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진흥 사업을 통해 저는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을을 더 살기 좋게 만들고 촌민들을 돕는 것은 제가 짊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6월 6일, 취재진은 새 농촌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룡정시 덕신향 석문촌에서 촌당지부 부서기 김남일(31세)을 만났다.
석문촌은 룡정시 동남부에 위치해있고 시가지와 25킬로메터 남짓이 떨어져있는 조선족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김남일은 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해외에서 직장을 찾고 뛰여난 능력을 인정받아 꽤 높은 수입을 받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보내왔다. “솔직히 저도 대다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에서의 삶을 바라왔었습니다. 매일이다싶이 번화하게 변화하는 도시에 비하면 농촌마을은 조건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매번 명절이면 고향에 돌아와 마을 곳곳을 돌아보면서 많은 걸 느꼈고 생각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마을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고 석문촌당지부 서기 최룡운(53세)도 그의 생각을 적극 지지해나섰다. 큰 신심을 갖게 된 그는 향촌건설의 꿈을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2021년 11월, 김남일은 촌당지부 부서기로 당선됐다. 하지만 초반에는 어디서부터 사업을 착수해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에 최서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업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몰랐는데 직접 해보니 농촌사업의 복잡성을 알 것 같았습니다.” 료해에 의하면 최룡운 서기는 해외로무를 하다 고향에 돌아와 꾸준한 노력을 거쳐 마을의 ‘치부의 달인’으로 거듭났다. 2013년, 촌당지부 서기로 당선돼 촌민을 위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해왔고 마을의 발전을 힘써 이끌어왔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걸 지켜봤습니다. 바르고 성격도 좋고 힘든 일 두려워하지 않는 데다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강합니다. 현재는 배우는 과정이지만 초심을 잊지 않고 잘해내리라 믿습니다.”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그에 대해 최룡운 서기는 기대가 크다. 마을에서 제일 나젊은 이 귀향청년한테 촌민들도 마찬가지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촌당지부 부서기로 부임된 후 촌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김남일은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향촌진흥에 초점을 맞추고 실제적인 일에 착수했다. “마을에 돌아와 보니 마다바이, 마다매 벌이 되는 마을 주민들이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여있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제 성장과정을 다 보아온 분들이라 친척과 다름없고 이들을 위해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김남일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2011년, 군대에서 입당해 짧지 않은 당년한을 지녔다. 촌주재사업대의 도움으로 당건설 사업을 착안점으로 삼고 마을의 제반 사업에 대해 하나하나 료해해나갔다. 그는 촌간부와 촌주재사업대와 함께 촌민들의 집을 일일이 돌아보면서 촌민들의 생산 생활 조건, 해외로무 정황, 주거환경위생 등과 관련해 자료를 작성하고 숙지해나갔다. 일년 반의 시간이 흐른 이제는 5개 촌민소조의 41가구 68명의 기본정황을 꿰뚫고 있다. “빈곤해탈 난관공략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것은 향촌진흥의 전제이고 토대입니다. 재배업과 축목업이 위주인 우리 촌은 재배기술과 사양기술 제고 문제를 적극 해결해 집체수입을 끌어올리고 여러 혜민정책을 잘 활용해 빈곤해탈 난관공략의 성과와 향촌진흥을 효과적으로 이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료해에 따르면 지난해 석문촌은 촌집체 경제수입을 50만원 올리고 인당 수입은 1만 3000원에 달했다.
“스스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촌민들한테 깊은 신임을 얻고 있어 촌에 희망이 보입니다.” 김남일의 귀향이 향촌진흥 사업을 전개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석문촌 제1서기 김무승은 치부인솔을 통해 마을을 이끌어나가겠다는 젊은 친구의 생각이 대견하기도 하고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빈곤해탈은 결코 종점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분투를 위한 시작점입니다. 지금 여기 소들은 촌의 소사양기지에서 통일로 관리합니다.” 석문촌에 초원이 많은 우세에 의탁해 김남일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금을 투자해 지난해부터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현대화 농기구를 구입해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돕기도 하고 농촌일에 하나둘 재미를 붙여나간다. 물론 배워가는 과정이라 이러저러한 손실도 보고 농기구가 파손되는 일도 겪었지만 패기와 끈기로 차근차근 겪으면서 익히고 참농군이 되여간다.
농촌에서 나와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또다시 농촌에 뿌리를 박으려는 그의 선택에 주변에는 반대목소리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한가지 소신이 있었다. “석문촌에 360쌍 가까이 되는 경작지가 있고 초원이 많습니다. 재배업과 목축업을 통해 촌민들의 수입을 높여야 잘살 수 있습니다. 촌에 남아있는 로인들 자녀는 대부분 로무송출로 해외에 가서 생활합니다. 몇년간 벌고 돌아와 집을 구매하고 나면 또다시 해외로 나가는 상황이 돌아옵니다. 서로 힘을 모으면 농촌에서도 충분히 치부할 수 있고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잘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광활한 농촌에는 젊은 친구들도 충분히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하여 지금 쌓고 있는 농사경험들을 잘 정리해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공유하고 있다.
석문촌의 형제봉 산중턱에 자리한 목장에서 소떼가 가담가담 풀을 뜯으며 살을 찌워가고 있다. 아래로 굽어보면 석문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향의 산과 들을 굽이도는 푸른 주단길을 따라 뿌려가는 신근한 땀방울, 희망은 향촌진흥의 길을 누벼가고 있다.
석문촌은 룡정시 동남부에 위치해있고 시가지와 25킬로메터 남짓이 떨어져있는 조선족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김남일은 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해외에서 직장을 찾고 뛰여난 능력을 인정받아 꽤 높은 수입을 받으면서 안정적인 삶을 보내왔다. “솔직히 저도 대다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에서의 삶을 바라왔었습니다. 매일이다싶이 번화하게 변화하는 도시에 비하면 농촌마을은 조건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매번 명절이면 고향에 돌아와 마을 곳곳을 돌아보면서 많은 걸 느꼈고 생각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마을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고 석문촌당지부 서기 최룡운(53세)도 그의 생각을 적극 지지해나섰다. 큰 신심을 갖게 된 그는 향촌건설의 꿈을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2021년 11월, 김남일은 촌당지부 부서기로 당선됐다. 하지만 초반에는 어디서부터 사업을 착수해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에 최서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업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몰랐는데 직접 해보니 농촌사업의 복잡성을 알 것 같았습니다.” 료해에 의하면 최룡운 서기는 해외로무를 하다 고향에 돌아와 꾸준한 노력을 거쳐 마을의 ‘치부의 달인’으로 거듭났다. 2013년, 촌당지부 서기로 당선돼 촌민을 위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해왔고 마을의 발전을 힘써 이끌어왔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걸 지켜봤습니다. 바르고 성격도 좋고 힘든 일 두려워하지 않는 데다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강합니다. 현재는 배우는 과정이지만 초심을 잊지 않고 잘해내리라 믿습니다.”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그에 대해 최룡운 서기는 기대가 크다. 마을에서 제일 나젊은 이 귀향청년한테 촌민들도 마찬가지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촌당지부 부서기로 부임된 후 촌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김남일은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향촌진흥에 초점을 맞추고 실제적인 일에 착수했다. “마을에 돌아와 보니 마다바이, 마다매 벌이 되는 마을 주민들이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여있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제 성장과정을 다 보아온 분들이라 친척과 다름없고 이들을 위해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김남일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2011년, 군대에서 입당해 짧지 않은 당년한을 지녔다. 촌주재사업대의 도움으로 당건설 사업을 착안점으로 삼고 마을의 제반 사업에 대해 하나하나 료해해나갔다. 그는 촌간부와 촌주재사업대와 함께 촌민들의 집을 일일이 돌아보면서 촌민들의 생산 생활 조건, 해외로무 정황, 주거환경위생 등과 관련해 자료를 작성하고 숙지해나갔다. 일년 반의 시간이 흐른 이제는 5개 촌민소조의 41가구 68명의 기본정황을 꿰뚫고 있다. “빈곤해탈 난관공략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것은 향촌진흥의 전제이고 토대입니다. 재배업과 축목업이 위주인 우리 촌은 재배기술과 사양기술 제고 문제를 적극 해결해 집체수입을 끌어올리고 여러 혜민정책을 잘 활용해 빈곤해탈 난관공략의 성과와 향촌진흥을 효과적으로 이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료해에 따르면 지난해 석문촌은 촌집체 경제수입을 50만원 올리고 인당 수입은 1만 3000원에 달했다.
“스스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촌민들한테 깊은 신임을 얻고 있어 촌에 희망이 보입니다.” 김남일의 귀향이 향촌진흥 사업을 전개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석문촌 제1서기 김무승은 치부인솔을 통해 마을을 이끌어나가겠다는 젊은 친구의 생각이 대견하기도 하고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빈곤해탈은 결코 종점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분투를 위한 시작점입니다. 지금 여기 소들은 촌의 소사양기지에서 통일로 관리합니다.” 석문촌에 초원이 많은 우세에 의탁해 김남일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금을 투자해 지난해부터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현대화 농기구를 구입해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돕기도 하고 농촌일에 하나둘 재미를 붙여나간다. 물론 배워가는 과정이라 이러저러한 손실도 보고 농기구가 파손되는 일도 겪었지만 패기와 끈기로 차근차근 겪으면서 익히고 참농군이 되여간다.
농촌에서 나와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또다시 농촌에 뿌리를 박으려는 그의 선택에 주변에는 반대목소리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한가지 소신이 있었다. “석문촌에 360쌍 가까이 되는 경작지가 있고 초원이 많습니다. 재배업과 목축업을 통해 촌민들의 수입을 높여야 잘살 수 있습니다. 촌에 남아있는 로인들 자녀는 대부분 로무송출로 해외에 가서 생활합니다. 몇년간 벌고 돌아와 집을 구매하고 나면 또다시 해외로 나가는 상황이 돌아옵니다. 서로 힘을 모으면 농촌에서도 충분히 치부할 수 있고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잘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광활한 농촌에는 젊은 친구들도 충분히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하여 지금 쌓고 있는 농사경험들을 잘 정리해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공유하고 있다.
석문촌의 형제봉 산중턱에 자리한 목장에서 소떼가 가담가담 풀을 뜯으며 살을 찌워가고 있다. 아래로 굽어보면 석문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향의 산과 들을 굽이도는 푸른 주단길을 따라 뿌려가는 신근한 땀방울, 희망은 향촌진흥의 길을 누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