당원의 책임을 아로새기고 초심을 잊지 않으며 진붉은 당기와 함께 영원히 새시대 교육사업의 한길에서 달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