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 자락에는 조선족 정취가 짙게 풍기는 작은 마을이 있다. 안도현 송강진 송화촌 마을길 량켠으로 민속특색을 띤 기와와 흰 담장으로 된 민가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고 앞마당에는 과일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안도현송화촌관광발전유한회사 리사장 리주군(43세)은 송화촌 촌민들과 함께 손잡고 새 농촌을 건설해온 선두자이다. 지난 8월 22일, 기자는 리주군을 만나 창업의 길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도현 송강진 반도촌에서 태여난 리주군은 여섯 형제자매중의 막내였다. 그가 10개월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살림살이는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생활의 무거운 짐은 어머니의 어깨에 메워졌다. 어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12살의 리주군은 커다란 상자를 등에 메고 장백산 관광객들을 상대로 얼음과자를 팔았다. 어린 리주군이 가여워 얼음과자를 높은 가격으로 전부 사간 관광객이 있는가 하면 생활용품, 볼펜을 그에게 선물하면서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고 응원해준 고마운 분들도 많았다. 생계를 위해 접하게 된 ‘관광업’은 어린 소녀 리주군에게 이런 따스한 기억들을 남겨주었다. “그때 이름 모를 그들이 베푼 관심과 사랑은 저에게 끊임없이 전진할 동력을 주었습니다.”
16살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심양, 산동 등 곳을 전전하던 날들에 그는 관광회사에 취직해 장백산을 널리 홍보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2000년, 타향살이에 고향이 그리웠던 그는 남편과 함께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에 돌아와 관광 관련 제품과 특산물 판매로 창업의 길에 뛰여들었다.
“창업 초기에는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될 거라 믿었습니다. 매달 50원의 가격으로 촌민의 집을 세맡아 겨우 발붙일 곳을 마련했습니다. 초반에는 자전거를 타고 장백산 관광지도와 비옷 등을 팔다가 후에는 자그마한 가게를 임대하여 특산물도 팔았습니다.”
생활이 점점 나아지고 있을 무렵이였던 2010년, 홍기촌에 보기 드문 홍수재해가 닥쳤다.
“7월 28일이였습니다. 2메터 높이에 달하는 홍수가 쳐들어와 거의 모든 것을 휩쓸어갔습니다. 그날 두살 생일이 갓 지난 둘째를 등에 업고 간신히 몸만 피신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3시쯤에 넋을 잃고 갈팡질팡 가게를 복구하려 헤맸지만 온통 진흙만 남아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회억하면서 리주군은 눈시울을 붉혔다. 6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는 관광 성수기를 위해 전부 가산을 긁어모아 40만원의 상품을 구입해놓았던 터였는데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나니 그들 부부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회 각계에서 구조물품을 보내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평소 저를 딸처럼 대해주셨던 촌민들도 나서서 도와주었고… 홍기촌은 저로 하여금 감사함을 깨닫게 해준 곳입니다.”
민속 관광업의 밝은 전망에 굳은 확신을 품고 있었던 리주군은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재해를 입은 다섯날 후인 8월 3일, 그는 용기를 내여 재출발했다. 조선족마을이였던 송화촌에서 관광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지만 리주군의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촌당지부에서 나서 조률을 해주었고 마을에서 11평방메터 되는 작은 가게를 세맡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부터 가게는 궤도에 들어서 꽤 만족할 만한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고 리주군은 정부의 도움으로 조선족민속관광봉사전문합작사를 세웠다. 현재 합작사는 민속체험구역, 농산물 전시구역, 민속공연식당,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기지 그리고 특색 민박 등 규모를 갖추었다. 해마다 촌 집제경제에 12만 5000원의 수익을 창출하게 되였고 촌민들은 배당금을 받는 한편 합작사에 취직해 월급도 받고 있다.
“2019년에 송화촌을 찾은 관광객은 연인수로 17만 9000명에 달했고 1679만원의 판매액을 달성했습니다. 최근 몇년간 전반 관광환경이 전변을 가져오면서 관광객들은 쇼핑보다 직접 체험하는 관광모식을 많이 선호합니다.”
새로운 관광봉사를 탐색하기 위해 리주군은 남방지역의 여러 곳을 현지 답사했다. 그는 타지방의 성숙된 향촌관광 경험을 참고하여 ‘향촌관광+농업’의 일체화 모식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계획을 세운 후 그는 바로 착수해 나섰다. 촌내 12개 유휴농가를 ‘과수+민박’으로 개조했고 민박마다 여러 품종의 과일나무를 심었다. 알알이 영근 열매로 가지가 휘여진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리주군은 “자두, 사과, 사과배, 살구 등 12가지 과일나무가 있는데 민박에 묵는 관광객들은 스스로 따먹을 수 있어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고 뿌듯하게 말했다.
민박을 둘러보다 빨간색 자전거로 장식된 특별한 담장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23년 전, 저는 이 자전거로 물건을 싣고 나르며 팔았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순탄치 않은 길을 돌이키게 해주고 많은 분들이 저에게 베푼 사랑과 굳게 견지할 수 있도록 보내준 응원을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자전거입니다.”
리주군은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다시 베풀고 타인에게 행복을 전하면서 나눔을 실천했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안도현애심협회 회원인 그는 생활형편이 어려운 촌민들을 찾아 도움을 이어왔다. 백내장으로 인해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던 송화촌 촌민 김진수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그의 아들은 최저생활보장금으로 간신히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진수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골절상을 입자 김진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알게 된 리주군은 애심소조를 무어 6명의 성원과 함께 륜번으로 김진수의 아들이 회복될 때까지 40일 동안 김진수를 돌봐주었다. 뿐만 아니라 결손가정 자녀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고중 2학년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왕명양 학생에게 리주군은 어머니가 되여주었고 함께 생활하면서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도록 했다.
송화촌에서 보내온 시간도 어언 13년… 그동안 쉽지 않은 창업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오면서 리주군은 ‘전 주 5가지 훌륭한 문명가정 모범’, 안도현 ‘창업선봉’, ‘안도 훌륭한 이’, 안도현 ‘효친경로 모범’ 등 영예들을 받았다.
“그 사이 송화촌의 하나하나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려는 저의 마음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소박한 말 한마디지만 촌민들과 함께 더욱 행복한 앞날로 나아가려는 희망은 그의 진심과 함께 조용히 부풀어가고 있었다.
안도현 송강진 반도촌에서 태여난 리주군은 여섯 형제자매중의 막내였다. 그가 10개월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살림살이는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생활의 무거운 짐은 어머니의 어깨에 메워졌다. 어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12살의 리주군은 커다란 상자를 등에 메고 장백산 관광객들을 상대로 얼음과자를 팔았다. 어린 리주군이 가여워 얼음과자를 높은 가격으로 전부 사간 관광객이 있는가 하면 생활용품, 볼펜을 그에게 선물하면서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고 응원해준 고마운 분들도 많았다. 생계를 위해 접하게 된 ‘관광업’은 어린 소녀 리주군에게 이런 따스한 기억들을 남겨주었다. “그때 이름 모를 그들이 베푼 관심과 사랑은 저에게 끊임없이 전진할 동력을 주었습니다.”
16살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심양, 산동 등 곳을 전전하던 날들에 그는 관광회사에 취직해 장백산을 널리 홍보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2000년, 타향살이에 고향이 그리웠던 그는 남편과 함께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에 돌아와 관광 관련 제품과 특산물 판매로 창업의 길에 뛰여들었다.
“창업 초기에는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될 거라 믿었습니다. 매달 50원의 가격으로 촌민의 집을 세맡아 겨우 발붙일 곳을 마련했습니다. 초반에는 자전거를 타고 장백산 관광지도와 비옷 등을 팔다가 후에는 자그마한 가게를 임대하여 특산물도 팔았습니다.”
생활이 점점 나아지고 있을 무렵이였던 2010년, 홍기촌에 보기 드문 홍수재해가 닥쳤다.
“7월 28일이였습니다. 2메터 높이에 달하는 홍수가 쳐들어와 거의 모든 것을 휩쓸어갔습니다. 그날 두살 생일이 갓 지난 둘째를 등에 업고 간신히 몸만 피신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3시쯤에 넋을 잃고 갈팡질팡 가게를 복구하려 헤맸지만 온통 진흙만 남아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회억하면서 리주군은 눈시울을 붉혔다. 6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는 관광 성수기를 위해 전부 가산을 긁어모아 40만원의 상품을 구입해놓았던 터였는데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나니 그들 부부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회 각계에서 구조물품을 보내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평소 저를 딸처럼 대해주셨던 촌민들도 나서서 도와주었고… 홍기촌은 저로 하여금 감사함을 깨닫게 해준 곳입니다.”
민속 관광업의 밝은 전망에 굳은 확신을 품고 있었던 리주군은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재해를 입은 다섯날 후인 8월 3일, 그는 용기를 내여 재출발했다. 조선족마을이였던 송화촌에서 관광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지만 리주군의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촌당지부에서 나서 조률을 해주었고 마을에서 11평방메터 되는 작은 가게를 세맡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부터 가게는 궤도에 들어서 꽤 만족할 만한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고 리주군은 정부의 도움으로 조선족민속관광봉사전문합작사를 세웠다. 현재 합작사는 민속체험구역, 농산물 전시구역, 민속공연식당,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기지 그리고 특색 민박 등 규모를 갖추었다. 해마다 촌 집제경제에 12만 5000원의 수익을 창출하게 되였고 촌민들은 배당금을 받는 한편 합작사에 취직해 월급도 받고 있다.
“2019년에 송화촌을 찾은 관광객은 연인수로 17만 9000명에 달했고 1679만원의 판매액을 달성했습니다. 최근 몇년간 전반 관광환경이 전변을 가져오면서 관광객들은 쇼핑보다 직접 체험하는 관광모식을 많이 선호합니다.”
새로운 관광봉사를 탐색하기 위해 리주군은 남방지역의 여러 곳을 현지 답사했다. 그는 타지방의 성숙된 향촌관광 경험을 참고하여 ‘향촌관광+농업’의 일체화 모식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계획을 세운 후 그는 바로 착수해 나섰다. 촌내 12개 유휴농가를 ‘과수+민박’으로 개조했고 민박마다 여러 품종의 과일나무를 심었다. 알알이 영근 열매로 가지가 휘여진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리주군은 “자두, 사과, 사과배, 살구 등 12가지 과일나무가 있는데 민박에 묵는 관광객들은 스스로 따먹을 수 있어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고 뿌듯하게 말했다.
민박을 둘러보다 빨간색 자전거로 장식된 특별한 담장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23년 전, 저는 이 자전거로 물건을 싣고 나르며 팔았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순탄치 않은 길을 돌이키게 해주고 많은 분들이 저에게 베푼 사랑과 굳게 견지할 수 있도록 보내준 응원을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자전거입니다.”
리주군은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다시 베풀고 타인에게 행복을 전하면서 나눔을 실천했다.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안도현애심협회 회원인 그는 생활형편이 어려운 촌민들을 찾아 도움을 이어왔다. 백내장으로 인해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던 송화촌 촌민 김진수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그의 아들은 최저생활보장금으로 간신히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진수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골절상을 입자 김진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알게 된 리주군은 애심소조를 무어 6명의 성원과 함께 륜번으로 김진수의 아들이 회복될 때까지 40일 동안 김진수를 돌봐주었다. 뿐만 아니라 결손가정 자녀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고중 2학년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왕명양 학생에게 리주군은 어머니가 되여주었고 함께 생활하면서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도록 했다.
송화촌에서 보내온 시간도 어언 13년… 그동안 쉽지 않은 창업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오면서 리주군은 ‘전 주 5가지 훌륭한 문명가정 모범’, 안도현 ‘창업선봉’, ‘안도 훌륭한 이’, 안도현 ‘효친경로 모범’ 등 영예들을 받았다.
“그 사이 송화촌의 하나하나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려는 저의 마음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소박한 말 한마디지만 촌민들과 함께 더욱 행복한 앞날로 나아가려는 희망은 그의 진심과 함께 조용히 부풀어가고 있었다.