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도문시 홍광향당위에서 사업하면서 나는 <당지부서기는 군중의 마음속 기둥이 되여야 한다>는 글을 《지부생활》잡지에 투고하여 처음 발표했다.
이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지부생활》과 맺은 인연이 꼭 40년이다.
40년간 나는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원고를 투고하면서 편집부와 기자들의 지도와 양성하에 ‘우수통신원’이란 영예까지 지녔다.
40년의 체험을 통해 나는 《지부생활》잡지를 ‘시대의 길잡이’라고 부른다.
호도거리농업생산책임제 ‘길잡이’
1983년, 내가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원에서 사업할 때는 농촌에서 호도거리생산책임제를 전면적으로 시달하던 시기였다. 그해말, 나는 농촌에 다니며 조사연구를 했는데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의 로당원 최형송이 호도거리책임제 후 첫 해에 6남 1녀 자녀들의 특장에 따라 농업, 철목가공, 기와가공, 운수업으로 ‘다각경영련합조’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인구당 수입을 1300원으로 올렸다.
나는 이들의 사적을 전형적인 경험으로 《지부생활》잡지에 투고하였는데 편집부에서는 한정남 기자를 파견해 나와 함께 최형송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근로치부의 길>이란 제목으로 방문기를 발표했다.
이 방문기는 도문시에서 처음으로 신문잡지에 발표된 호도거리생산책임제의 경험자료였다. 하여 최형송네는 도문시 호도거리책임제의 모델로 되였고 많은 농민들이 치부신심을 얻었으며 호도거리생산책임제가 전 시적으로 보급됐다.
최형송네 ‘다각경영련합조’의 농업조장인 셋째아들 최영우는 계속해 전 주 과학영농모범으로 부상됐고 넷째아들 최명우는 마패촌에서 30여년간 당지부 서기와 촌민위원회 주임을 맡고 주우수당원과 로력모범의 영예를 따냈다.
조화사회 구축의 ‘길잡이’
2005년, 나는 《지부생활》 편집부로부터 이하 ‘경제사회자문위원’으로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았다.
편집부에서는 그해 6기 잡지에 “본 잡지사에서는 본지 출간 700기를 기념하여 주당위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함과 동시에 보도범위를 확장하고 사회의 열점화제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의 지지와 감독을 강화하기 위하여 4월부터 설문조사, 좌담회를 통하여 도합 250여명의 독자들로부터 잡지에 대한 의견과 건의를 정취하고 개혁대책의 첫걸음으로 사외의 8명의 유지인사, 기업인들로 자문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자문위원회는 본지 편집위원회의 지도하에 잡지의 방향과 질 제고, 잡지의 운영에 대해 지도 및 감독하게 된다.”고 실었다.
그때 나는 연변춘광자연농업실험유한회사 부총경리의 신분으로 ‘위임장’을 받고 자문위원회 비서장으로 선거됐다.
내가 ‘위임장’을 받은 것도 이만저만이 아닌 영광인데 비서장까지 맡으니 중책의 압력으로 며칠 밤을 새하얗게 보냈다. 나는 ‘위임장’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제구실’을 잘할 것인가 무척 신경을 썼다. 나중에 ‘그래도 《지부생활》에서 정답을 찾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하여 며칠간 여러 기의 《지부생활》잡지를 펼쳐놓고 통독을 하다가 ‘당의 16기 6차 전원회의의 주요의제는 조화로운 사회주의사회 구축’이라는 전문란에 눈길이 멈췄다.
계속하여 ‘당의 16기 6차 전원회의 새로운 정보란’에서 “사회주의사회는 더욱더 조화로워야 한다.”, “‘조화로움’의 리념은 이미 중국경제사회 각 령역에 깊숙이 침투되고 있다.”, “당창건 85주년 기념행사에서 호금도 동지는 조화로운 사회주의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더욱 뚜렷한 위치’에 올려놓는다고 하였다.”등 내용을 읽으니 앞길이 보였다.
나는 조화사회 구축에 관한 새로운 리념, 새로운 사로, 새로운 높이, 새로운 표현, 새로운 조치, 새로운 변화, 새로운 경계를 파고들어 공부하면서 ‘조화로운 사회 구축’을 위해 공헌하리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한동안의 도시와 농촌의 현실을 조사한 후 ‘이웃절’을 내오는 것을 조화로운 사회구축의 바탕으로 하여 ‘전민전’을 조직하자고 편집부에 건의했다.
편집부는 제때에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2005년 6기에 ‘이웃절을 내오자’는 나의 발기문에 배합하여 “여러분의 동참을 바랍니다.”는 편집자의 말을 발표했다.
편집부에서는 ‘이웃절’을 실속 있게 조직, 보급하기 위해 사회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정면으로 이끌기 위하여 부주필 윤성환 기자를 선두로 2007년까지 3년간 련속 ‘이웃절’ 전문란을 설치하여 “‘이웃절’에 대한 독자의 목소리”, ‘후더운 이웃정 마음의 장벽을 허물다’, “‘이웃절’ 내오는 데 대찬성”, “연길시 신흥가두 ‘이웃절’ 첫 막 올리려 최선”, “북산가두 ‘이웃절’ 첫 막”, ‘좋은 생각 행복한 동행’, “‘이웃절’이 가져다준 행복한 동행”, “북산가두 ‘이웃절’에 대한 설문조사”, ‘연길시 북산가두 또 흥겨운 이웃잔치 치른다’, “조화로운 사회구역 건설에 ‘이웃절’ 한몫” 등 전문란을 총 11기 꾸려 40편의 문자기사에 25점의 사진을 배합하여 조화사회를 구축하는 ‘이웃절’의 붐을 일으켰다.
2005년 10월, ‘이웃절’ 발기문을 발표한 후 2006년 4월 11일에 연길시 북산가두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이 10여년 사이에 주내는 물론 장춘에까지 파급되여 조화사회 건설에 조력했다.
사회적인 ‘이웃절’의 반향
‘이웃절’이 발기된 후 연변예술학원 남희철 교수는 <‘이웃절’노래>(한어와 조선어로 창작)를 창작, 보급해 주내 인민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로 되였고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되였다.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이 연길시의 ‘이웃절’을 취재하고 “수십년간 민족지역 보도를 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특필했다.
개혁개방 40주년을 경축해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연변의 ‘이웃절’을 특집프로로 생방송하였고 2011년 2월, 인민일보는 ‘새봄 맞이 취재팀’을 연변에 파견하여 연변의 ‘이웃절’을 심층보도한 뒤 계속해 CCTV1과 CCTV15 채널에서 건국 70주년 특집프로(<새시대>, <금빛>)로 2019년 10월 5일부터 몇차례나 연길과 훈춘 방천의 ‘이웃절’을 방송했다.
지난 2023년 11월초에 열린 ‘전 주 통전사업회의’에서는 연변에서 ‘이웃절’을 더욱 잘 조직할 것을 강조했다.
모두어 말하면 근 20년 이래 ‘이웃절’이 이룩한 성과는 긍정적이고 방향적인 것이다.
필자는 이상의 생동한 사실로 《지부생활》잡지는 ‘시대의 길잡이’라는 정확성을 재현하며 이 글을 맺는다.
이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지부생활》과 맺은 인연이 꼭 40년이다.
40년간 나는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원고를 투고하면서 편집부와 기자들의 지도와 양성하에 ‘우수통신원’이란 영예까지 지녔다.
40년의 체험을 통해 나는 《지부생활》잡지를 ‘시대의 길잡이’라고 부른다.
호도거리농업생산책임제 ‘길잡이’
1983년, 내가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원에서 사업할 때는 농촌에서 호도거리생산책임제를 전면적으로 시달하던 시기였다. 그해말, 나는 농촌에 다니며 조사연구를 했는데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의 로당원 최형송이 호도거리책임제 후 첫 해에 6남 1녀 자녀들의 특장에 따라 농업, 철목가공, 기와가공, 운수업으로 ‘다각경영련합조’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인구당 수입을 1300원으로 올렸다.
나는 이들의 사적을 전형적인 경험으로 《지부생활》잡지에 투고하였는데 편집부에서는 한정남 기자를 파견해 나와 함께 최형송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근로치부의 길>이란 제목으로 방문기를 발표했다.
이 방문기는 도문시에서 처음으로 신문잡지에 발표된 호도거리생산책임제의 경험자료였다. 하여 최형송네는 도문시 호도거리책임제의 모델로 되였고 많은 농민들이 치부신심을 얻었으며 호도거리생산책임제가 전 시적으로 보급됐다.
최형송네 ‘다각경영련합조’의 농업조장인 셋째아들 최영우는 계속해 전 주 과학영농모범으로 부상됐고 넷째아들 최명우는 마패촌에서 30여년간 당지부 서기와 촌민위원회 주임을 맡고 주우수당원과 로력모범의 영예를 따냈다.
조화사회 구축의 ‘길잡이’
2005년, 나는 《지부생활》 편집부로부터 이하 ‘경제사회자문위원’으로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았다.
편집부에서는 그해 6기 잡지에 “본 잡지사에서는 본지 출간 700기를 기념하여 주당위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함과 동시에 보도범위를 확장하고 사회의 열점화제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의 지지와 감독을 강화하기 위하여 4월부터 설문조사, 좌담회를 통하여 도합 250여명의 독자들로부터 잡지에 대한 의견과 건의를 정취하고 개혁대책의 첫걸음으로 사외의 8명의 유지인사, 기업인들로 자문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자문위원회는 본지 편집위원회의 지도하에 잡지의 방향과 질 제고, 잡지의 운영에 대해 지도 및 감독하게 된다.”고 실었다.
그때 나는 연변춘광자연농업실험유한회사 부총경리의 신분으로 ‘위임장’을 받고 자문위원회 비서장으로 선거됐다.
내가 ‘위임장’을 받은 것도 이만저만이 아닌 영광인데 비서장까지 맡으니 중책의 압력으로 며칠 밤을 새하얗게 보냈다. 나는 ‘위임장’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제구실’을 잘할 것인가 무척 신경을 썼다. 나중에 ‘그래도 《지부생활》에서 정답을 찾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하여 며칠간 여러 기의 《지부생활》잡지를 펼쳐놓고 통독을 하다가 ‘당의 16기 6차 전원회의의 주요의제는 조화로운 사회주의사회 구축’이라는 전문란에 눈길이 멈췄다.
계속하여 ‘당의 16기 6차 전원회의 새로운 정보란’에서 “사회주의사회는 더욱더 조화로워야 한다.”, “‘조화로움’의 리념은 이미 중국경제사회 각 령역에 깊숙이 침투되고 있다.”, “당창건 85주년 기념행사에서 호금도 동지는 조화로운 사회주의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더욱 뚜렷한 위치’에 올려놓는다고 하였다.”등 내용을 읽으니 앞길이 보였다.
나는 조화사회 구축에 관한 새로운 리념, 새로운 사로, 새로운 높이, 새로운 표현, 새로운 조치, 새로운 변화, 새로운 경계를 파고들어 공부하면서 ‘조화로운 사회 구축’을 위해 공헌하리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한동안의 도시와 농촌의 현실을 조사한 후 ‘이웃절’을 내오는 것을 조화로운 사회구축의 바탕으로 하여 ‘전민전’을 조직하자고 편집부에 건의했다.
편집부는 제때에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2005년 6기에 ‘이웃절을 내오자’는 나의 발기문에 배합하여 “여러분의 동참을 바랍니다.”는 편집자의 말을 발표했다.
편집부에서는 ‘이웃절’을 실속 있게 조직, 보급하기 위해 사회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정면으로 이끌기 위하여 부주필 윤성환 기자를 선두로 2007년까지 3년간 련속 ‘이웃절’ 전문란을 설치하여 “‘이웃절’에 대한 독자의 목소리”, ‘후더운 이웃정 마음의 장벽을 허물다’, “‘이웃절’ 내오는 데 대찬성”, “연길시 신흥가두 ‘이웃절’ 첫 막 올리려 최선”, “북산가두 ‘이웃절’ 첫 막”, ‘좋은 생각 행복한 동행’, “‘이웃절’이 가져다준 행복한 동행”, “북산가두 ‘이웃절’에 대한 설문조사”, ‘연길시 북산가두 또 흥겨운 이웃잔치 치른다’, “조화로운 사회구역 건설에 ‘이웃절’ 한몫” 등 전문란을 총 11기 꾸려 40편의 문자기사에 25점의 사진을 배합하여 조화사회를 구축하는 ‘이웃절’의 붐을 일으켰다.
2005년 10월, ‘이웃절’ 발기문을 발표한 후 2006년 4월 11일에 연길시 북산가두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이 10여년 사이에 주내는 물론 장춘에까지 파급되여 조화사회 건설에 조력했다.
사회적인 ‘이웃절’의 반향
‘이웃절’이 발기된 후 연변예술학원 남희철 교수는 <‘이웃절’노래>(한어와 조선어로 창작)를 창작, 보급해 주내 인민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로 되였고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되였다.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이 연길시의 ‘이웃절’을 취재하고 “수십년간 민족지역 보도를 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특필했다.
개혁개방 40주년을 경축해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연변의 ‘이웃절’을 특집프로로 생방송하였고 2011년 2월, 인민일보는 ‘새봄 맞이 취재팀’을 연변에 파견하여 연변의 ‘이웃절’을 심층보도한 뒤 계속해 CCTV1과 CCTV15 채널에서 건국 70주년 특집프로(<새시대>, <금빛>)로 2019년 10월 5일부터 몇차례나 연길과 훈춘 방천의 ‘이웃절’을 방송했다.
지난 2023년 11월초에 열린 ‘전 주 통전사업회의’에서는 연변에서 ‘이웃절’을 더욱 잘 조직할 것을 강조했다.
모두어 말하면 근 20년 이래 ‘이웃절’이 이룩한 성과는 긍정적이고 방향적인 것이다.
필자는 이상의 생동한 사실로 《지부생활》잡지는 ‘시대의 길잡이’라는 정확성을 재현하며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